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7일                                 


                         느헤미야의 비전(2)  : 구체적인 계획을 품으라

                       (느 2,1-9, 루가 14,28-33)


        지난 주 설교를 대강 간추려본다면, 바벨론 포로 이민 3세대인 느헤미야는 당시 새로운 제국 페르샤에서 황제의 술관원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를 만큼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감안한다면 이는 대단한 출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러한 세상 출세에 만족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고향 땅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동생을 보내 그곳의 소식을 알아 오게 합니다. 몇 달만에 돌아온 그의 동생이 들려준 소식은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성벽은 무너져 있고, 성문은 불에 탄 채로 그냥 남아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마음은 무너지듯이 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금식을 하면서 하느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1장의 요지입니다.


        그리곤, 오늘 본문 2장이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로 마친 1장과 황제께 술을 따르는 2장과의 사이에는 성경 이야기로는 아무런 간격이 없이 그냥 이어지지만, 사실 이 두장 사이에는 4개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1장 1절의 기슬레우월은 12월을 의미하고 2장의 니산월은 4월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4개월동안 느헤미야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조국의 불행한 소식에 마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마냥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던 느헤미야는 그렇다면 4개월동안 기도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성경의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4개월 동안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빕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하느님을 기꺼이 공경하는 자들이 올리는 기도에 귀 기울려 주십시오. 이제 이 몸이 주님의 총애를 입어 그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1장 마지막에 나타난 그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기도에는 느헤미야가 어떤 사람인가?인 것을 알려주는 두가지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품은 조국 부흥의 거룩한 열망을 자신 혼자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느님을 기꺼이 공경하는 자들의 기도에 귀 기울려 달라.’고 하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꿈과 비전의 또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꿈은 개인의 성취라면 비전은 공동체의 성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출발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더불어 일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현재 내 눈에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와 더불어 한다는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하는 일은 이미 전부터 누군가가 해오던 일을 계속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에 진정 그 일은 하느님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이루어도 내가 혼자 했다.고 하는 자만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혹, 일이 그르치더라도 누군가가 이 일을 해낼 것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 사도바울이 외친 고백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뿌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이 모든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명동 성당에서는 1987년 박종철군 고문은폐조작사건을 폭로하여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을 당기시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소리를 대신했던 가톨릭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고문이시기도 하셨던 김승훈신부님의 장례미사와 민주사회장이 있었습니다. 많은 교우들과 민주인사들이 간암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먼저 가신 신부님을 아쉬움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전 두시간 가까이 그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김승훈 신부님이 줄기차게 걸어온 민중연대의 삶이 오늘 이 시대 속에서는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여한 많은 분들도 같은 생각을 품었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투쟁의 방법과 대상은 계속 변화해 가지만, 그 시대 속에서 고통 받는 자와 소외된 자를 향한 갈릴리의 작은 예수꾼들의 삶은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하는 확신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에서 나타난 두 번째의 중요한 점은 ‘주님의 총애를 입어 그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구절입니다. 지금 느헤미야의 당장의 소원은 어떻게 하든지 조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황제 앞에 나아가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무려 4개월 동안을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이 급한데, 기도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 기도에 무슨 실제적인 효력이 있느냐? 현실을 중시하는 젊은 시절 저부터도 기도의 효용에 대해 많은 의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의 본질 자체가 그러합니다만, 눈에 보이는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해서 이루어졌다.는 고백은 그 당사자만이 아는 확신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이라고 하는게 그렇게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또 내 뜻대로 되어진다고 해서 항상 나에게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기도의 효력과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황제의 총애를 구하는 일보다 먼저 하느님의 총애를 구하는 일이 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먼저 사람을 떠올립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를 찾아가서 부탁하면 될까?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무려 4개월을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기다림의 기도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무작정 아무 생각없이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전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가는 기다림의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에 옆에 메모지를 놓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다보면 해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때 그냥 기도를 계속하려고 하면, 제 마음 속에 이 일은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꼭 해야 하는데, 그런 염려가 생기면서 기도가 더 이상 진전이 안됩니다. 그럴 때는 메모지에 기록을 합니다. 그러면, 일단 그 일은 잊고 계속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하다보면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일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나갑니다. 그때마다 저는 메모를 합니다. 어떤 경우는 한참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 메모지에 적어놨던 일들이 나도 모르게 일어났던 경우를 보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뜻’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은 이런 것이다!라고 확신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정의를 내려본다면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을 통해 올바른 동기에서 올바른 시기에 행하는 것.’ 여기서 저는 느헤미야의 기도에 비추어서 시기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일도 바르고 방법도 바르고 동기도 바르지만, 시기를 잘못 택할 경우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품고 일을 시작하지만, 서두름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납니다. 그래서 시기상조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때를 잘 읽는 것을 말합니다. 전도서는 이 때에 대한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숙명론자와 같은 태도 같기도 하지만, 때를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것은 때를 기다린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우리 국민들은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지만, 때를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멀리 내다보는 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자기 때에 끝장을 보려고 하지, 후대를 위해 자신이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외국에서는 아주 보잘것 없는 조그마한 가게라도 대를 이어 하는 집안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철물가게나 세탁소, 심지어는 구두수선 같은 일도 대를 이어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장인정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일합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젊은 시절 뉴욕에서 조그마한 구두수선가게를 했습니다. 손님 중에 유대인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부자들은 아주 비싼 구두에 밑창만을 갈아가면서 평생을 신는데, 밑창 가는 값이 보통 좋은 신발값하고 맞먹습니다. 하여간 해변가에 엄청 비싼 집을 갖고 있는 소문난 갑부가 하루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을 데리고 와서는 이번 여름방학 한달동안 자기 아들을 구두수선 견습공으로 써달라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사회훈련을 시키는 것인데, 자기 회사도 아닌, 영어도 미숙한 동양인이 혼자 일하는 자그마한 구둣가게에 아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돈 1불 버는게 얼마나 힘든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국 부자들의 경우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이런 애기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듣던 우리들은 모두 이 유대인들의 인생을 멀리 내다보는 혜안과 기다림에 놀랐습니다. 저도 물론, 제 자식들에게 이런 교육을 시켜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요즈음 남한 사회에 교육제도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져가고 있어, 조기유학이나 혹은 특수사립학교와 같은 대안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 외에 이런 실제 사회교육들도 대안교육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학교성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제도도 문제이지만, 이런 장단에 함께 춤추는 부모님도 문제인 것입니다. 좀 멀리 내다보는 혜안. 만약 내 아들 IQ가 낮아 아무래도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인격이나 품성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나가 손주 때나 아니면 그 후대에라도 인물이 나올 수 있도록 기대를 멀리 뻗치는 기다림이 필요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일류 아이비대학 들어가는 율이 소수민족 가운데 한국민족이 가장 높습니다. 동시에 중퇴하는 율도 가장 높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기 유학의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고통을 참아가며 4개월을 기다렸습니다. 막연하게 기다린 것이 아니라 성벽 재건이라는 비전을 머리 속으로 그려가며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걸림돌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대한 꿈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부족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란 하느님께서 나의 삶에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그 일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what when how를 말합니다. 가정에 대한 비전도 무엇을 언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하고, 교회도 무엇을 언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생각이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우리 향린교회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일반적인 교회의 목적이 있고, 향린교회만이 갖고 있는 특수목적이 있습니다. 일반목적은 복음전파라는 선교활동입니다. 이 목적은 너무 광범위합니다. 보다 구체적인 그 범위를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향린교회의 위상은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이 사회를 깨우며 앞서가는 변혁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흔히 향린교회는 사회참여를 하는 진보교회의 선두주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계속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홍목사님과는 품성이나 지도력의 스타일이 다른 사람입니다. 아마도 저는 홍목사님에 비해 직접 운동현장에 나가 뛰는 일은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족한 부분을 여러분이 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할 것입니다. 저는 평신도교회라고 하는 단어 속에는 교단에 가입했느냐? 목회자가 있느냐?하는 법적인 관점보다는 향린교회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회참여가 목사와 교인 몇 사람의 몫이 아니라, 전 교인들의 몫이 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회를 향한 변혁의 소리를 내면서도 동시에 우리 교회 스스로의 자기 변혁입니다. 이미 10년 전에 우리 교회는 몇 가지의 중요한 제안을 하여 실천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하였던 이 부분을 보다 심도 있게 추진하기 위하여 교회갱신실천위원회를 새롭게 만들어 앞서가는 교회로서의 위상을 계속 세워나갈 것입니다. 그 가운데 현재 실시해 오고 있는 목사장로 임기제는 한국의 여러 교회들에게 귀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앞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실시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유럽을 다녀온 많은 목사님들이 유럽의 퇴색한 교회들을 비판하면서 한국교회의 뜨거운 신앙과 유래가 없는 교회 성장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생각있는 분들이 염려하였듯이 바로 그러한 서구의 탈교회 현상이 이미 우리 남한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3년 전부터 실질 교회 성장은 이미 정체를 넘어 퇴보에 이르고 있고, 이제 2, 30년이 지나지 않아 서구 교회와 같은 교회 박제화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년 전 많은 목사님들로부터 존경받는 한 노신학자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혹, 한국교회에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마치 20대의 비대한 몸에 5살짜리 머리가 달린 기형아와 같다. 지금부터라도 신학교가 목사 양산을 중지하고 기존 목사들의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분은 명망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의 학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지금 현 상태로는 전혀 비전이 없다는 것이 이분의 결론입니다. 보다 얘기를 좁혀서 제가 보는 목사님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은 진보와 보수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에게 해당됩니다만, 목사와 평신도간의 성직에 관한 철저한 구별입니다. 500년 전 루터와 칼빈이 그렇게도 회복하고자 하였던 평신도 성직 회복에 대한 개혁이 멈춰지고 오히려 중세시대의 가톨릭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개혁신학, 복음주의라고 외치지만, 사실, 초기 개혁신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인 평신도 사제권의 회복에 대한 구체적인 교회 개혁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복음은 사실, 가진 자나 없는 자나 권세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지식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하나님 앞에서, 구원에 있어서, 곧 세상과 이웃을 향한 사제권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하는 해방과 자유의 선포였습니다.


        물론, 평신도의 성직 회복을 얘기할 때, 복음서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로 전이되기까지에는 세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3년간의 훈련이 있었고, 성령강림의 체험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누구나 함부로 사제권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버러지 무서워 장 담그지 못한다는 말과 같이 약간의 폐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큰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있다면 평신도 성직 회복의 신앙입니다. 이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신앙을 교회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이부분에 있어서 향린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이겠는가?입니다. 선교비 30% 분가선교 이 부분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다른 보수교회들도 실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진보성을 화두로 삼고 있는 향린교회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이겠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진보라고 할 때에 무조건 변혁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향린교회가 갖고 있는 책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교회로서의 책임성을 안고 변혁을 말하고 그리고 다른 교회들도 따라올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변혁이 이루어져야지, ‘응 그건 향린교회니까 하는 거야. 그 교회 그냥 혼자 잘하라고 그래.’ 이런 식의 부정적 반응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의 문제까지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한 두발짝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는 얘기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이번에 장로선거제의 변화는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젊은이들에게 비판시되는 부분이 당회의 폐쇄성입니다. 장로님 스스로도 잘 알면서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2주전 당회와 목회위원회의 연석회의를 통해 몇 가지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원래 구상했던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술 밥에 배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해보고 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하면서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종전과 달라진 것은 하루 만에 이루어졌던 후보자를 선정하는 1차투표와 3분지 2이상의 득표를 요하는 2차 투표 사이에 2주간의 시간 여유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후보자에 대한 충분한 홍보와 기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몇 년을 다녔지만,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후보자는 얼굴만 알지, 그분의 믿음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정쩡한 가운데 그저 남이 하는대로, 그렇지 않으면 기권으로 권리포기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몇몇 교회들이 이미 실시하고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중요한 변화는 제도적으로 보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투표에는 적어도 30%의 여성과 그리고 30%의 40대 이하의 젊은 세대를 뽑자고 하는 권장사항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이런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후보자의 생년을 표기함으로 일단은 진일보하는 단계를 밟은 것입니다. 젊은 분을 세울 때에 장로라는 명칭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초대교회에서 맨 처음 장로직은 목사가 없는 상태에서 사도들이 복음전파자로 이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닐 때에 대신 교회의 일들을 관장할 수 있는 지혜롭고 덕망있는 한분을 뽑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분이 병들거나 부재중일 때를 고려해서 한두사람씩을 더해가다가 교회장로들이 더해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장로들이 사도가 없을 때에는 말씀선포도 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죽고나자 말씀 훈련을 받은 목사로 따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의 가르치는 일을 전담하는 교사목사와 나이 많으신 장로 한두분이 교회 치리를 담당하는 당회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개교회 일도 당회에서 하지 않고 여러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노회에서 일일이 의논하였습니다. 번거로운 점이 많아지면서 목사장로를 새롭게 세우는 일과 외부적인 일들을 제외하고는 교회 안에 당회를 두어 대신 치리하게 한 것입니다. 그 치리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회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당회라는 말은 없습니다. 장로와 목사들이 모인 노회 곧 Presbytery라는 말은 있습니다. 이 말도 어원적으로 늙은 사람들의 모임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노회는 젊은 목사들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성경의 노회라는 명칭은 더 이상 오늘의 현실에 맞는 말은 아닙니다. 또 장로의 한자말 장짜 긴장짜는 수염이 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상한 목사가 아니라 사실은 수염없는 목사들이 이상한 것입니다. 제 말씀의 요지는 장로라는 말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직분에 대한 명칭인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대의 변화를 리드할 수 있는 당회의 인적 구성과 개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민주적인 절차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민주제도의 가장 중심적인 대의제가 보다 확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 비율뿐만 아니라, 노년 장년 청년세대들을 고루 대변할 수 있는 계층 비율도 맞추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권위자체가 거부되고 있는 오늘의 탈현대주의 사회에서는 당회는 예전의 원로들의 모임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탈피하여 사람을 길러내고 키워내는 훈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장로 시무가 모든 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명예롭게 은퇴하는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 가능하다면 교회 봉사를 시작하는 첫단계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장로로 일을 해보면 비로소 전체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파악하게 됩니다. 모든 교인들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게 됩니다. 비로소 교회를 섬김 줄 알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현장에서 일을 해볼 때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교회 전체를 위해 어떻게 일하는 것이 좋다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한국 교회는 유교의 영향으로 장로직은 은퇴 직전에 하는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로를 함으로 교회의 어른이 되는데, 진정한 어른은 나이 어린 사람들이 잘 설수 있도록 그들에게로 내려가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때부터 현장을 떠납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로 숫자를 더 늘려야 한다고 보는 것도 제게 있어서는 원로원이라기보다는 훈련소의 개념이 더 강하기 때문이고, 현재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전교인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전교인을 장로님들에게 나누었는데, 한 장로님당 보통 35가정에서 40가정이 됩니다. 생업을 갖고 있는 장로님들이 이렇게 많은 분들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 많은 장로님들이 선출이 되어서 이 짐을 나눠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현재 저희 교회는 교인 20명당 한명이라는 노회 헌법을 따르면 18명까지 가능합니다. 일시에 다 뽑을 수도 없지만, 현재의 숫자는 저희 교회로서는 작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의견 조정을 위한 행정면에서 본다면 적을수록 좋습니다. 의견조정이 쉬워지니까요. 그러나 섬김과 훈련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일단 올해 5명을 뽑기로 당회가 결정하였지만, 실제 내년도에 두분이 안식년으로 물러서기에 실제는 5명이 다 뽑힌다 하더라도 3분만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보완된 제도로는 여전히 5명이 다 뽑히질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은 부족하게 보여도 사람을 세워주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표를 행사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이러다가 전교인들이 장로님들이 되는거 아닙니까?’ 저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게 제가 바라는 교회의 비전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장로직를 섬겨봄으로 진정 평신도가 주인 되는 평신도 교회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는 여러분들이 만약 이 향린교회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이 있다면 이 교회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회가 진정 예수님이 바라는 교회라는 진정한 자부심을 품고 있다면 여기서 배운 것들을 다른 교회로 가셔서 전파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향린교회가 말하는 선교사는 단지 멀리 외국으로 가는 복음전도자뿐만 아니라, 향린의 진보정신을 갖고 이웃의 더 작은 교회로 가는 것 또한 선교라고 믿습니다. 더 좋기로는 뜻이 맞는 분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분가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향린교회의 창립정신을 되살린다면, 7가정 12명이 한조가 되어 제3의 제4의 향린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2의 안병무선생님, 제 3의 홍창의장로님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분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 그리고 30대 초에 교회 창립을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라고 해서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 창립을 하시기 전에 대신 다른 한사람을 심어 놓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이러한 비전이 현실 불가능한 것입니까? 만약에 이 비전이 하느님에게서 출발한 것이라면 저는 이 비전은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24년을 산 이민자가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오는 것이 사람이 뜻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건 여러분의 뜻도 제 뜻도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한 비전을 바라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현장에 있지 않습니다. 수백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땅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땅입니다. 그에게는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그 자신은 이미 페르샤의 고위직의 관료로 차라리 유대땅에서는 민족의 반역자로 불리워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게다가 성벽 재건은 역사적으로 이웃 족속들로부터 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종교적인 일로 받아들여졌기에 가능한일이었지만, 성벽 재건은 다윗왕가의 정치적인 회복으로 받아들여져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냥 열정만으로는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만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계속 느헤미야서를 따라 살펴보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기 보다는 불가능한 요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그 수많은 장애물과 반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개월동안 침묵 속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가며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도 바로 이런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놓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가 이제 제2의 희년을 바라보면서 계속 사회현실참여와 자기 변혁의 진보성을 계속 추구해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날의 영광 속에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의 기초를 놓았으면 집짓기를 끝내기까지 우리의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계속 그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의 기초를 놓기 위해 왔지 그 영광을 누리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향린교회의 영광은 제 다음 후대에 누릴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저와 함께 이 후대에 오는 영광을 위해 계속 공부하고 훈련의 과정을 함께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제공하는 목요성경공부와 금요평신도지도력모임에도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목요공부는 낮시간이니까 주로 여자 교우들로 구성이 되리라 짐작합니다만, 적어도 기초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기본이 성경이고 성경의 기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집사이지만, 말씀은커녕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 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대강 어디쯤인지는 알아야지 골로새서 몇 장 그러는대도 구약에서 손이 왔다갔다하면 이건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꼭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문제는 여자분들보다 남자분들이 더 문제인데, 사회생활이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것은 압니다만, 다음 금요일 저녁부터 8주간만 있으니까 꼭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향린교우들은 기초를 뛰어넘다보니 믿음의 고차방정식은 잘 푸는데 1차방정식을 잘 못 푸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잠이 오지 않아 야간시찰을 나갔습니다. 한 병사가 초소에서 졸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즉결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였습니다. 그래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어떤 지휘관은 잠든 병정의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까이 가자 군인이 눈을 떴습니다. 젊은이는 그 앞에 누가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죽었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귀관은 보초를 서는 중 잠들면 어떤 형벌을 받는지 아는가?’ ‘예, 각하 알고 있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알렉산더입니다. 각하’ 다 죽어가는 소리로 답합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알렉산더입니다. 각하.’ ‘자네 이름이 뭐라고?’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이름을 잘못 알아 들어서 세 번씩이나 묻는 줄 알고 이 병사가 분명하게 답을 했습니다. 이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자네.’ ‘자네 이름을 바꾸던지 행실을 바꾸던지 해.’ 초대교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크리스챤이라는 그 이름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꾸여만 했습니다. 주님은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자네 어떤 교회를 나간다고?’ ‘향린교회입니다.’ 우리를 뚜렷이 쳐다보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제가 꼭 말해야 합니까? ‘교회를 바꾸던지 행실을 바꾸던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