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 예수의 꿈, 문익환의 꿈

에즈키엘 37장 15-23절 마태오 5장 9-12절


   올해는 하늘뜻펴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의 빛을 드러내고 간 여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이 되겠고 문익환목사님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다음 주 18일이 목사님의 15주기 기일이 되겠습니다만, 다음 주에는 여신도회 주일로 저희 교회 전도사로 계셨고 기장 전국여신도회 총무로도 계셨고 이후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다 기장 파송 헝가리 선교사로 여러 해 수고하시다가 지금은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박계자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게 되어 오늘 문익환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노0환씨라는 분으로부터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대로를 읽어드립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더럽다?]


거두절미하고 왜 교회라는 신성한 곳에서 세상의 집회를 허용하시는지?

홈피에는 정치적인 발언들이 많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정부 불신임투표를 할 수 있는지요?

성경에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건데 위해서 기도하라셨는데?

뉴스에 나오는 향린교회 맞나요? 아니라면 목사님께 사죄드립니다.

교회가 세상정치에 앞장서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워서 그럽니다. 북한 공산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지금도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하는 북한을 지원하고 남한의 노숙자는 지원되는지? 비중이 어느게 더 크느냐는 거지요


   제가 단식중이라 답변을 하지 않았다가 글을 보내신 분이 나이도 드신 것 같고 답글을 안 드리면 무시하는 것으로 여길 것 같아 어제 답글을 보냈습니다. 내용인즉 모르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낼 때는 먼저 자기소개는 간략히 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고 얘기하고, 저희 교회는 도심에 있는 관계로 주중에도 일반 직장인들의 성경공부나 찬양집회로부터 국악배우기 등 여러 NGO 단체들이 빌려 쓰고 있고, 때로는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기관들이 돈이 없어 일반 장소를 빌릴 수 없을 때는 교회는 기쁜 마음으로 건물을 빌려드리고 간혹 정치성 짙은 집회도 열리지만, 그것 또한 선교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더럽다는 흑백 신앙의 위험성을 말하고,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이 세상은 거룩한 곳이 아니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거룩하지 않는다는 그런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부탁하신대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힘써 노력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라는 것과 향린교회는 북한도 돕지만 노숙자도 함께 돕는 교회임을 알려드렸고, 교회를 비판하시려거든 언론에서 얘기하는 한 가지만 들어서 판단하시지 말고 직접 본인이 한번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나서 판단을 하시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이분의 글을 소개한 이유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현재 남한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더럽고 추하다는 것. 그리고 권세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세상 권세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 저도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상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일에는 동의합니다. 저도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실현되도록 기도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고루 행복해지도록. 부자는 가진 것을 함께 나눔으로 행복해지고 가난한 자는 열심히 일함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권세자들의 바른 정치를 통해서 모든 생명들이 존중받고 모든 사람들이 빈부의 귀천 없이 평등한 교육의 기회와 출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그런 평화로운 민주주의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교인들은 이분마냥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거룩해지기 위해 자꾸만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거기에 머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더러운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벽을 허물고 세상 안으로 가셨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꾸만 성전이 거룩하다고 성전 안으로만 갑니다. 그래 교회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가 떠나간 곳에서 서로 우두머리를 하려고 하다 보니 쓸데없는 분쟁만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현재 순복음 교단은 둘로 갈라져 전혀 해결의 기미가 없고 감리교단은 두 명의 감독회장이 생겨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교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은 삶에 허덕이고 이 사회의 정의평화생명의 기운은 세상 권력자들의 탄압으로 점점 약해져 가고 있는데, 생명을 품어내어야 할 교회들이 이러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신앙과 사회정의]


   지금 정부는 인터넷에 자기 생각을 폈던 미네르바를 구속하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진짜 미네르바는 따로 있다는 숨은 정보도 있습니다만, 정부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는 전혀 반성 없이 경제파탄의 책임을 31살의 무직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아니 정부가 바로 가도록 조언하고 비판한 일에 대해 칭찬을 하지 못할망정 법정구속이라니요? 그리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경제 시책을 비판하고 이를 미리 예단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국민의 생각을 차단하고 그 입을 완전히 닫아걸겠다는 군사독재 유신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미네르바의 글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명박대통령이 주가 3000이 되니까 주식을 사라고 한 악영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BBK가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것이라고 공공연히 거짓말 한 것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열 번도 넘는 위장전입을 해서 부동산 땅 투기한 범죄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유령회사 만들어서 대학생 아들딸 취직시켜 세금 떼먹고 건강보험 사기 친 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 재산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하고 한때는 월급도 다 내놓겠다고 했는데, 그건 다 지나가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었나요? 그럼 미네르바도 농담으로 했다고 하면 되지요. 이 정부의 하는 짓이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이러다간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 요즘 고등학생들 하는 말이 백수가 만수보다 낫다고 한답니다.


   사회가 이렇게 잘못되어가는 데도 교회는 잠잠하고 천국 갈 준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불법과 잘못을 저지르는데도 권력은 위로부터 온 것이니 그냥 성전에 앉아서 그를 위해 기도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까 그분은 교회가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의 속셈은 겉으로는 거룩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축복’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축복도 말은 하늘의 축복, 영혼의 축복 혹은 영생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실은 기도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세상물질축복입니다. 부자의 축복, 성공의 축복, 장수의 축복, 자녀성공의 축복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께 구하는 복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복이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은 부자가 되는 복입니다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사람입니다만, 예수께서 복이 있다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자였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권력의 자리에 올라 누군가를 호령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온유한 자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셨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질문했지요? 그럼 우리는 무얼 먹고 삽니까? 그래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확신을 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결코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을 무시하시지는 않으셨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따름이지요.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나중 할 것을 먼저 하면 그건 이방인들이 하는 일로서 예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먼저 할 일을 우선하면 나중 할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의]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이 땅의 인간 중의 누구 한사람이 통치자가 되어 다스리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만이 홀로 통치자가 되는 그런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부자와 가난한 자가 따로 살고 권세 있는 자와 권세 없는 자가 구별되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은 그런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그렇게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제가 처음 언급한 노0환씨는 교회에 머무는 일이 하느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일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먹고 살기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실 것입니다. 이런 세상 일들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이 아닌가요? 우리 인간이 어떻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물론 그런 순간은 잠시동안 있습니다. 지난 주 제2회 새해맞이 생명평화 영성단식훈련을 했는데, 약 20명이 참가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은 정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염려합니다. 세상 염려 당연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자야하는 세계 3분지 일에 해당하는 가난한 형제자매들은 내일을 무엇을 먹을 가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먹고 살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헤롯의 폭정과 로마의 세금착취로 백성들은 집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습니다. 5천명을 먹이시고 4천명을 먹이시는 이야기는 바로 당시의 가난한 사회경제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직면하는 질문은 돈을 벌기 위한 경제활동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여기 저는 두 사람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한 사람은 무려 9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고 지난 10월에 세상을 떠난 대만 제2의 갑부였던 왕융칭입니다. 그는 “돈은 하늘이 내게 잠시 빌려준 것일 뿐이다.”라며 자식에게는 돈 대신에 이런 유훈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나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저마다 다르지만 세상을 등질 때 모두 돌려줘야 한다는 데에는 예외가 없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구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또 다른 거부인 독일의 아돌프 메클레란 사람은 주식투자의 실패를 경험하고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재산은 13조원이었습니다. 이 돈은 회사의 진 빚을 갚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재산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양복 한 벌로 20년을 입고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왕융칭과는 달리 재산을 자기 것으로만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닌 자기 것으로 알았기에 탐욕에 의해 재산을 늘리려다가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입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경제행위를 했고 똑같이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바위 위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이 두 얘기를 비교해 볼 때 결국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한 행위를 말합니다. 강도만나 쓰러진 사람을 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여러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길가의 거지에게 한 푼 주는 것도 타인을 위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가난하게 되었을까 하고 연구하고 생각해 보니 많은 부분 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책임 곧 사회의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잘못된 사회적 구조를 고쳐가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선하는 일은 평생해도 한사람을 구할까말까 한 일인데, 사회경제구조를 잘만 고치면 수 만 명 수 십만 명을 한꺼번에 구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노0환님처럼 왜 향린교회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는냐고 질문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의 의에 적대하는 일을 할 때에는 이를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정치적이라고 보지만, 저는 이는 하느님의 일인 종교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익환목사 추모]


   여기 한분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평생을 제1성서의 히브리어 원문을 갖고 씨름하시어 공동성서번역 제1성서인 히브리성서 번역실장을 맡으신 분이십니다. 대부분의 시편의 시들은 이 문익환목사님의 손을 통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목사님께서는 민족문제에 깊숙이 관여하십니다. 그날은 바로 야당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장준하선생께서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으로부터 살해당하고 실족의문사로 처리된 그날부터입니다.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문목사님은 그때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전에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성서 번역에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 영결식을 보았던 한 기자는 문목사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조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문익환목사였다. 기자로서 이런저런 현장을 많이 보고 섬뜩한 일도 겪어보았지만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괴수를 향해 그렇게 직격탄을 날리는 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 얼굴과 목소리는 기독교회관 강당 뒷자리의 그 부드럽고 유순한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 이나 달랐다.1)


   그리고 1976년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3.1구국선언의 주동자로 그의 나이 59세에 오랜 옥살이의 첫 관문을 엽니다.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의 생애의 반 이상은 옥에서 보냅니다. 목회자로 성서번역자로 시인으로 통일운동가로 문목사님이 걸어가시고 남기신 업적은 너무나 눈이 부셔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87년 6월항쟁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연세대에서의 이한열열사의 장례식에서 그 당시 죽어간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불러대던 모습이고, 이후 1989년 72세의 나이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상임고문의 자격으로 실정법을 어기고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일입니다. 문목사님이 남기신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평전을 쓴 김형수작가의 말을 빌리면 “늦봄 문익환, 그로 인해 우리는 잘못된 수치심 없이 저 아득한 20세기의 나날들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또 분단 전쟁 국가폭력 같은 두려운 단어들이 아닌 따뜻한 언어로도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보여준 그의 업적 덕분에 새로운 세대는 다른 눈으로 더 잘, 더 자유롭게, 더 정직하게 자기들의 시대를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모세에 관해 문목사님이 펼치신 하늘뜻펴기의 한부분입니다.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세의 부모라고 뭐가 달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식이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억울하게 얻어맞는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심정이 공주에게서 왔을 리야 없지 않습니까?

   모세의 아버지 어머니는 모세가 높은 자리에 올라 행복하게 되는 것보다는 고생이 되더라도 정의의 편에 설 것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말로는 안 가르쳤을지 몰라도 부르르 떠는 몸으로, 부릅뜬 눈망울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요? 피부로 느끼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요?  모세의 혈관 속에는 아브라함의 모험심이 흘러 들어왔던 거죠. 경솔하게도 정든 고향과 일가친척을 버리고 미지의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모험 찬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을 것 아닙니까?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운명과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씨름 끝에 기어이 승자로 올라선 요셉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그를 몹시 흥분시켰을 것 아닙니까?

   눈앞의 영달과 이익을 구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진실하게 살아간 선조들의 믿음이 모세의 생의 발판이었던 것입니다. 피라미드의 나라에 반기를 들다니, 달걀로 바위를 치는 일이 아닙니까? 모세는 그런 무모한 일을 하려고 나섰던 것입니다. 옳은 일로 불러 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밖에는 아무것에도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2)


   저는 문익환목사님의 삶을 생각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했던 또 한명의 미국인 흑인 목사를 생각합니다. 수많은 투옥과 방화 폭탄투여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흑인해방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마르틴 루터 주니어 킹목사.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그의 생일은 미국의 공휴일이 되었고 다음 주 15일은 그가 살아있었다면 80세가 되는 날입니다. 킹목사는 문목사님보다는 11년 늦게 태어났습니다.


[말틴 루터 주니어 킹목사 추모]


   킹목사는 조지아 주 알바니에서의 시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재판이 진행 중인 70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어떤 곤경을 겪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벌금과 항소비용은 엄청난 액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다한 보석금 책정과 재판 지연으로 우리 운동을 파산시키려는 남부지역 인종차별주의자의 전술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시민 불복종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3) 킹목사는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펼쳐나가기로 작정합니다. 이 편지는 1962년 그가 33세 때에 쓴 편지입니다. 그 다음해 그는 또 다시 갇혔습니다. 그는 버밍햄감옥에서 왜 경찰들이 그어 놓은 폴리스라인을 넘어서는 시민불복종을 하였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양심상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이며 위헌적인 법적 절차에 의거해서 내려진 금지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우리가 금지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법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법을 지극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을 빠져나가서 법에 도전하거나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우리는 양심이 살아 있는 한 불공정한 법에 복종할 수 없으며 법정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행동을 존중할 수도 없다. 우리는 법체계란 정의와 도덕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미국 헌법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앨라배마 주의 사법체계가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우리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운동을 지속하려고 한다.4)


    지난 목요일 우리는 그간 두 달 동안 교회 안에서 들었던 촛불을 교회 밖으로 들고 나갔습니다. 이미 한주 전 12월 31일 우리는 경찰로부터 촛불을 끄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또 다시 제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평화의 노래와 기도를 드린 후에 28명의 교우들이 앞에는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뒤에는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라고 새겨진 노란 조끼를 걸치고 차가운 겨울 날씨의 어둠을 뚫고 교회를 출발해서 종로 광화문 시청을 거쳐 을지로로 해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힐끗힐끗 우리를 쳐다봅니다. 워낙이 작은 숫자라 경찰들도 본체만체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작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원합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에게도 경종을 울리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잠자는 사자의 신앙을 깨우기를 원합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왕이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듯이, 예수의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라’ 비난을 받았듯이(16:20; 17:6; 19:23) 우리 또한 그 비난을 감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주님이라 고백하는 예수가 가졌던 그 하느님 나라의 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죽어간 사망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청계천 1가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이런 하늘 뜻을 펼쳤습니다.


[청계천에서 울려 퍼진 하늘뜻펴기]


   지금의 이스라엘은 성서에 나오는 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성서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의 노예 출신인 약자 히브리인들이 모여서 세운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본래 왕이 없는 모든 족속들이 하나의 평등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야훼 하느님만이 유일하신 왕이었습니다. 이것이 본래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과 같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봉쇄하고 억압하고 굶어죽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성서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오늘의 국가 이스라엘로부터 억압을 받고 살해를 당하는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야훼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비록 알라신을 믿는 모슬림인들이라 하더라도 성서에서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정치군사적으로 억압받는 노예계층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슬림 또한 아브라함과 모세를 예언자로 받드는 같은 신앙인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으로 가장 존경받고 학식 있는 니고데모와 함께 대화하고 그를 숨은 제자로 삼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예수는 당시의 국가보안법인 율법이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사마리아 땅을 들어가시고 만나지 말라는 여인과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이 여인 또한 예수를 전파하는 숨은 제자였습니다.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는 본래 형제지간이었지만, 오늘의 남북한과 같이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원수시여기는 담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산상수훈의 복 가운데 가장 큰 복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 이 복을 얻으려면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우선 전쟁의 폭력 앞에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살해의 위협이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가 그러했고 간디가 그러했고 말틴 루터 킹 목사가 그러했습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킹목사가 1963년 워싱톤 광장에서 모인 백만의 사람들 아니 전 세계를 향해 외친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의 끝부분을 인용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가자의 붉은 언덕에서 이스라엘의 후손들과 팔레스타인의 후손들이 서로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식탁에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탱크와 기관총으로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숨진 제이툰 마을이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혹은 저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혹은 저들이 졸업한 학교로 평가받지 않고 저들이 가진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국의 전쟁주의자들과 이스라엘의 총리가 한패 되어 자신들이 미워하는 모든 민족들을 멸하기를 원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들이 마치 한 형제처럼, 북한사람들과 미국인들이 마치 한 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는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


이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나라 안팎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교향곡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함께 행동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위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내 꿈이 실현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헬몬산의 저 산 꼭대기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가자의 저 부서진 도시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예루살렘의 도시 한 복판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바그다드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카불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저 38 철책선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평양에서 서울에서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청계천에서도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그리고 이 향린교회에서도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나의 조국 아름다운 자유의 땅, 저 북녘 백두에서 저 남녁 한라에 이르기까지 평화의 노래가 울리게 합시다.


   그렇게 된다면 팔레스틴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랍사람들과 유럽사람들이, 북한사람들과 미국사람들이, 모슬림과 유태교도들이, 불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날까지 우리의 행진을 멈추지 맙시다. 자유와 정의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촛불을 계속해서 키워 나가십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김종철. 늦봄과 한울과 한마음. 문익환평전 432쪽에서 인용


2) 문익환전집 12권 171쪽


3)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클레이본 카슨 지음 이순희 역 바다출판사. 1998. 206쪽  


4) 위의 책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