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 17일                                 


                       느헤미야의 비전(1)  :   거룩한 열망을 품자

                    (느 1:1-4, 고전 2,6-12)


[함께 가자 이 길을]  

        

        6월 15일에 취임하여 지난주까지 저는 ‘함께 가자 이 길을’이라는 큰 제목 하에 여러 가지의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용서의 길’ ‘다양성과 일치의 길’ ‘공동체의 길’ ‘섬김의 길’ ‘나눔의 길’ ‘평화통일의 길’이라는 아홉 개의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수련회와 평화통일주일에서의 7분의 평신도 설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지난 주 이혜진목사의 고별 설교를 더하면 모두 열개의 길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혜진목사의 설교 제목이 ‘처음 자리에 서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이제 ‘함께 가는 길’이라는 처음 자리로 돌아와서 저는 느헤미야서를 중심으로 그가 가진 꿈과 비전 그리고 그의 기도와 결단과 행동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우리의 향린의 비전 실현을 위해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왜 느헤미야서인가? 거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꿈과 비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모두 꿈과 비전의 사람이긴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비전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느헤미야서에는 이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단계를 따라 기록 되여 있습니다. 세 번째 느헤미야는 외국에서 살다온 이민자로서 고국에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제 개인적인 삶을 투영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비전과 꿈]


        잠언 29장 18절 말씀에 ‘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진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한글 다른 번역에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라고 되어 있고, 영어 번역도 킹제임스 번역본에는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라고 되어 있고, NIV 성경에는 revelation 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일반 사회에서는 영어단어를 그대로 도용해서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비전에 상응하는 꿈이라는 우리말이 있지만, 꿈이라는 단어는 개꿈 용꿈 등 일확천금을 노리는 세속적인 뜻이 강해 비전이라는 단어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혹 순수 우리말에 이를 대체할만한 단어가 있을까 해서 국문학자이신 김태준집사님과 통화를 했지만, 이상, 전망이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순수 우리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비전이 무엇입니까? 비전은 내일을 향한 꿈입니다. 그러면 왜 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비전은 미래를 향한 꿈이긴 하지만, 이 꿈은 하느님의 꿈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하느님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에 대한 그림입니다. 잠언 19장 21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계획을 세워도 성사는 야훼의 뜻에 달렸다.’ 곧, 비전은 사람의 계획이 아닌 야훼 하느님의 뜻에 일치한 계획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꿈은 인간의 계획에서 출발하여 하늘의 뜻을 찾는 것이라면 비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에서 출발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꿈이 있습니까? 라는 말과 당신은 비전이 있습니까? 라는 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비전은 인생의 지도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사거리가 있고, 어디로 가면 길이 막히고 어디로 가면 현재 공사 중이라는 지도는 운전자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를 갈 때에 지도를 보고 방향감각을 갖고 가는 것과 그냥 말로만 약도를 듣고 가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도를 보고 방향감각을 갖고 갈 때는 돌발상황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고 갈 때는 돌발상황에 대처하기가 힘듭니다. 저는 비전 있는 사람은 지도를 보고 가는 사람이고, 꿈이 있는 사람은 그냥 말만 듣고 가는 사람에 비유해 봅니다.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정몽헌회장의 갑작스런 자살에 대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사업적인 수완이나 결단력도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며 계획한 그 일에 비전이 있었더라면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적과 꿈,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은 있었지만, 거기에 비전, 곧 하느님의 계획은 없었습니다. 비전은 단순히 목적지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마치 여행과 같이 그 가는 과정 전체가 비전입니다.


        고린토전서 2장 말씀은 이 비전을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라고 설명하고 있고, 이 심오한 지혜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저는 오늘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이러한 여러분 개개인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몇 주간에 걸쳐서 느헤미야의 비전을 함께 보고 나아갈 때에 여러분의 비전이 보다 확실해지기를 원합니다. 장로님들과 지도력훈련을 함께 나누면서 가장 자주 말하는 단어가 비전입니다. 참 지도력 그것은 곧 비전이 있는 사람이며 이 비전은 예수님의 섬김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2주전 장로 리더쉽 훈련을 하면서 이러한 하느님의 비전을 함께 나누고 섬김의 훈련을 위해 우리는 전 교인 가정을 분담하기로 하였습니다. 대강 한사람에 40가정씩을 맡았습니다. 직접 심방도 하시겠지만, 주로 전화를 통해 여러분 가정의 소식을 듣고 기도의 제목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비전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지난 주 우리는 당회와 목회위원회의 연석회의를 통해 교회갱신실천위원회 구성과 장로선출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안을 열띤 논의를 통해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향린교회의 비전을 세워나가는 하나의 구체적인 작업인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참관을 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권사님들로부터 20대 청년에 이르기까지 향린을 향한 열정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거룩한 열정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요 인물로 얘기하는 느헤미야에게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의 비전]


        느헤미야 1절로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갈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수기. 아르닥사싸 황제 제 이십년 기슬에루월에 나는 요새 도시 수사에 있었다. 그때 나의 한 동생 하나니가 유다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나는 그들에게 포로 생활을 하다가 살아남아 돌아간 유다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떤지를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포로민 가운데서 살아 남은 이들은 그곳에 몹시 고생하며 수모를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채요, 성문들은 불에 탄 채로 그냥 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주저 앉아 슬피 울며 하늘을 내신 하느님께 여러 날 단식하며 기도를 올렸다.’ 우리가 아는대로 유대백성들은 기원전 586년 경에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그 나라가 멸망을 당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후 바벨론은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포로로 붙잡아 왔습니다. 유다인들은 약 70년의 세월을 포로백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신흥제국인 페르샤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민들은 에즈라 제사장의 인도 하에 고향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성전을 다시 세우게 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추측컨대, 할아버지때에 포로로 붙잡혀온 바벨론 포로 3세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성장하여 페르샤 왕국의 아주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1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 때, 나는 황제에게 잔을 받들어 올리는 일을 맡고 있었다.’ 술 관원이라는 직책이지만, 이는 단순히 술을 따라 주는 직책이 아닌, 술친구로 황제와 더불어 모든 분야에 얘기를 나누는 비서실장직에 해당되는 고위직입니다.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요, 또 황제에게 조언을 할 수 있을만큼 지혜와 지식에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유대사람으로는 최고의 직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포로 유대백성으로 느헤미야는 성공할만큼 성공한 사람입니다. 돈, 명예, 권세 이 세 가지를 모두 소유했습니다. 더 이상의 바램이 없을만큼 만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요? 그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열망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안락함과 편함에 안주하지 않고 그가 생전 가보지 못한 땅 조국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느 날 그는 유대 고향땅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고국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자기 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느헤미야는 보다 정확한 고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기 동생을 포함한 몇 사람을 의도적으로 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지위 영달에 머물지 않고, 그가 이룩한 지위를 통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인 실천 단계에 옮기기 전에 먼저 그 상황을 파악한 것입니다. 고향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성벽은 무너져 있고 성문은 불에 탄 채 검게 그을려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이때 4절 말씀을 보면 그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슬피 울며 금식하며 기도를 올렸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땅에 주저앉아 슬피 울었다는 이 구절에 마음이 갑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고국의 소식을 목이 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너무나 당혹한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 털석 주저 앉아 통곡을 합니다. 마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어머니처럼 목을 놓아 우는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수만리 떨어진 조국,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들었던 희미한 조국에 대한 애달픈 기억이 느헤미야로 하여금 통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조국을 떠나 오랫동안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3세들이 한국말을 2세대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3세대로 조국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우선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커피 광고 문안인지 영화제목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가슴이 뜨거운 남자가 좋다.’라는 문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데 저도 가슴이 뜨거운 교인이 좋습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머리가 알아내기 전에 늘 먼저 보는 것은 가슴이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명석한 두뇌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명석한 두뇌가 있었던 사람은 가룟 유다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헌금궤를 맡았습니다. 반대로 베드로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무작정 예수님 재판 현장까지 좇아갔었고, 얼떨결에 모른다고 부인을 했지만, 닭울음소리에 통곡의 울음을 울었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주님이시다.라는 말에 겉옷도 벗지 않은 채 그냥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주님께로 간 사람입니다. 가슴이 뜨거운 교인. 마태복음 5장 6절의 말씀과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민족을 향한 뜨거운 열망]


        미국 시카고에서 일종의 민중교회를 하고 있는 신학자요 목회자인 토니 캄폴로는 말하기를 ‘미국 나라 전체를 볼 때, 우리는 물질주의라는 매우 잘못된 위험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사실은 가슴이 죽어있다는 사실이다. 흥겨운 노래가락은 들리지 않고 춤도 사라졌다. 도대체 열정이 없다. 심지어는 죄를 지어도 열정 없이 죄를 짓는다. 미국 곳곳에 죽음의 시체가 널려 있다. 고등학교를 가보라 학생들에게 열정이 있는가? 대학을 가보라 거기에 학문 사랑에 대한 뜨거움이 있는가? 더욱이 최악의 장소는 교회이다. 뜨거운 열망이 없다. 가슴 뜨거운 교인들이 없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가슴이 차가워져 있다면 도대체 세상 어디에 희망이 존재한다 말인가?’ 믿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저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민족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거룩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뜨겁다는 말은 열광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치고 날 뛰는 엑스타시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 밖으로 튀쳐 나가는 밖으로의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기 깊음 속으로 들어가 침묵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말합니다. 우리가 연애할 때에 얼마나 흥분합니까? 내일 만난다. 그러면 오늘밤부터 잠이 안옵니다. 왜요?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석에 한 선수가 배트를 들고 섰습니다.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따라 들어왔습니다. 저걸 놓치면 안되는데, 관객도 감독도 선수가 그 공을 치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공은 포수의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원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도 아웃코너로 빠지는 듯 하더니 스크라이크존으로 들어옵니다. 아주 치기 좋은 공입니다. 투수는 아차했고, 감독은 관중의 환호성과 함께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트를 휘두르지 않습니다. 감독이 외쳤습니다. ‘이봐 자네 도대체 뭘 기다리는거야? 뭘 기다리는거냐고?’ 타석에 선 선수는 나지막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뭘 기다리느냐고? 내가 기다리는건 25일이야.’ 25일은 그의 월급날이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살이입니다. 세상이 시들해 보이는 것은 세상이 시들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시들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시들해 보이는 것은 교회가 시들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시들해졌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시들해져보이는 것은 그 사랑이 시들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의 감격이 시들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감격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비전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비전에 근거한 거룩한 열정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남녀가 결혼을 할 때, ‘저 사람을 이용해서 내가 편안해져야지.’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의 있는 전부를 갖고 저 사람을 기쁘게 해주어야지.’ 그런데 살면서 이 마음이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 믿으면서 ‘아 예수님을 이용해서 축복을 받아야지.’ 그러면서 믿음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 내가 살아온 것이 모두 하느님의 은혜였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죄로부터 해방을 시키셨구나.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의 생명의 은인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지.’ 이렇게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왜 예수님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누구는 이렇구 나는 이렇습니까? 비교의식이 생겨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절망 속에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실망 속에서 좌절 가운데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3번 물으셨는데, 그 질문은 같았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거룩한 열정 그것은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내가 하루를 굶으면 배가 고프듯이, 만약 내가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고통이 찾아오는가? 음식에 주리고 물에 목마르듯이 과연 나는 의에 주리고 평화에 목마른 사람인가? 느헤미야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태어나 살았던 조국의 성곽이 무너진 채 있다는 소식에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금식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5절 이하에 “야훼 하늘을 내신 하느님이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한결같은 사랑으로 약속을 지켜주시는 높고 두려우신 하느님께 빕니다. 눈을 열어 굽어 살피시고 소인이 올리는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종입니다. 이 몸은 이 백성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빕니다. 우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와 저의 가문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고백합니다.” 마치 이 기도는 오늘의 제 심정을 대변해주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2주전 할아버님 부일에 대한 죄책고백을 한 이후 언론에 기사화가 되어 요즈음 향린게시판에 불이 나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7백건의 조회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30년전 소식이 끊어진 후배가 전화를 했습니다. 예전의 그 형님 하고 동일인물입니까? 청빙의 막바지인 지난 12월 중순 저는 처음 할아버지 이름이 언급된 친일에 대한 구체적인 문건을 이메일로 보았습니다. 답변을 쓸 때 당시 교회 창문 밖은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눈을 ‘하늘의 상채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좀 나이에 겉맞지 않게 센티해지는게 흠입니다만, 설교문을 쓰는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습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담임목사로 온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친일목사의 손자, 미국에서 인생의 반을 산 차라리 친미주의자라고 불러야 할 목사. 도대체 제가 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민족적인 향린교회의 목사로 와야 했는지 여러분도 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첫 설교에서 저와 여러분의 만남은 마치 베드로와 고르넬리오와의 만남과도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이 만남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피지배계층이었던 베드로나 출세를 꿈꾸는 지배계층 로마 백부장인 고르넬리오가 서로 만난다. 이건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보는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의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를 따르던 무리 가운데 수제자, 지난 수십 년 로마정부에 계속 반기를 들어온 불온의 온상 갈릴리 출신 어부 베드로.  베드로가 본 고르넬리오는 또 어떻습니까? 자기 민족을 지배하고 스승 예수를 죽인 적대세력의 상징 로마의 백부장. 출세길에 들어선 고르넬리오나 새롭게 유대 종교계의 지도자로 떠 오른 베드로에 있어서나 이 만남은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각기 달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를 통해 만났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중동에서 서방으로 전파되는 선교 역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에 가장 중추적인 인물로 사도 바울로를 얘기하지만, 실상 당시 바울로의 문을 열어준 사람은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고국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던 느헤미야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붙잡혀온 할아버지의 후손.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고 당시 중동을 지배하던 거대한 왕국 페르샤 황제의 측근 중의 측근이 된 느헤미야.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그는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을 만났을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 친구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안달과 출세를 위해 지배계층에 자신과 조국을 팔아넘긴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 속에는 그가 가진 조국에 대한 거룩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거룩한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백성과 가문의 죄를 고백한 느헤미야의 기도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7절 이하에 ‘우리는 하느님께 정녕 못할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종 모세에게 내리신 계명과 법규와 법령들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종 모세에게 내리신 약속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너희가 배신하면 만방에 흩어버리겠지만 나에게 돌아와서 내가 준 계명을 지켜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너희 흩어진 자들이 땅 끝까지 끌려갔더라도 내가 거기에서 모아 내 이름을 붙이려고 고른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크게 힘을 떨치시어 구해주신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주여, 빕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하느님을 기꺼이 공경하는 종들이 올리는 기도에 귀 기울려 주십시오. 이제 이 몸이 주님의 총애를 입어 그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적대시 살아온 남과 북이 하나만 될 수 있다면 그래서 흑백논리와 지역 인연 학연의 편 가르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제가 친일가문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또 설사 저로 인해 향린교회가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뭐가 두렵겠습니까? 제게 느헤미야와 같이 민족과 향린 공동체를 향한 거룩한 열망이 살아 있는 한 저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 또 여러분은 저를 위해 서로 기도합시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식지 않도록...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