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의 창립정신과 복음서(4)

땅 위를 걸으시는 하느님

 예레미야 31, 31-34 ; 요한복음 14, 6-14


한 문 덕 목사

    


[독립교회의 정신과 삼일 독립운동]


        2006년 가을에 저는 <예수말씀과 공자말씀>이라는 성서공부반을 개설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와 공자의 대화라고나 할까요? 2000년 동안 켜켜로 쌓인 교리와 교회의 덧칠을 걷어내면 피폐해진 조국의 백성들의 아픔을 껴안은 뜨거운 가슴과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품은 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청년 예수이지요. 쏜 살 같은 변화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고리타분하다는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순수하게 귀를 열어 놓으면 평생 몸으로 배우며 삶으로 고민했던 한 어른의 지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공(孔) 선생의 어록집 논어(論語)입니다. 공자 선생께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의 나이를 칭할 때 쓰는 두 글자가 대부분 여기에서 왔지요. 열다섯을 지학(志學)이라 하고,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하며, 마흔을 불혹(不惑)이라하고 오십을 지천명(知天命) 또는 지명(知命),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공자의 일생을 표현하는 말에서 나온 것들입니다(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論語』 「爲政」4.) 이런 것들을 나누고 있는데 우스개 소리를 잘하시는 노경선 집사께서 자신이 상담을 해보니까, 이 “공자의 말이 다 거짓이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흔이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마흔살에도 마음을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들이 숫하게 많다는 것이지요. 예순이 되면 귀가 순해진다고들 하는데 즉 마음이 넓어져서 관용의 정신이 생긴다고 하는데, 가는 귀가 먹어 잘 들리지 않는 분들은 많아도 오히려 옹졸해지는 사람들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져서 서른이 되어도 독립하는 청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노경선 집사님의 분석이었습니다.

        향린교회의 네 가지의 창립정신 중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정신은 독립교회의 정신입니다. ‘독립교회’란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은 교회를 뜻합니다만, 전 스스로 서는 교회라고 더 넓게 풀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되고 전쟁이 일어나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교회가 민족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싸움과 분열만을 일삼고 있었기에 향린교회는 독립교회로 남아 교권싸움에서 어느 파에도 휘둘리지 않는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교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향린이라는 평신도 교회를 창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쌍수를 들고 찾아와서 입적했다. 싸움 없는 교회, 아무 파에도 가담하지 않는 교회, 딸라의 배경도 없고, 선교사의 콧김도 없는 교회, 따라서 교역자라는 무관제왕도 없는 순수한 평신도의 교회, 이거야말로 한국적 교회가 아니겠는가!1)

         ‘독립’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딸라의 배경이나 선교사의 콧김에도 휘둘리지 않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아 ‘홀로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든 민족이든 스스로 홀로서지 못하는 노예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짐승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35년간 바로 살았으나 죽은 삶, 목숨만 붙어있는 거지같은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았습니다.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길 것 같은 그 능욕의 시절을 경험하였습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0돌을 맞는 해입니다. 90년 전 서울과 평양 등 전국에서 “조선독립만세”, “왜놈과 왜놈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정부를 세우자”,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 “자유와 평등 만세” 등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로 조선의 모든 민중들이 뛰어 나왔습니다.

        3?1 독립운동은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식민무단통치에 맞선 다양한 반일민족해방운동이 한 물결이 되어 터져 나온 성난 파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독립을 위해서 전쟁도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국내외무장투쟁조직을 지원한 비밀결사운동, 독립을 하려면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교육문화운동, 식민지 경제수탈에 맞서 농민?노동자들의 생존권 수호투쟁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약소민족자결권선언이라는 국제적 변혁분위기에 맞춰 식민지 사회가 보여주는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모순을 없애기 위한 전 인민의 노력이 분출된 운동이었습니다. 구한말 계속된 의병 투쟁과 그리스도교 민족주의자들의 주체적인 자주독립정신이 3?1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일본 자본가와 매판 자본가의 착취와 압박 속에서도 근근이 견뎌온 일부 민족 자본가들은 물질적 후원을 하였으며, 근대적 교육기관과 교회를 통해 배출된 교사?학생 중심의 일반 지식층과 식민지 예속 경제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상인?노동자?농민들의 지지는 확실한 대중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삼천만 동포가 하나 된 3?1 독립운동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바로 “독립”없이는 참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90돌을 맞는 3월 1일, 오늘 우리는 진정 주체적이고도 참된 삶이 무엇인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의 탁월성]


        요한복음서는 “땅 위를 걸으시는 하느님” 즉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삶” 무엇이며, “참된 삶”이 가능한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서가 탄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요한복음서 내에 등장하는 예수께 사랑을 받던 제자(13:23)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전통적으로는 사도요한이라고 알려졌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품안에 계셨듯이(1:18), 유일하게 예수의 품 안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13:23) 그래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옆에 예수와 가장 닮은 모습으로 그려 넣습니다만, 사실은 예수의 사랑받은 이 제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 살았던 상당히 지적인 인물이었으며, 아마도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의 곁을 끝까지 지켰으며,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이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요한공동체에겐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이 요한복음서의 저자라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습니다(21:24).

        이 사람은 공관복음서를 다 읽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예수와 그의 운동인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이 사람은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이야기로는 자신의 공동체를 이끌기엔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자 한자 적어나가기 시작합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씁니다. 예수는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세례요한이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인용하여 예언한 구약의 성취로서의 메시아나(마르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거나(마태오), 역시 구약의 성취로서 세계사에 우뚝 솟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루가)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하느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빛 중의 빛이며,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시는 분이시며, 목마름이 없는 살아있는 물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선한 목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온갖 수사와 호칭으로 예수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요 10:30, 17:11, 21). 이것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전도서 5장 1절)는 말씀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천지보다 큰 것인데, 어느 누가 인간을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지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이다”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사렛 도당에 대한 저주문”을 그들의 기도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당대의 모든 유대인의 사유와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요?


[종교적 욕망과 신앙]


        오늘 제가 나누려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왜 요한복음서는 육체적인 혈통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사렛 촌 동네의 한 목수의 아들을 감히 하느님이라고 부르는가? 왜 로고스가 사륵스가 되었다 곧 말씀이 살(肉)이 되었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통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바늘로 수십 번 찔러도 아프다는 소리하나 하지 않는 바위와 달리, 한곳에 머물러 한 평생을 사는 식물과 달리, 땅만 쳐다보고 기어가는 네발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늘을 향해 사유하는 머리로, 두 발로 움직이는 행동으로, 민감한 감수성으로 지구상에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 이 문명사회에서 제 스스로 서려면 보통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서른이 되어서야 섰다(三十而立)라고 말했지요. 현대사회에서도 부모 곁을 떠나 자립하여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면 서른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 부모의 돌봄을 받고(유아기 0-5세), 학교에 들어가고(유년기 6-12세), 사춘기(13-19)를 지나 청년이 되고 곧 사회에 적응하는 성인이 되는데 30년이나 걸리는 거지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충분한 영양이나 정서적 돌봄, 지적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넘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 삶을 살거나 심한 경우 우울증에 노출되고 자기 파괴적 삶을 살게 됩니다. 성인기를 지나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두, 세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살고 그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 삶의 여정에서 신앙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향린교회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또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은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을 말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습니까?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데 신앙생활은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제가 만난 상당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자신들 내부에 가득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거나, 삶의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크고 안락한 침대역할을 하는 이였습니다. 프로이트가 비판한 대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한 때 자신이 사랑하고 무서워하던 유아기 때의 육신의 아버지를 이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이 안 되서 행복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신을 만들어서 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하는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종교인을 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망, 여러분의 욕구, 여러분의 자기보존 본능을 충족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상처가 회복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잘못된 이기적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추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십억의 돈방석에 앉기 위해 바로 다른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도시재개발업자들의 욕망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로서의 종교는 역사 속에서 제도와 의식, 율법 등을 만들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그 종교 때문에 피폐한 삶을 사는지 보아서 알 것입니다. 그래서 제 후배 중 한명은 제게 교회보다 술집 많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술집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반면 교회는 인간의 정신을 망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 비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친구는 교회는 다니는데 참 사람은 괜찮아. 기독교인인데도 괜찮은 사람이라 말이지. 허 참.” 


[참 인간]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이제 인간다운 인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면 어차피 인간이 하느님을 들먹이면서 하는 모든 말 곧 신학이라든지, 신앙고백적 언어는 사실 모두 인간의 말일 뿐이라는 것을 요한은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은 새로운 창조이야기인 요한복음서를 쓰면서 거꾸로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기억해 냅니다. 요한복음서 10장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10:35).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욕망 덩어리일 뿐인가? 요한은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타인을 이용해 먹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종과 여인과 제자에게 군림하며 부려먹는 주인과 남자와 선생이 있는 반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기는 친구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13장).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그런 사랑도 있음을 말합니다(15:13).

        욕망에 휘둘리며 타인에 의존적인 인간이 아닌 참된 것에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웃 종교인 불교의 선가(禪家)에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스승(祖師)을 만나거든 스승을 죽여라.”(殺佛殺祖) 부처에게 의존하고 스승에게 의존하는 마음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하느님의 인간성 즉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고귀한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자기 비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나 메시아로만 인식했던 초기의 제자들에 비해 참된 삶, 영생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니고데모처럼 정치사회적 안정만을 통한 행복추구보다 더 고차원적 삶, 위로부터 거듭나는 얼로 가득하게 솟아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언어로는 얼나로 솟나는 삶을 고민합니다. 물로 씻어내는 정화의식을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죄를 짓고 용서받는 죄의 순환을 끊고 사랑과 기쁨 가득한 혼인잔치처럼 축제를 통해 적극적인 선을 이루려고 합니다. 가나의 포도주 기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상징하는 성만찬 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진정한 참된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예언자와 구원자로 부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완전히 썩어 부패한 죽음의 동굴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말합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계 공동체들이 중시했던 조직과 규칙, 제도와 종교의식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평화와 화해와 유연성을 주는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솔솔솔 예기치 못하게 불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이전에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야 했지만 앞으로는 마음 판에 직접 하느님께서 새겨놓은 그 음성을 따릅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예레미야 31:34). 이것이 새로운 약속이고 우리가 제2성서를 신약(新約)이라고 부르게 된 경위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성전 건물을 때려 부숴도 참 성전인 양심은 사흘 만에 살아납니다.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육해공군은 때려눕힐 수 있지만 한 인간의 뜻은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論語』 「子罕」 25.).


[자유인으로 사는 것!]


        홍근수 목사님의 파송사는 향린교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홍 목사님은 향린을 떠나시며 은퇴설교의 제목으로 이 파송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루터의 책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시면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인간이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느님으로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적 자유를 가지고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녹아들어있는 유교(儒敎)에서는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엄청난 수행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자유란 사변이성적인 지식과 경험 축적적인 지식이 쌓여서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에 꼭 들어맞는 적실한 행동이 나오는 것(不思而得, 不勉而中)을 말합니다. 공자는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從心所慾不踰矩). 유교의 길은 사람사이의 관계(禮)를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 개인의 인문학적 수양(仁)을 강조하는 윤리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깨달음 즉 연기(緣起)를 통해 일체의 집착과 탐욕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 사건이 저 사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는 같은 것의 양면일 뿐, 인간의 단견으로 구별 짓고 차별을 두는 것은 모두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어 열반적정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불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직시함으로써 참 자유를 누리는 깊고 넓은 심리학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 요한은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나요?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요한공동체 내에는 세례요한을 스승으로 모셨고, 예수도 그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통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대표였던 사마리아인들, 유대교 회당에 여전히 적을 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회당을 박차고 나와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강경파들, 베드로로 대표되는 조직과 제도를 중시하는 사도계 제자들, 그리고 애제자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받았던 이들,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한 예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합리주의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자본으로 덧칠한 거대 로마제국의 맘몬신이었고, 시시 때때로 맘몬의 사탄적 세력은 로마제국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 공동체를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내적으로 분열의 소지가 높았고, 외부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없애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기탱천할 때, 요한공동체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칫하면 자신의 기준과 방식대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식을 말하기도 합니다(己所不欲, 勿施於人.).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적극적 윤리의 길은 생존하기조차 버거운 이들, 지적인 배움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심리적 깨달음은 가족과 사회적 책무와 현실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고달픈 삶속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좀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약점과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준다면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서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인간, 그리고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곳에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기도하신대로 하느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처럼 요한공동체도 하느님과 예수 안에 있어 서로 완전히 하나 되는 길이라 믿었던 것입니다(17:20-26).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일을 요한공동체는 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한국의 대다수의 교인이 그러한 것처럼 하느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자라 저 세상의 공간도 차지하려는 욕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향린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종교적, 대사회적 행위를 통해 유익을 얻고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지, 성숙이 있는지, 서로 사랑이 있는지, 주체적 인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유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고 향린공동체도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살리며 지구공동체를 죽이는 길과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온생명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12:24). 여러분들이 예수의 말씀에 주체적으로 선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던 그분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세상조차도 사랑하셔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땅 위를 걸어 다니는 하느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가 악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악법이 우리를 조여오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기간 동안 예상치 못한 고난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그러니 너희도 세상을 이길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너희는 내가 없어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이제는 너희가 땅위를 걸어 다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신의 친구가 되기 위해 인간의 친구가 되십시오.

사유하는 신앙인, 기도하는 노동자로 거듭 나십시오.

인간의 불완전함을 기억하되,

새 하늘 새 땅을 가슴에 품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십시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세상을 이기신 주님처럼 세상과 싸워 이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