길을 예비한 사람들(1)- 광야의 외치는 소리 세례요한
1열왕 18,16-19; 마르 1,1-8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하고 선포하였다.”

교회가 지키는 달력으로 오늘부터 성탄절을 앞둔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대림이라는 한자말은 기다릴 대(待)짜와 임할 림(臨)의 결합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한자어 대짜는 예전에 왕과 같은 귀인을 옆에서 모시는 시(侍)와 상통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대림이라는 말은 왕과 같이 아주 귀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손님이 오면 어떡합니까? 안팎으로 청소를 깨끗이 합니다. 몸치장도 달리하고 옷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더더욱 귀한 분이면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문 앞에 나갑니다. 게다가 이분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님이라면 우리의 자세는 더더욱 달라집니다. 설레는 마음을 품고 정거장으로 갑니다. 그리곤 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이 빠지게 입구를 바라보고 한시라도 빨리 보기 위해 발돋음을 세웁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는 이런 짧은 글귀가 있습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할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예배시간 20분전부터 성전에 나오셔서 조용히 기도하며 설교 본문을 찾아 읽어보는 분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그러한 임을 향한 뜨거운 설레임을 읽습니다.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대림의 원말은 라틴어 Advent에 근거합니다. Advent 란 말은 도착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영어 단어로 advance 전진한다는 말도 있고 adventure 모험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림절이라고 번역되는 Advent란 말은 단순히 아기 예수가 이 땅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신앙적인 모험과 개혁을 통해 다가오는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 대림절 4주간에는 매주 한 개의 촛불을 켭니다. 그리고 이 촛불에는 각기 상징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오늘 켜는 첫 번째 촛불의 상징어는 Love.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성탄절은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신 날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자녀가 불행한 것과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크리스챤들은 불행한 크리스챤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자녀들이 손을 벌리고 부모님의 품 안에 안길 때에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듯이, 우리가 나의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이 촛불의 은은한 빛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나를 품으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촛불은 Hope 희망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실패와 고난을 당하더라도 희망을 잃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것을 끝나지 아니하고 저 하느님의 나라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에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어제 광화문에는 자주와 평화를 갈망하는 이땅의 사람들이 미순효순의 억울한 죽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위해 촛불모임 첫돌을 맞아 모였습니다. 그리곤, ‘이 촛불로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소리쳤습니다. 이 촛불은 바로 하느님의 정의는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희망의 촛불입니다.
세 번째의 촛불은 Joy,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런데 그가 평온한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면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전파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붙잡혀 있으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촛불은 Peace 평화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때에 하늘의 천사들이 외친 합창의 노래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오늘도 전쟁과 테러의 공포, 그리고 기아와 살인의 먹구름이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중동의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우리나라의 3.8선 그리고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 등 세계 곳곳에는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바라는 자는 복이 있다. 저들이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용서와 화해라는 농기구를 갖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가는 의인들의 몫입니다.

또 보시는대로 오늘부터 강단의 색깔이 보라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라색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보라색은 고난과 아픔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고통에도 때를 참고 기다리는 인고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 이를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이해하면 보라색은 태극기의 문양인 음과 양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을 합한 색깔, 이른바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색깔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때의 종말, 하나님 나라 완성이란 다름 아닌 주님이 이 땅에 임하는 순간 곧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어지는 나라라면, 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저는 이번 대림절 4주간의 설교 큰 제목을 ‘기다림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기다림이 단순히 팔짱끼고 앉아있는 기다림이 아닌, 오고 있는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기다림이기에 ‘길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첫 번째 인물로 광야의 외치는 소리 세례 요한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4개의 복음서는 각기 독특한 시각에서 세례요한을 말하고 있지만, 모두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외쳤고, 이를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과 이 세례를 예수님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누가복음만이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그와 예수님과 관계는 6개월 먼저 태어난 사촌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실적으로 예수의 일생과 초대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했던 누가가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를 4촌간으로 말했다고 한다면, 이 두 사람은 이미 그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당시의 관습대로 열세 살 때부터 최소한 일년에 세 번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면, 그때 예루살렘의 제사장의 아들로서 그곳에 살고 있었던 사촌 같은 또래의 세례 요한과는 청소년 시절부터 상당한 교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매우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자 나왔을 때에 멀리서 그를 알아본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가는 저 어린양을 보라.’고 말하는가 하면, ‘오히려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어떻게 당신께서 나에게 오십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많은 이목을 받았습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과 같이 그 부모 즈가리아와 엘리사벳이 늙어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냥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사가랴가 사제로서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릴 때에 천사의 예언에 의해 태어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나실인으로 자랍니다. 그러나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에 의하면 그의 과거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단지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광야에 나타난 소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그는 하늘의 소리를 외치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이는 들판에서 살아가는 야인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 모습은 동시의 구약의 한 예언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이건 성경을 몰라도 아이큐가 두 자리 이상이면 누구라도 알아맞힐 수가 있습니다. 누구에요? 엘리야. 제가 구약성경 말씀을 그냥 읽습니까? 오늘의 주제와 관계가 있으니까 읽지요. 열왕기하 1장 8절에 가면, 엘리야의 모습을 같은 모습의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요르단에 가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척 간에 엘리야의 언덕이라 불리우는 그의 승천 장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늘나라로 승천해간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분명히 하늘나라로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요르단을 가서 요단강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장소에 섰습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90도 틀면 엘리야의 승천 언덕이 보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시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틀면 걸어서 두세 시간 정도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산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어야 했던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서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모두 한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전율을 느꼈습니다. 성서 전체의 맥을 연결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를 한꺼번에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의 해방 전통과 모세 5경을 기록함으로 사제전승의 시작인 모세, 그리고 예언자의 대표로 말해지며 메시야의 예표로 말해지는 엘리야, 그리고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물론, 세계가 기독교의 역사는 아니지만, 제가 믿는 세계관에서 본다면, 저는 당시 바로 역사의 중심,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광야이지만, 제 뇌리 속으로는 한줄기 빛이 파고 들어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이어 요르단을 여행하며 한 가지 질문이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왜 모세나 엘리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모하메드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종교적으로 말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창시자들이 모두 이 허허벌판 광야에서 나왔을까? 물도 넉넉하고 나무도 많고 농사도 풍부하여 먹을 것이 풍부한 서유럽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나오시지 않고 이렇게 메마른 땅, 돌밖에 보이지 않는 이 거친 광야의 땅에서 나오셨을까? 여기에 어떤 종교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종교적인 의문들, 그리고 삶의 의문들이 조금씩 풀려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번 여행에서 무슨 큰 깨달음을 얻어 도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어렴풋이나마 신앙이랄까 인생이랄까 어떤 엉클어진 실뭉치의 끝을 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하긴 제가 미국에서 이곳으로 올 때,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 교우 한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은 수염도 있고 한복을 입으면 마치 도사같은 인상을 풍기네요. 목사님 이번에 가셔서 서울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이렇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혹시 도를 아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더니 일종의 점술을 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끌기 위한 세일즈맨들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말을 재촉하자 그 친구가 말하기를 ‘목사님, 그럴 때는요. 목에 힘을 주고 내가 곧 도요. 그렇게 말하세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제게 이런 말을 해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 있으면 향린교회로 끌고 올텐데 말입니다.

아마 이 광야에 대한 영성 얘기는 종종 언급이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처음 올 때에 이력서에 ‘영성훈련자’라는 말이 있어서 많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부흥사들이 이 영성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 혹 이번에 오는 조목사가 부흥사가 아니냐? 그런데 사실, 제가 의미하는 영성은 이런 광야의 영성, 더 나아가 경계의 영성을 말합니다. 사실, 저는 송두율 교수께서 경계라는 말을 언제부터 썼는지 모르지만, 지난 3년 전 한신대에서 설교를 하면서 이민신학을 언급하며 이 경계신학이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역사를 움직여나가는 개혁과 창조는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는 경계에 설 때에 오는 성령의 힘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아니 이쪽과 저쪽을 함께 아우르는 제 3의 길은 바로 이 경계선상에 서있는 자들에게 온다. 물론, 이것이 헤겔의 변증론을 뜻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것이 어떤 철학적인 논리전개의 의미에서가 아닌, 실존적인 의미에서 삶의 현장성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이민의 삶은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 3의 이방인의 길입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돌아왔지만, 저는 그렇다고 이곳에 계속 거주해온 한국인과도 동일시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다시금 미국으로 돌아가 그들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또 다른 3의 길, 이방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고독의 길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경계선상에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길을 선택했고 또 여기에 하느님의 변혁과 창조의 역사가 임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이 경계선상의 길은 바로 모세가 저 비스가 봉우리에서 가졌던 심정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120년간의 삶을 크게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40년간은 애굽 궁정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압박자 애굽인과 피압박자 히브리동족 어느 쪽과도 동일시할 수 없었던 경계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인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그래서 동족을 위해 일하기 위해 나섰지만, 동족 또한 그를 애굽인으로 배척하였습니다. 그 이후 또 다른 광야에서의 40년간의 삶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선상에 서는 외로움과 고독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삶을 접었던 그 순간 하늘과 땅의 경계인 호렙산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거부하고 거절하다 끝내 승복한 이후 마지막 40년의 삶은 그 이전보다 더욱 치열한 투쟁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애굽인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자기와의 싸움도 아닌,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통곡하고 절규한 경계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비로소 그는 그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저 비스가봉우리 위에 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반석을 쳐 물을 낼 때에 백성들을 향해 분노했다는 일로 인해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낙인을 이미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저 멀리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저들의 꿈을 펼치고 나갈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그의 비전과 꿈이 현실로 드러난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땅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끝내 경계인으로 이 땅을 떠나야하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조금만 젊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하늘을 향해 이런 항거의 소리를 외쳤겠지요. ‘아니 당신을 위해 평생을 걸어온 이 종에게 저 눈 앞에 보이는 약속의 땅을 들어갈 수 없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가다가 하늘로 오는 벼락을 맞는 한이 있어도 걸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나이 120세의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지혜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성서는 120세의 나이에도 그는 눈이 밝은 사람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그는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역사의 전면에서 조용히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거의 천오백년의 세월이 지나 그 땅에 다시 나타난 인물이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당시 아합 왕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나라는 부강했습니다. 이웃의 많은 작은 나라들은 자신의 딸을 조공으로 바치며 조약을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중의 한명이 시돈왕의 딸 이세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매우 욕심이 많고 영악한 여인으로 자기들의 이방신들을 끌고 들어옵니다. 남편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곡식과 자녀의 다산이라고 하는 당장의 축복을 보장하는 바알과 아스라의 신들에게 매혹적으로 끌려갑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아합왕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3년간의 가뭄을 선포하지만, 아합왕과 이세벨왕후는 힘과 백성을 볼모로 끝내 거부합니다. 결국 이 엘리야는 가르멜산 정상에서 이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대결합니다. 그리곤 통쾌한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엘리야를 또 다른 메시야의 상징으로 기다려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약 800년이 지나 여기 세례 요한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바로 그 승천의 장소에서 그리고 저 멀리 모세가 마지막 섰던 그 비스가봉우리를 바라보며 선 것입니다.

광야에 서면 낮에는 해의 뜨거움과 들판의 반사로 눈을 뜨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눈을 떠보았자 그리고 보이는 게 없습니다. 어딜 가나 똑같은 황야 벌판입니다. 사면을 보아서는 별로 나올게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밤에 활동합니다. 밤이 곧 낮입니다. 밤에도 별로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활동하기는 좋습니다. 순례를 할 때도 낮보다는 밤이 더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선선할뿐더러 밤에는 방향을 가리켜주는 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별은 위에 있습니다. 광야의 사람들은 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위를 바라보는 삶, 거기에서 믿음이 출발하고 신앙이 여물어갑니다. 광야에서는 공간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농경지가 있는 정착문화가 아닌 양을 치는 유목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옮겨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공간이란 단지 머물기 위한 장소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계속 옮겨 다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유한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귀찮기만 합니다. 오히려 이동성을 제한합니다. 그저 접어도 폈다하는 천막과 물을 끓여 먹는 주전자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 여행 중에는 바로 그 유목민 곧 베드윈족들이 수 천 년 동안 살아온 바로 그 사막 한가운데의 천막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그날은 낙타를 타고 가지는 않았고, 털털거리는 4륜 기아의 찝차에 올라타고 갔었습니다. 그 천막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가 경험했던 그 유목문화와 이동성, 곧 무소유를 생각하였습니다. 보이는 것은 천막뿐이었습니다. 그 안에 별다른 옷장도 찬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습니다. 연속극 대장금을 보거나 코메디를 보고 웃는 약간의 억지가 담긴 웃음이 아닌, 하늘 그대로의 웃음 사막이 보여주는 자연의 웃음 그대로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물로 주었기에 물세례이긴 하였지만 그것의 중요한 의미는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걸어가던 삶의 자세를 180도 돌린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뭐 내가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회개하라가 아닌,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했는데 그거 잘못되었으니 회개하라는 표피적인 회개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회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 말 한마디 혹은 생각 하나를 바꾸는 그런 부분적인 회개가 아닌 전폭적인 회개를 세례 요한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의 회개입니다. 광야에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또 회개를 말하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남만을 바라보는 후렴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회개 설교만 하면 이 설교는 남편이 들어야 한다. 혹은 저 사람이 잘 듣고 깨달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만, 회개는 자신을 향한 하늘의 소리입니다. 변혁에도 물리적인 힘에 의한 외적혁명이 있는가 하면 회개 곧 메타노이아를 통한 총체적인 변혁 곧 내적 변혁이 있습니다.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과 새로운 존재 양식을 말합니다. 새로운 존재 양식 바로 그것이 세례 요한이 외치는 광야의 회개입니다. 오늘 우리 향린에는 그러한 새로운 변혁이 필요치 않습니까? 우리는 예배 때마다 고백합니다. 낮은 곳으로 그리고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까? 몇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지난 한달 전부터 삼성생명복직회복투쟁위원회 분들이 낮에는 금식투쟁을 하시고 밤에는 우리 교회 유치부실에서 기거하시다가 지금은 기독교회관 복도에서 기거하십니다. 그리고 예배에도 몇 번 참석하셨는데, 우리 향린교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그들에게 다가가 따뜻한 위로의 손을 내밀었는가? 하는 자성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을 맞아 보다 솔직하고 보다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약에 오늘 우리 향린교회를 오신다면, 주님은 지금 이 예배드리는 3층에 거하실까요? 아니면 저 거리의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실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단지 국악으로 울려 퍼지는 예배의 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러 이곳에 왔습니다. 예배의 형식 속에 담긴 죽은 주님이 아닌 말씀 속에 살아있는 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 살아계신다고 믿습니까?
광야는 히브리어로 ‘므드바르’입니다. 므는 장소접두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혹은 율법을 다바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광야를 뜻하는 드바르와 말씀인 다바르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있어서 광야는 허허벌판 황야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소리를 외치고 광야로 나아와 세례를 받으라는 외침은 너의 삶을 보장해주는 네가 이룩해 놓은 그 삶의 둥지를 떠나 하느님의 말씀의 세계 공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지만, 시간적으로는 곧 풍성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을 약속하는 광야에로 나아오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이 외치는 광야에서의 회개의 세례는 바로 나를 떠나 공간을 떠나 하느님의 믿음의 세계로 눈을 뜨고는 보이지 않지만, 감으면 보이는 시간의 영원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베드윈이라는 말의 어원은 just begun 이제 막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향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유목민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새로운 장소에서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한 신앙의 전통 속에 서있는 우리들은 최소한 일년에 한번은 정말 새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는 툭툭 털고 어저께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은 쓰레기같이 여기고 전혀 새로운 것 주님의 시선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계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외치는 광야의 소리이지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세례인 것입니다. 향린의 교우 여러분 우리는 결코 과거에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 가십시다. 낮은 자세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저 광야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그 곳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이제 함께 나눌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우리 몸 속에 들어갈 때에 낮은 자를 향하신 그분의 삶이 함께 녹아들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