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 속에 강함
신명 32,48-52; 2고린 12,7-10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기다리며 우리는 이 한해를 어떻게 마무리 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성서의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두 사람, 모세와 바울로의 신앙을 함께 살펴봄으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압박받던 히브리 노예들을 하나의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의 처음5권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를 모세5경이라 불러 우리는 신앙적으로 이 성경을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적인 계시를 받아 성서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만, 모세만큼, 자주 그리고 생생하게 하나님을 직접 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마치 하느님께서 친구와 같이 얘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원래 나이 40까지는 이집트의 궁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나이 40이 되어 노예로 살고 있던 동족 히브리인들을 위해 뭔가를 해보고자 했을 때,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그후 40년을 살인을 저지른 대가로 추방을 받아 광야에서 양떼를 치며 살아갑니다.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됩니다. 이후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40년간을 광야에서 이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진군을 계속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나이 120세가 되여 이러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목전에 두고 모세가 유언과 같이 한 얘기입니다. 자신이 왜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면 가서 살고 싶어 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40년간을 메마른 광야 길을 걸으며 기다려오고, 수고하여온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거기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평백성도 아니고, 이일을 위해 평생의 삶을 다 바쳐온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당연히 들어가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므리바 물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행군 중에 카데스 바네아란 곳에 이르렀을 때, 먹을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우리가 차라리 진작에 죽었더면 좋을 것을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목이 말라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이 때, 모세는 하느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리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백성 앞에 나아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이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나아가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가 이일을 거룩되이 하지 아니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불평하고 자기를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이 반역자들아, 들어라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하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꽝 꽝 내리치게 됩니다. 이 분노하는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를 듣게 됩니다. 말로 명하면 될 것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내리치는 이 일로 말미암아 모세는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낀 지도자로서의 갈등을 봅니다. 여기서 저는 ‘목사도 사람이다.’ 라는 항변 속에서 모세의 편을 들어주고 싶고,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래도 목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참고 견뎌야 한다.’ 는 명제를 요구할 것입니다. 하여간 우리는 갈등하는 모세를 보게 되고 하느님께 항변하는 모세를 보게 됩니다. 신명기 3장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아마도, 그의 평생의 기도 중에서 이때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도 없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조상 대대로 약속 되여 온 그 약속의 땅을 밟아보고 싶은 모세의 이 간절한 심정을 우리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세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답변하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일로 다시는 내게 간청하지 말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이 모세의 평생에 단 하나 남은 소원, 그 소원에 하느님은 ‘너는 충분히 받았으니, 이제 그만 기도하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용서의 하나님께서 모세가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인하여 한번 화를 냈던 일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위대한 종, 자신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살아왔던 모세에게 그 가나안 땅 들어가게 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후에 이보다 훨씬 좋은 하늘나라를 들어가게 하셨는데 모세가 그 가나안 땅 한번 밟아보게 하는 일이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였겠습니까? 일반 백성 너도나도 다 들어간 땅인데, 왜 모세로 하여금, 바로 그 목전에서 너는 안 된다고,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평생의 남은 한 가지 소원을 거절하시면서, ‘그만하면 족하다.’ 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로가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이 그의 선교적 활동과 저술을 통해 오늘의 기독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책들은 그가 직접 기록한 서신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의 병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안질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간질병이라고도 합니다. 만약에 때도 시도 없이 나타나는 간질병을 앓았다면 그의 기도가 얼마나 절실하였을까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만약에 간질병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쓰러져 입에는 거품을 품고 팔다리를 하늘을 향해 몸부림쳐야 했다면, 그가 가진 심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었을까?

죽은 자도 살려내는 능력의 사도가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 때의 받아야 했던 그 조롱과 수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걸림돌이 되므로, 하느님께 이 육체의 가시를 없이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이는 숫자 세 번이 아니라, 아주 간절히 금식하며 목숨을 걸고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때마다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사도바울로는 자기를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이 사도바울로의 고백이야말로 신앙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가 남보다 뛰어난 자랑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마지막 소원에 대해, “그만하면 족하다.” 란 거절을 들은 모세. 병 낫기를 간구한 기도에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는 거절은 들은 바울로.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그 안에 더 큰 하느님의 은총이 담겨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의 인생 승리는 그들이 이룬 어떤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간절한 기도에 ‘안된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라는 하느님의 거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넉넉한 포기, 헤아림. 여기에 그들의 인생 승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소원대로 가나안 땅을 한번 들어 가보고 죽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는 그것이 성공이 아니라, 그 제한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깨닫는 그것, 거절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 그것,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그것. 그것이 바로 성공한 마음인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만사가 자기의 뜻과는 정반대로 되어갈 때 오히려 진심으로 기뻐해야 하며,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어갈 때 오히려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이 말은 바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의 눈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서 보아 결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만족할 때, 그 때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멀리하시는 실패의 때이고, 우리가 낙심 속에, 절망 속에 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성공의 때라고 하는 깨달음. 말은 쉽지만, 삶에 있어서, 행실에 있어서는 결코 쉽지 아니한 깨달음입니다.

골던 멕도날드 목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않다. 때론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에는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감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계를 한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게 하는 통로, 곧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내게 하는 은총의 통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적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기적을 낳게 하는 씨앗이고, 이 씨앗은 감사로 덧입혀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내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것 좀 없었으면 좋겠다는 인생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일 수도 있고, 함께 살아가는 남편이나 아내일수도 있고, 자식이나 부모님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파산당한 생업이나 무너진 건강일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는 이 가시, 이 가시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대신에 하느님을 놓으면, 어느 날부터 이는 나를 찌르는 가시가 아닌, 나의 존재됨을 인식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을 뭐 그리 크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떤 절대자 앞에선 자기 존재성의 확인.


향린이 말하는 자유함 혹은 자유하는 인간이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 얻어지는 존재의 넉넉함이라고 믿습니다. 남을 간섭하지도 남에게 간섭받지도 않는 자기 공간성 안에서 마음대로 하는 감춰진 이기의 자유함이 아닌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상대방의 장점으로 채워 나가고자 하는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의 자유함. 저는 이것이 향린의 말하는 자유함의 이해라고 믿습니다.

모세나 바울로 “그만하면 족하다.” 는 자족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성서는 그가 힘이 다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몇 년을 충분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무덤까지도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바울로는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고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자족한다는 이 말은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손을 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기 한 개인을 넘어서서 영원히 펼쳐지는 하느님의 큰 역사를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한 시냇물의 줄기가 막힌다고 대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어떠한 순간에도 결코 절망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나는 자족하고 있다는 고백에 이어 유명한 말, ‘나에게 능력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병 하나 낫게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무슨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섭리에 놓여 있음을 알고 최선을 다할 따름이지,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나가는 길에 허리가 고부라진 노인 한사람이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약간은 조롱조로 ‘여보시오, 노인 양반, 내 보기에는 당신은 이제 불과 몇 개월 밖에 살 것 같지 않은데, 포도나무를 심어 무엇하려고 그럽니까?” 그 때 이 노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제가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았습니다. 제가 먹지 못한다면, 제 후손 그 누군가가 먹게 되겠지요.”

자족한다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유명한 감독이 매사에 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묻는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 개의 눈이 있습니다. 한눈으로는 항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갈 것을 준비합니다. 다음의 한 눈으로는 땅을 바라보면서 내가 죽어서 묻힐 장소가 매우 작은 곳임을 생각합니다. 세 번째 눈으로는 항상 이웃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12월 마지막 주일, 2003년 1년을 결산하여야 할 때입니다. 지나간 한 해의 삶이 어떠했든지, 지금 이 순간 만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서십시다. 시작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결산하는 마음 더욱이 중요합니다. 다가오는 2004년이 진정 새해가 되려면, 이 해를 잘 결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결산을 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살면서, “시간이 없어서” 라는 변명을 자주 하였습니다. “교회 빠지지 말고 나오셔야죠. - 글쎄요 시간이 없어서. 모임에 꼭 좀 나오세요. - 글쎄요, 시간이 없어서.” 이 사람이 죽어 하늘나라 갔습니다. 천당 지옥으로 가는 갈림길에 사도 요한이 생명책을 들고 있습니다. 당신 이름이 뭐요. 여기 이름이 있어야 천당으로 갑니다. 아무개요.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 이름이 없습니다. “아니? 왜 내 이름이 여기 없습니까?” 요한사도가 답하기를, “기록할 시간이 없어서.”라고.

우리는 올 한해 365일 총 8,760 시간 중 얼마만한 시간이 하느님의 뜻대로 씌여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 철학자 아브라함 헤첼은 말하기를, 데카르트의 유명한 철학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하는 말을 신앙적으로 바꾸어, “나는 명을 받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목숨을 한자로 표기하면, 생명이라고 합니다. 살 생, 명할 명. 명을 받아 살아가는 삶이 참 생명입니다. 하늘의 명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삶은 생명의 삶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한해를 마무리 지으며,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모세와 사도 바울로는 “이미 너는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멀리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로 나아갔습니다. 바울로는 로마에 붙잡혀가서도 계속 덤덤히 자신의 복음 전파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느님의 명대로 살아가는 것 이상의 더 위대한 삶이 없다고 하는 은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나의 뒤를 이어가는 다른 인물일 수도 있지만, 오늘의 내 삶을 제대로 정리만 할 수 있다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여기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아 나이 많은 모세는 갔고, 나이 젊은 여호수아가 등장을 했으니, 우리 세대는 가는구나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겠다. 이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 안에서 새로운 비전과 꿈을 갖는 젊음의 여호수아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아쉬움을 남겨두고 우리는 이 한해를 보냅니다. 가정적으로도 아쉽고 교회적으로도 보다 많은 일들을 행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고, 남한 사회의 계층간의 갈등은 더 심화되고 사회의 지도자를 향한 백성들의 불신의 벽은 더 높아졌습니다.

민족으로도 분단의 벽은 별다른 대화의 돌파구도 생기지 않는 채 또 다시 한해가 지나갑니다. 오히려 남북의 대화는 더 닫혀졌던 한해이고 명분 없는 이락크 파병을 결정한 부끄러운 한해였습니다. 이 이면에는 자신의 문제와 민족 문제를 따로 떼어 놓고 보려는 개인주의와 인생의 성공 자체를 물질로 환산하려는 한탕주의, 쾌락과 향락이 확산되는 우리 안의 문제도 있고, 더 크게는 역사상 유례없는 슈퍼파워인 미국이 강자가 보여주어야 할 부드러움을 잊고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오만함이라는 우리 밖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고 아는 대로 어둠이 짙어갈수록 새벽은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던 그날 저녁, 부활의 아침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 2004년도에도 우리 앞에는 많은 문제와 난관들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 일치와 생명이라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열정과 뜻을 넘어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공동체 가족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계속 지펴 민족과 사회와 이웃을 향해 함께 나아가십시다. 혼자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약한 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팔짱을 끼고 서로의 어깨를 맞잡을 때, 우리의 약함 속에, 그 어깨 어깨 사이 속에 하느님의 강함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