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짐과 비움
루가 2,8-20
조헌정 목사 (향린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지만,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경배했던 사람은 소수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루가복음의 말씀은 하늘나라의 초청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달려온 사람들은 베들레헴 마을 근방의 들에서 양떼들과 같이 밤을 지새워야 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목자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여야 했고, 들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성안에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성밖에 거주하는 소외된 계층이요, 종교적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가장 천시함을 받던 사람들이 다른 아닌 목자들이었습니다.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사람들이 바로 목자들이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무엇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의 표가 된다고 했습니까? 포대기에 싸여 짐승들의 밥통인 구유에 누워 있는 바로 그것이 표라고 말합니다. 값비싼 비단 천에 싸여서 금으로 된 황실의 침대에 누인 아기가 아니라, 이 땅에서 가장 천한 모습으로 오신 이 아기가 바로 우리 구주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주님의 모습을 연상하며 기다립니까? 금빛 나는 하늘의 쌍마차를 타고,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까? 2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세상이 말하는 평화에 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런 휘황찬란한 모습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이런 주님의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말합니다. 너무나 천하고 추하여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짐승들의 밥통에 누인 그 모습이 구세주의 표라고 오늘 성서는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시인으로 김지하 씨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생명경외 사상가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금관의 예수’라고 하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희곡을 주제로 한 연극은 70년대, 80년대의 대학생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이‘금관의 예수’라는 이 말은 김민기 씨가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고, 이 노래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김지하 씨는 이 ‘금관의 예수’라는 작품을 통해 오늘날의 현대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신부, 그리고 문둥이와 거지, 창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을 시켜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님 머리에 무거운 금관을 씌워 너무 무겁게 만듦으로 죽은 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합니다. 원래, 예수님은 복음서에 있는 대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오셨는데, 교회가 예수님의 삶을 종교라는 미명 하에 하나의 예식으로 묶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들의 언어 속에 가둬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다시 오셨는데 이를 다시 이번에는 가시 면류관이 아니라 휘황찬란한 무거운 금관을 씌워 다시 못 박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일하셨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가진 자들 편에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불의가 판을 치고, 가난한 자들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대도, 교회는 종탑만 높이 쌓아 올리고는 무거운 금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예수님의 동상 앞에서 자기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 성탄절의 축하 모임이 누구의 것이었던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 성탄절은 그 시대에 가장 천대받던 목자들의 것이었습니다.“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하늘의 평화가 임하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오늘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낮아짐과 비움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구원의 소식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들려지지만 구원의 기쁨은 누구나 얻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있는 그곳으로 천하다 천한 모습으로 오신 그 마굿간 구유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만 이 기쁨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 중에 세관장 자캐오의 얘기가 있습니다. 자캐오는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과거의 세상 평화를 추구하던 것을 회개하고 하늘의 빈마음의 평화를 추구한 사람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남을 속였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이전의 자캐오는 남 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자기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았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그 보다 더욱 중요한 삶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라고 하는 내면의 가치였습니다. 가진 것으로 평가하는 세상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죄인 된 자기를 인정하고 낮아져서 자신을 비움으로 풍성해지는 하늘의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탄절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 자기 자랑을 하며 떠들썩하게 노는 세상 축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기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성탄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베들레헴 성안에 거하면서 자기 욕심을 채움으로 세상 평화를 추구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저 빈들에 나가 저 목자들과 같이 어둠 속에서 밝아오는 영원을 기다리며 마음을 비우는 하늘의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될 것인가?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의 마음은 점점 풍성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마음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쓸 것도 더욱 풍성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우리 손을 움켜지고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무언가를 주시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손을 펼 때,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 무언가를 우리 손에 쥐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의 교우 여러분,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눔으로 저 어두운 거리, 저 캄캄한 거리에 빛을 가져다주고, 저 쓸쓸한 거리, 차가운 거리에 따뜻함을 전하는 이웃의 향기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함으로 2천년 전 들려졌던 저 천사들의 합창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다시금 울려 퍼질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