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예비한 사람들(2)- 제 2주자 : 요셉
창세 3,1-13; 마태 1,18-25
우리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연극으로 본다고 할 때,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누구누구입니까? 아기예수 마리아, 요셉 동방의 박사들, 여관집 주인, 헤롯왕과 그리고 신하들, 그리고 목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등장인물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하라면, 아기 예수, 마리아, 동방박사들, 목자들, 헤롯왕 이렇게 내려갈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이 성탄절 연극에 있어서 빠져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복음서를 읽어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 처음 탄생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골고다의 언덕까지, 그리고 부활의 첫 목격자의 한사람으로 끝까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모마리아로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아버지 요셉은 단지 그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사실만을 제외하고는, 그의 생애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은 어린 시절에 잠깐 등장하였다가는 곧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엑스트라 배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요셉은 단순한 엑스트라의 역이 아니라, 너무나 중요한 역을 담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비신앙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믿는 예수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까지도 물을 수 있을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관계였을 때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약혼 관계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약혼과는 조금 다르습니다. 당시의 약혼은 죽음 외에는 서로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사실혼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사회는 우리나라의 옛 사회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대 사회는 인간 앞에선 맺은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었기에 한번 맺은 약혼의 관계는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예외적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순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입니다. 모세 율법은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마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도록 되여 있었습니다. 성경은 여자만의 부정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이 법은 남녀 공히 지켜져야 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혼의 관계 속에서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순결을 지켜 오던 요셉의 귀에 꿈에라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 글쎄,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지. 아니 배가 잔뜩 불렀던데 뭐.” “하 하 요셉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구만, 점잖은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근엄하기만 한 요셉도 별수 없구만. 알고보니 속으로 잔뜩 호박씨 까는 친구여.” 마을의 아낙네들이 입방아를 찧기 시작합니다. 소문은 급기야 요셉의 귀에 까지 들어갑니다. 아니, 세상에 그럴 리가 있나? 하며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더니,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셉은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배반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당장이라도 뛰어 가서 결단을 내었으면 했습니다. 아니, 당장 머리채를 잡아 당겨 마을 광장으로 끌어내 온 마을의 사람들에게 이 뱃속의 아기는 내 아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여 자신의 실추한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순간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런 수치와 배반감 속에서 자기 결백을 증명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하지 않은 수치스런 일을 남이 했다고 할 때, 그것을 묵묵히 참고 지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이런 상황이 되면,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은 간곳없고, 하나님의 정의를 들먹거리며, 흑백을 가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말하기를 요셉은 ‘법대로 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법대로라면 요셉은 이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마음의 번민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자세하게 그 상황을 설명하지 않지만, 오늘 얘기의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엄청난 분노와 쓰라린 배반이 숨어 있습니다. 또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면 몰라도 법을 주장하고 원칙을 주장해온 사람이 논리 보다는 상황을 중시하고 법 보다는 사랑을 앞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단지 그녀를 사랑했다는 그 이유하나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덮고 조용히 파혼을 하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그날 밤 거의 뜬눈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그런데, 그 잠못 이루는 고통스런 그 밤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되리라고 그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했던 그 순간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바로 그날 밤 파혼을 결정한 그날 밤,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 하늘의 음성은 너무나 뚜렷하게 들려왔습니다. 그의 영혼 그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감격에 휩싸입니다. 온 백성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메시야가 자기 집안에서 나온다니. 아무런 자격도 없고, 하나의 미미한 목수에 불과한 자신의 가정에 메시야가 온다니. 그는 거기서 엎드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그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나마, 마리아를 의심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고, 모든 오해와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특별히 사랑하는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받는 오해에도 변명 한번 할 수 없었던 그 마리아의 아픔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오자 그는 가슴 저며 오는 감격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구약 처음에는 아담과 이브라는 부부 얘기가 나오고 신약 처음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부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관계에 있어서는 정반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저지른 아담과 이브는 잘못을 서로에게 미룹니다. 핑계를 댑니다. 아담은 이브 때문이라고 하고 이브는 하느님이 만든 뱀 때문이라고, 결국 이 둘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셉과 마리아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임신하여야 하는 마리아의 고통이나,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요셉의 고통은 누구나 쉽게 짊어질 수 있는 고통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약의 시대를 연 아담과 이브는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불순종의 조상으로 말해진다면, 복음과 은혜의 신약 시대를 연 요셉과 마리아는 정반대로 하느님의 말씀과 법도에 순종하는 약속의 조상으로 말해집니다. 따라서 요셉이 법대로 살아간 사람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원칙주의자라는 말도 있지만, 하느님의 법 곧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순종으로 시작한 요셉의 일생은 그리 순조롭지 만은 않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세상은 그를 반길만한 방이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갖는 고통이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마굿간에서 태어나야 하다니. 이후 새아기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마자 요셉은 또 다시 짐을 싸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동방의 박사들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을 들은 헤롯 왕이 자신의 자리를 두려워한 나머지 베들레헴 부근의 두 살 이하의 남아들을 모두 살해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잡으면 이렇게 자기 자리에 연연하게 되고 난폭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행복과 평안을 꿈꾸었던 요셉의 삶은 결혼 초장부터 험난한 삶으로 뒤바꾸어지게 됩니다. 이집트를 향해 떠나야 했던 그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한번 상상해보지만 성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탄절 연극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동방박사도, 성문 밖의 양치기 목자도 대사 한마디씩은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요셉은 한마디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는 말이 없는 침묵의 남자로 등장합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이 주인공의 스포트라이트의 그림자 뒤편에 그냥 머물러 살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레오날드 번스타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번스타인 선생님,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악기는 무엇입니까?” 정미악장님, 예향의 국악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악기는 무엇입니까? 번스타인이 답하기를 “그것은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과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참으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악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퍼스트연주자는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줄 세콘드 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이 우리말로 하면 ‘도우미’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크리스마스 연극에 있어 제2연주자입니다. 제1연주자 뒤에서 그를 도와 극을 완성해가는 조연자입니다. 누구나가 제1연주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의 시선과 박수를 받는 제1연주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2연주자 없이 제1연주자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남편의 성공 뒤에는 언제나 아내의 희생과 도움이 있습니다. 제2주자가 없는 제1주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소프라노가 소프라노가 되기 위해서는 알토도 있어야 하고 테너 베이스가 있어야 합니다. 멜로디가 멜로디 되기 위해서는 보조멜로디가 있어야 합니다. 제2연주자가 결코 2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조라는 말이 세콘드클래스 이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성공했다고 해서 남편은 일류요 아내는 이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맡은바 역할이 다른 따름입니다. 남편의 성공을 시기하는 아내가 있을 수 없듯이 조연자가 주연자를 시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고, 사랑의 관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이 곧 자기가 잘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사랑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집사 부서원이라는 2주자가 없는, 장로 부서장의 1주자만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더 넓게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인생이라는 음악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1연주자를 보조하는 제2연주자들인 것입니다. 때로 어떤 인생들은 자신이 제1연주자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제2연주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성장하는 한인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누군가가 화장실의 쓰레기를 비웁니다. 교회 사찰이 새벽부터 참으로 열심이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직업이 의사인데 일주일에 두 번 화장실 청소를 맡아서 한다고 합니다. 어느 포스트닥터로 있는 연구원 집사는 주일만 되면, 뒷주머니에 드라이버를 하나 넣고 방마다 돌아다니며 나사가 있는 곳은 다 한번씩 넣어서 느슨한 곳을 조이고 등을 갈아낀다고 합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은 바로 이러한 숨은 봉사자들이 많아질 때, 저절로 나는 것입니다.

시나이 사막에 치유의 은사를 받은 성자 논지우스에게 유방종양에 걸린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묻자 성자 논지우스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왜 찾느냐?고 하자, 그 분은 능력이 있어 기도하면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정말이라며 이 여인이 얘기합니다. 그러자 이 논지우스는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아 그 논지우스라는 친구는 사이비며 여기서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다 들키자 도망을 갔다.’고 얘기하고 ‘내가 대신 병을 고쳐주겠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고치실거다,’고 하고는 이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행여 내가 고쳤다 말고 하나님이 고치신 것 잊지 말아라 난 기도했을 뿐이다.’ 그러자 이 여인은 논지우스를 만나지 않은 것을 너무 감사한다고 하면서 마을로 돌아가서 논지우스는 사이비요 사기꾼이라는 얘기를 했고, 이 여인이 죽을 때도 논지우스는 사기꾼이라고 얘기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 후 논지우스는 사기꾼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 향린교회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때로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마치 성탄절 연극의 요셉과 같이 주인공의 그림자 속으로 나를 철저히 감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죽음 후에 이어지는 삶을 바라보는 낮아짐의 자세를 말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세례 요한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는 그의 위대함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날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르단강 건너편에 계시던 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습니다.’ 이때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 요한 그는 자기의 역할과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사라져야 하는 광야의 소리임을. 요셉 또한 자기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 2 주자로서의 역할을.

사회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 한분이 학생들을 시켜 볼트모아 빈민가의 한 국민학교에 가서 그곳에 다니는 200명의 어린 학생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조사하는 작업을 한 학기동안 하였습니다. 한명씩 한명씩 그 가정과 주위 환경을 조사한 대학생들의 조사 결과는 200명의 모든 학생들의 장래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한결같은 결론이었습니다. 25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이 사회학 교수는 우연히 이 연구보고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학생들을 시켜, 25년 전의 그 학생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200명의 학생들 중, 20명은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거나, 이미 죽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나머지 180명중 176명의 학생이 모두 잘 되어 그 가운데는 변호사, 의사도 있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교수는 이 결과에 너무나도 놀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를 더 조사했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 빈민가의 어려운 환경을 이기도록 만들었습니까? 당신의 성공의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사자들이 답변하기를 그것은 “바로 그 선생님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께서 살아 계셔서 그 교수가 찾아가서 이 학생들이 그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나오도록 만든 성공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백발이 성성한 은퇴 선생님이 말하기를, “나는 단지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은 아주 놀라운 결과를 자아냅니다. 우리는 곧잘 세상이 너무 악해졌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과연 필요한 것이냐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이 교회마저도 없었다고 한다면, 만약에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마저도 없었다고 한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도 이 사회를 이 정도 나마 훈훈하게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몸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노벨평화상의 수상자 테레사수녀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전합니다. “당신이 가는 어디에든지 사랑을 가지고 가세요, 먼저 당신의 가정에 이 사랑을 가지고 가세요, 당신의 아이들에게,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전해주세요. 당신을 만나러왔던 사람들이 당신을 떠날 때에는 찾아왔던 그 순간 보다는 더 기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하세요. 하나님의 살아있는 사랑의 사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얼굴에, 당신의 눈빛에, 당신의 작은 미소에, 당신의 따뜻한 인사말에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이를 함께 나누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요셉과 같이 세례요한과 같이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위한 제2 바이올린의 연주자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에페소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1장 17,18절) 제2 연주자의 축복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아기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실, 우리 가운데 오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신약시대에만 참 하느님이 계셨던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참 하느님은 계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하느님의 모습이 전에는 율법을 통해, 단지 경배 받으시는 하느님, 제사의 대상으로서의 신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가운데 함께 오셔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우리의 죄 짐를 스스로 지고 영문 밖, 곧 죽음의 상징인 골고다 언덕으로 가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성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성탄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느님은 우리 곁에 머무시고자 오시지만, 우리는 분주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빈방은 없다.’고 나그네를 향해 차갑게 문을 닫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주님은 그 발걸음을 마굿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머무를 방을 찾지 못하고 오늘도 차가운 거리에서 머물러야 하는 오늘의 아기 예수는 누구입니까? 제3국의 노동자들이요. 노숙자들입니다. 내가 주연이 아닌 내가 제2의 연주자인 것을 정말 깊게 깨닫는다면,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씁쓸히 미소 지으며 돌아서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작은 자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이 임마누엘의 주님을 발견하는 계절입니다. 낯선 얼굴, 검게 그을린 얼굴,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창고의 문을 여는 계절입니다. 요셉은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대사는 없습니다. 그는 오직 행동으로 말했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