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예비한 사람들(3) - 하느님의 스캔들 : 마태오 -
창세 38,20-26; 마태 1,1-17
올해 은퇴하시는 강동교회의 장성룡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교회 임보라 목사의 시아버지이시기도 하신 분이신데, 오랫동안 장애인들을 위한 목회를 하시었습니다. 이 장 목사님이 몇해 전에 내신 설교집 제목이 ‘하나님은 순 악질이데이’ 였습니다. 책 제목을 보면서 ‘참으로 도발적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늘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스캔들이라는 설교 제목을 보면서 이거 설교 제목 치고는 도발적이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요즈음은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주 자극적인 맛이 아니면, 맛을 느끼지 못하듯이, 설교도 웬만해서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듣는 일에 식상해 있어서 우선 제목이라도 특별해야 관심을 갖게 되는 목사 설교 수난시대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스캔들’ 거짓말 좀 부치면 이 제목 정하는데만 3일 걸렸습니다. 본문이나 내용은 2주전에 대충 머리 속에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제목 정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순 악질이데이.’ 보다는 훨씬 부드럽지 않나 생각합니다.

스캔들이라는 말은 본래 희랍어 스캔달론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것 혹은 장애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구절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게 됩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정의감 많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말립니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은 새날청년회 정준영 준목께서 지난 11월 수요헌신예배 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 유명한 말씀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게 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때 말한 장애물이라는 단어가 바로 스캔달론이라는 희랍어이고 이 말이 바로 우리가 흔히 쓰는 스캔들이라는 말입니다. 일반 대중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사회 유명인사들의 부정 혹은 불륜을 말할 때 씁니다. 요즘은 정치권의 검은 돈에 대한 기사가 넘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선량한 국민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스캔들입니다. 기업에 이익이 생기면 이 돈이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에게 분배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모두 뒷구멍, 개구멍으로 해서 정치권에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자는 계속 파업을 하고 정부는 힘으로 누르려고 하니 정치 경제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경유착의 비리를 끊어야 경제도 바로 살고 정치도 바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의 정치 수준이 높아져서 하여간 돈쓰는 정치인은 무조건 안 찍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단 돈은 받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의리가 많아 한잔 얻어먹거나 봉투를 받으면 꼭 찍어준다니까요. 이게 문제입니다. 내년 총선에는 이런 구호 하나 만들면 좋겠습니다. ‘봉투 돌리는 정치인들 죽어도 찍지 말고, 주는 봉투 꼭꼭 받아 교회에 헌금하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모두 4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신학자들이 마태가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마가는 저쩌구 어쩌구 하고 열심히 설명을 해도 일반 교인이 보기에는 별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예 한개만 골라서 혼돈을 없애든지 아니면 4권을 합쳐서 통합복음서를 만들면 좋겠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거 괜히 복잡하게 해서 목사나 신학자 밥벌이 시켜주는 것 아니냐?하는 반문도 나올 성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신약성서를 결정지을 때, 초대교부들이 그런 것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4복음서를 성서의 경전에 두는 것은 나름대로 각기 독특한 관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이 서로 다른 관점들이 모여서 보다 분명한 예수상을 만든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굳이 4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가 무엇이냐? 에 대해 우회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신앙공동체는 동질성의 집단이 아니라 이질성의 집단이라는 말입니다. 서로 다른 입장 서로 다른 견해 서로 다른 가치 이런 것들이 보다 큰 하나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4개 복음서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역사적 예수는 보다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듯이 우리도 서로 다르기에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화. 이는 서로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만나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monologue 독백입니다. 생각이 달라야 dialogue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협력한다고 말할 때에도 나와는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른 사람을 밀어줄 때, 협력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기와 같은 생각 같은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 협력 곧 남을 돕는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이해한다.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under-stand 밑에 서는 것. 다른 사람의 발밑에 가서 서보는 것. 이게 이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발밑에 가서 서봤어요? 그 사람을 받치고 있으려면 힘도 들고요, 발 고린내도 나고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밑에 있는 자기는 안보이고 자기 위에 있는 사람만 보입니다. 분통이 터지지요. ‘응, 나 당신 이해해.’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인디언 속담에 ‘남의 가죽신을 보름동안 신어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 맞지 않는 가죽신을 맨발로 신고 보름동안 산길을 돌아다니면 발은 온통 까질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이해는 참 이해가 아닙니다. 참 마음으로 상대방의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그 고통을 통과해서 나아갈 때에 진정한 이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교우들은 복음서가 4권인 이유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어보겠다고 신약성경을 펴자말자, 시험을 받는데 그건 누구는 누구를 낳고 하는 마태복음의 족보 때문입니다. 사실은 후에 나오는 마가복음이 보다 먼저 써졌지만, 이 족보 때문에 마태복음이 신약성경 맨 처음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이 족보에 담긴 진정한 마태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면, 이야말로 신약성경의 첫머리에 실린 만한 책이라고 동의하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행운의 깨달음을 다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마태의 족보를 이해함에 있어 마태복음은 우선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향해서 써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생애를 구약성서와 연결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사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따지기를 좀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족보 마지막 17절에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십사 대이라고 했으니 정말 십사 대인가 한번 꼽아보자 하고 세어보시면 이게 안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십삼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가기까지는 십오 대입니다. 그리고 마태의 실수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마태의 의도는 그런 숫자 맞추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족보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와 비교하면 또 다릅니다. 누가는 요셉부터 아브라함까지가 57대이고 그리고 누가의 족보는 하느님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쓴 이 족보는 역사에 근거한 사실적인 족보라기보다는 그의 신학적인 의도가 담긴 문서라는 것입니다. 우선 십사라는 숫자는 별로 성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열둘 혹은 열셋이라면 몰라도 열넷은 그 상징성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굳이 수치상으로도 맞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이 열넷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가? 혹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마태복음은 이 족보에 이어 동정녀탄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비도 없이 나오는 예수를 설명하면서 왜 족보는 또 필요한 것이며, 14세대라는 말은 강조하는 것일까? 마태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도 주석에서 본 것이 아니고, 제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틀릴 수도 있겠지만, 보다 더 납득할만한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면 저는 제 의견을 철회하겠습니다. 한번 답변을 들어보겠습니다. ... 제가 생각한 것은 14대 14대 14이면 모두 42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윗과 여고니와는 각 세대의 마지막 그리고 다음 세대의 처음, 두 번 겹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겹쳐지는 둘을 제하면 40대가 됩니다. 이제 이해가 되지요. 유대인들에게 40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40은 구원의 숫자입니다. 노아의 홍수 날이 40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노아의 홍수는 40이라는 숫자에서 보면 심판이 아니고 재창조의 구원역사입니다. 모세의 광야 40년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40년, 판관기에 나오는 사사들이 다스리는 햇수도 거의 40년입니다. 예수님의 40일 광야 금식기도. 2주전 설교에서 광야는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이라는 원어적으로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40이라는 숫자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수법을 쓰는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아브라함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 40대이다. 이렇게 했으면 보다 분명하고 좋았을 것 아니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 일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본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마태가 이렇게 분명하게 하느님의 상징인 40이라는 숫자를 표현했더라면, 이 복음서 또한 신성모독의 불온문서로 취급되어 복음의 전파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언제나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태는 이 족보 짜깁기를 통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아주 도발적인 얘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40이라는 숫자보다 더 도발적인 것은 다음에 있습니다. 이 족보에는 모두 남성들 이름으로 연결되는데, 이 안에 모두 5명의 여성이 나옵니다. 찾아봅시다. 우선 첫째는 3절에서 다말. 5절에서 라합과 룻. 6절에서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16절의 마리아. 여기서 오늘은 마리아를 언급하게 되면 동정녀 탄생에 대한 얘기까지 해야 하니 오늘은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여인들을 살펴보고 왜 마태는 남자들만의 이름들을 쭉 나열하다가 군데군데 이 여인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우선 이 4명의 여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성서의 얘기를 모르니 모르겠다. 제가 물을 때는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지식적인 것을 묻지는 않습니다. 몰라도 답을 할 수 있을 때 묻습니다. 이 4명의 여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스캔들의 주인공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불륜의 관계요, 맺어져서는 안되는 여인들입니다. 첫째는 이 여인들은 모두 4명이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유대 혈통, 할례를 구원의 절대조건으로 제시한 구약의 전통에서 보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간단간단히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다말,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4번째 아들인 유다가 가나안 이방여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첫아들이 장가를 갔는데,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이런 경우 둘째 아들이 이 형수와 결혼하여 씨를 이어줄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둘째 아들이 형 대신에 형수 다말에게 장가를 갔는데, 지가 사랑한 여인이 따로 있었던지 하여간 씨를 안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친구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습니다. 막내가 형수에게 장가를 가야 하는데, 이게 너무 어려서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말하기를 야, 막내가 큰 다음에 너에게 보내 집안의 씨를 잇겠다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말이 아들을 달라고 얘기하였지만, 시아버지가 다 늙어버린 다말에게 아들을 주기가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되며 미룹니다. 하루는 이 다말이 꾀를 내어서 거리의 창녀인척 하여 시아버지를 꾀어 임신을 합니다, 그래서 이 시아버지가 이 얘기를 듣고 때는 이참이다 하며 그놈의 며늘아기를 이참에 없애야겠다고 재판을 걸었는데, 드러나고 보니 자기의 씨앗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의 예수족보에 등장하는 유다의 뒤를 이은 베레스는 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건 상당한 스캔들입니다.

두 번째의 여인 라합. 이 여인은 가나안 예리고 성에 살고 있었던 직업이 창녀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공으로 그 가족이 살아났지만, 가나안 족속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요. 생활이 문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 또한 예리고 성안에서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이었고 창녀가 버젓이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룻. 이는 성서에서 아주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유대가족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모압 땅으로 이주를 하고 거기서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맞아 가정을 꾸밉니다. 그런데 한 집안의 남자 셋이 모두 차례로 죽고 세여인만 남았습니다. 먹고살기가 막연해지자,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둘을 불러놓고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터이니 너희는 아직 젊으니 이곳에서 새로 시집을 가거라. 하고 떠나고자 하는데, 둘째 며느리 룻이 한사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죽음의 자리에까지라도 함께 가겠습니다. 하고 따라 나서 결국은 당시 베들레헴의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잘 생기고 돈 많은 보아즈의 아내가 됩니다. 과거가 있던 여인, 그리고 이방 여인이 이 잘난 남자를 차지하였으니 얼마나 큰 스캔들이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밧세바라고 그 이름을 말하지 않고, 이름 대신에 아예 우리아의 아내 곧 남의 아내임을 분명히 못 박아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다윗왕, 이스라엘이 현군으로 꼽고 메시야의 상으로 말해지는 다윗왕의 치부를 송두리째 드러낸 말입니다. 우리야는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왕의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사를 전쟁터에 보내놓고 할 일이 없던 다윗왕이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스캔들의 시작입니다. 못 볼 것을 보았으면 눈을 감는 게 남자의 도리인데, 욕망을 참지 못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그 여인을 잠자리로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후에 정권투쟁에서 승리한 솔로몬의 배후에 어머니 밧세바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하필이면 그날 밤에 밖에서 목욕을 했는가? 이건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여성인권을 주장하시는 분들에게는 빰 맞을 소리이지만, 추파를 먼저 던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여간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습니다. 결국은 남편이 전쟁터에 가 있는 사이에 밧세바는 다윗왕의 씨를 배게 되고 다윗왕은 이를 감추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 장군을 불러내어 수고했다고 억지로 술을 먹여 집에 들어 보내지만,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데, 혼자 편하게 잘 수 없다고 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니 결국은 불륜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혼자 싸우다가 죽게 만듭니다.

이게 후에 알려져 다윗도 크게 회개하지만, 르윈스키 스캔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스캔들입니다. 게다가 이런 천인공노할 나쁜 년 놈, 곧 다윗왕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성서의 지혜서라고 일컬어지는 잠언서와 애가서의 저자라고 알려진 솔로몬 왕이 되었으니 이게 또 뭡니까? 네가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다윗 왕이 했으니 이건 로맨스이다 하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마태의 족보에 등장하는 4명의 여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먼 할머니이니 이는 하느님의 예정 속에 들어있는 로맨스이지 스캔들이 아니다 하고 억지를 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거야 말로 하느님의 스캔들이라는 겁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야 하는데, 문제 많은 여인들, 그것도 한명도 아닌 40명중에 4명. 십일조의 스캔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마태는 이런 스캔들의 야사를 숨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냥 남자들의 이름만 쭉 나열하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 많은 이 여인들의 이름을 굳이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무엇이었고, 또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는 초대교회에서 왜 이 대목은 삭제하지 않았으며, 신약성경의 가장 첫머리에 놓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정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스캔들의 야사로 군데군데 이어져 간다고 하는 인권선언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자는 한명의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에 족보라면 당연히 남자들만 올라가는 그 시대에. 그것도 유대인이라면 그것도 겨우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 네 명의 여인 모두 이방여인들입니다. 문제 많은 이방여인들로 하여금 역사를 이어가는 하느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인간들은 밖으로 드러난 정사로만 엮어가려고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역사는 뒤집어서 보라는 민중사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배우고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류에 의해 멸시당하고 가진 것 없는 소외된 계층들이 하느님의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얘기를 전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향린교회의 50년 역사를 말할 때에도 정사의 입장에서 말할 수도 있고, 야사의 입장에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정사의 입장에서 써내려가지만, 분명히 정사를 움직이는 것은 야사입니다. 전 연속극에는 취미가 전혀 없지만, 역사극이 다루고 있는 주제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남자를 움직이는 여인네들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전 그래서 이 마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이 족보는 바로 마태의 인권선언문이자 역사의 주체에서 밀려난 것 같은 하느님의 소외된 이방 민중들의 인권선언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권리를 찾지 못해 한 많은 소리를 외쳐야 했던 오늘의 다말은 누구이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야 했던 창녀 라합은 누구이고, 밖에서 들어온 이방 여인 룻은 우리 가운데 누구이며, 정권력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우리야나 밧세바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따분하기 그지없는 마태의 족보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오늘도 이러한 약자들과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다말이나 라합과 같이 손가락질 받고 소외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진행되고 있다는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할 것이고, 만약에 내가 이 족보에 나오는 다른 36명의 남성 가운데 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나 외에 저 힘없는 자들, 내 안중에 전혀 보이지 않는 저 작은 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아, 보다 자중하고 그들과의 연대의식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마태오가 인권주일을 맞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