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예비한 사람들(4) - 기적과 순종 : 마리아 -

즈가 9,9-10; 루가 1,26-38
과학이 발달하고 컴퓨터가 널리 사용되고 인간의 지식이 많아지면, 우리는 쉽게 생각하기를 인간은 점점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신비의 영역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동시의 신비의 세계도 점점 넓어져가고 있습니다. 일단 컴퓨터만 보더라도 공상만화 같은 게임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저희들 때보다도 지금 아이들이 공상소설을 더 많이 보고 있습니다. 공상소설 해리포터는 나올 때마다 세계적인 히트를 치고 있고, 우리 사회만 해도 점을 치는 역술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영화도 귀신 나오는 얘기들은 그만 나올 법 한데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매년 베스트셀러에 들어가는 책 중의 하나가 천사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인간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 영혼, 영성, 신비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곤란한 성서의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면 부활과 동정녀 탄생을 이야기하는데, 이중에서도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가 더 큰 신앙의 걸림돌로 얘기됩니다. 물론, 오늘의 성서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자면, 이는 다른 고대의 문헌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탄생설화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이 되었다든가 아니면, 신라의 혁거세가 박(알)에서 나왔다는 얘기와 비교할 수도 있고, 고대 근동지역의 왕의 탄생설화 혹은 에집트의 처녀가 신의 아들을 잉태하는 설화와 비교하며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믿음과 신앙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얘기를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는 성경에 나타난 어떤 이야기를 못 믿겠다고 해서 나는 신앙인이 될 수없다고 미리 단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무조건 믿는 것 보다는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믿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신앙은 그 의미를 묻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하필이면 문제시 되는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오셨을까? 성년의 몸으로 그냥 세상에 나타날 수도 있고 또는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한 후에 오셨다면 무엇이 문제인가?”이런 여러 질문을 가져 보는 것이 신앙인다운 태도입니다. 그런데 하나 주의할 것은 모든 질문에 답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종교는 신비의 영역을 다루고 있기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서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신의 경지에 올라있거나 정신병자 둘 중 하나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흔히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이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는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2천년 전에 일어난 하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만다면, 이는 정말 성경이 의도하는 것과는 전연 다른 태도입니다. 정말 기적은 동정녀 탄생 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우선,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동시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매우 중요한 얘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마음먹으셨을 때, 하늘에서 그냥 비행기를 내려 보내 우리 인간을 데려 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이 당하는 여러 아픔과 고난 그리고 기쁨을 몸소 겪으시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가르침의 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은 스스로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셔서 몸소 인간의 모든 한계성을 경험하고 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삶의 실천성을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고, 또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는 죄가 없이 태어나셔야 했기 때문에, 처녀의 몸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성서 저자들이 말하는 교리적인 이해입니다.

요즈음 현대의학은 대리모를 통해 실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에게서 아이를 낳게 할 수도 있고, 시험관 복제를 통해 똑같은 인간을 마구 양산해 낼 수 있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처녀가 아기를 밴다고 하는 일은 더 이상의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 보다는 정말, 기적은 하느님이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셨다고 점에 있고, 그리고 오늘 제가 관심하는 성탄절의 기적은 예루살렘의 훌륭한 집안의 여인들을 제쳐 놓고,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의 한 이름 없는 여인의 몸을 통해 메시아가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느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가난하고, 천대 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 곁에 오셨다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병들고, 가난하고, 힘없고, 그 당시 죄인으로 정죄 받아야 했던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과 같이 지내었습니다. 그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그들이야 말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들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세상일에 바빠, 예수님의 초청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거부할 뿐더러 예수님을 오히려 천한자로 여기고, 법을 어기는 죄인으로 정죄를 하고, 신을 모독하는 자로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처형이 바로 구원의 관문이 되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절의 기적은 바로 이 십자가의 신비, 곧 밑으로부터의 구원 역사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야는 다윗왕과 같이 군사의 힘으로 로마의 권력을 무찌르고 임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성탄의 메시지는 위로부터 오는 권력자의 구원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떠들썩한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서 시작하는 구원이 아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베들레헴 변방의 마굿간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영원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로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죽였던 예수, 예수는 십자가의 외침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모든 일을 당연시 여기고 있지만, 만약 예수 당대의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오늘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이는 기적입니다. 저 볼품없는 나무 십자가가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로마의 창칼을 이길 수 있었다니? 이건 절대 논리로 풀 수 없는 신앙의 수수께끼이자 현실로 드러난 기적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 구원역사의 첫 헌신자가 바로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였습니다. 요셉과의 결혼을 앞두고 준비 중에 있는 마리아에게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성령에 의하여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아기는 장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 상황에서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고, 이는 모험이기 이전에 너무나 큰 죄악이었습니다. 약혼자 요셉으로부터는 파혼을 당할 것이고, 자기는 불륜의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위태한 상황 속에서 마리아는 천사에게 대답하기를“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이 마리아의 전폭적인 자기 헌신과 하나님의 부름에 철저히 복종하는 이일을 통해 온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믿는 자들은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고 믿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이기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이것을 고백하지 자기에게 손해를 가져올 때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성도라면, 우리에게 설사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헌신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에게 유리할 때만 주의 뜻을 얘기하고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모른 채 한다면 믿는 자의 덕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야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하는 거 아닙니까?

주님의 역사는 그저 순탄한 가운데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모험도 필요하고 때로는 자기를 전적으로 희생하는 헌신도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밀알이 그대로 있어서 열매를 맺겠습니까? 자기가 해체되는 그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생명은 탄생하고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던 인권 콘서트에 참석하여 생각 있는 젊은이들의 호흡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귀청을 찢어대는 시끄러운 락뮤직도 있었고, 통기타의 조용한 음악도 있었지만, 저는 가만히 서있어도 그 소리의 진동으로 몸이 흔들리는 그 속에서 개혁과 진보, 모험과 정열로 상징화대는 저 젊은이들과 오늘 마리아의‘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는 순종과 처녀가 아기를 낳겠다는 이 성서의 얘기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기적과 사회적 개혁을 지향하는 실천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제가 장충체육관에서 3시간 가까이 서있으면서 물었던 질문입니다. 만약에 이 연결점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는 죽은 말씀입니다.

기적을 부정하는 진보적 신앙인들 가운데는 두 가지의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인결과의 법칙에 근거한 이성적인 판단에서 기적 그 자체를 부정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원인을 해명하지 못해서 그렇지 기적은 없다. 두 번째는 기적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교회에서 외치는 기적이라는 게 무엇인가? 대체로 현대의학이 포기한 병이 나았을 때, 기적이라고 한다. 그 기적은 그 사람에게는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도대체 나하고, 그리고 사회개혁적인 실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어쩌다 한번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교회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을 우매화시켜, 정의와 평화의 실체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죽이고 변질해 나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 옳다할 수 있는가? 종교적인 현상으로서의 기적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적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가복음 2장 34절 35절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가 당시의 정결예식을 좇아 성전에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옵니다. 이때,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예언자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고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한마디로 예수는 우리의 삶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에서 아이가 나올 것이라는 이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삶의 안전지대를 포기하고 예측할 수 없는 비 안전지대, 불안한 미래에로 자신을 던지는 행위였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 안에 자신의 뜻을 묻어버리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말은 곧 자기가 구축해 놓은 안전지대를 떠나 위험지대라고 여겨지는 하느님의 안전지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을 믿는 자의 삶입니다. 예수를 믿을수록 편해진다. 그건 뭔가 잘못되어가는 믿음입니다. 신앙에는 언제나 도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름은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 그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그곳이 자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이기에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주저하고 포기합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의 자리를 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개척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선구자라고 부릅니다.

오늘 마리아에 의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단순한 종교적 기적에 대해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시하시는 새로운 일들을 위해 과감히 자신을 던지느냐? 던지지 않느냐? 에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기적은 자연적 이치를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기적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영역 속에 거하던 자신의 삶을 예측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세계에로 던져 넣었다고 하는 의미에서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에게는 기적과 비는 같은 단어입니다. 기적은 일상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기적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기적이지만, 기대하거나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신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제 설교에 이어서 하나의 기적을 직접 보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12주 성서 배움마당을 마치신 17분의 나눔을 들었습니다. 다 하나같이 좋은 말씀들이었지만, 오늘 이 시간에 대표로 4분이 발표를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한분이 남옥순 집사님이십니다. 올해 연세 75세,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배움이 짧아 한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읽고 쓰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대학 졸업자들을 제치고 17명 수료자 중에 최우수 졸업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수요일 참석한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원래는 두 분만 발표하게 하려고 했는데, 2등으로 세분이 같은 표수를 얻어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2등과 나머지 분들은 한 표 차이라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1등과 2등을 포함한 나머지 분들과의 차이는 엄청난 표차이가 있습니다. 표수를 밝히면 다른 분들에게 너무 실망이 클 것 같아 밝힐 수는 없지만, 압도적인 표로 1등을 하신 분이 남옥순 집사님이십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던 분이 공부에 참여해서 최우수로 수료하시게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입니까? 바라기는 남의 것을 보시고 기적이라고 얘기만 하지 않고 헌신과 순종을 통해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