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년 주 일

청년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전도서 11, 7-9 ; 마르 8, 27-30


김재원 교우/ 한문덕 목사

    

[청년과 향린교회]   


        오늘은 청년들의 신앙과 열정을 높이기 위해 기장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향린교회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교회입니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신도회가 5개나 되고, 만 19살부터 49세까지가 다 청년입니다. 미국의 한 학자가 과학문명이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난 현대세계에서는 인생의 주기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하면서 1~25세까지를 교육기, 25세부터 50세까지를 청춘기, 50에서 75세까지를 중년기, 75세 이후를 노년기로 정했는데 우리교회는 현대사회에 맞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교회는, 집회나 모임에 나갈 때 들고 가는 깃발에도 “청년예수”라고 쓸 만큼 청년을 좋아하는 교회입니다. 청년을 우리말로 하면 젊은이입니다. ‘젊다’라는 말은 ‘적다’ 또는 ‘작다’에서 비롯되었지만 저는 유영모 선생님의 해설이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영모 선생님은 젊은이를 “저를 묻는 이”라고 풀어주십니다. 반대로 늙은이는 “늘 그러한 이”라고 하시고요. 육체적 나이에 상관없이 스스로 저를 묻는 사람이라면 모두 젊은이라고 하겠습니다. 젊은이 중에 특별히 그리스도인 젊은이는 청년예수의 삶 앞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묻고 성찰하는 이들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 주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 청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새날청년의 하늘 뜻을 들어 보겠습니다.


김재원 교우의 하늘 뜻 펴기


        안녕하십니까? 새날청년회 회장인 김재원입니다. 저는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 다니면서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기에 ‘사회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동시에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다함께 회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청년주일을 맞아 하늘뜻펴기를 통해 향린교회의 청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교회와 사회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촛불집회와 현 정부]


        지난해를 돌아보면 촛불로 가득한 한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집회가 무섭지 않냐?”, “곧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야 하지 않느냐?”, “왜 공부를 안 하고, 계속 거리에 나가냐?”고 주변 분들께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실 정도로 저는 거의 매일 촛불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명박 씨는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감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당선을 국민들이 참여정부의 정책과 전체 진보진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진보운동 내에서도 국민들이 더 이상 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군사독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참여정부 때와 다르게 좀 더 억압적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많은 청년들이 “경제를 살려주겠다”고 공언한 사기꾼을 뽑아준 것이 또래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촛불을 처음 들었던 5월 2일부터 대한민국을 촛불로 환하게 밝히었던 이 촛불집회에 참가하면서 그 걱정이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그 집회에 분명히 대통령을 찍었을 지도 모르는 수많은 20대 청년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명틀러가 후보시절 내세웠던 ‘반값 등록금’ 공약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청년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의 가사를 “이명박이의 모든 권력은 거짓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바꿔 부릅니다. 대통령이 ‘반값 등록금’, ‘반값 부동산’과 같은 공약을 지켰다면, 12년 전 6월 항쟁에 버금가는 범국민적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촛불과 예수님]


        저는 이렇게 촛불집회에 나가면서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향린교회에서 배우고 알고 있던 예수님은 출생부터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평범한 서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고, 병자의 몸을 치료하는 등 가난한 이웃의 편이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나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한 사탄에게 “사탄아 물러나라!”며 굶주림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의연하시고 불의에 반대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로마정부와 바리사이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라. 그럼 내가 사흘 내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을 허위사실 유포죄로 몰아 최악의 죄인들에게나 적용하는 십자가형으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이 정부가 미네르바를 구속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런 예수님의 삶을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다시 봅니다. 조금이라도 모이려고 하면 경찰들이 막아서는 80년대의 상황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꿋꿋하게 촛불집회에 참가합니다. 그들은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운전면허자격을 박탈당하고, 벌금 150만원을 받았으며, 심지어 직장에서까지 쫓겨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돈 없으면 살 수 없고, 대통령을 찬양, 고무할 자유만 보장되는 사회에 맞섰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죄인 취급당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희망과 바람]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노력해도 이상적인 사회를 영원히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할 지라도, “그 놈이 그놈이지.”라면서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볼 지라도, 그 사람이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인간의 기본적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그 양심을 믿고 있고, 그래서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저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저항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겉보기에는 실패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어려움을 뚫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려”는  행동은 옳았다는 것이 입증될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 향린교회의 여러 어른들께서 우리교회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비롯해서 촛불집회에 개인 혹은 학생회, 사회단체를 통해서 열심히 참가하는 청년들에게 많은 응원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독재시절 자신이 당한 고난을 자식들까지도 당하는 것이 걱정될 지라도 말입니다.

        만약에 촛불운동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물러난다면, 87년 6월 항쟁 때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군사독재세력들이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부른 것처럼, 이제 경제수준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나라라는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장로’ 대통령 때문에 ‘개독’이란 소리가 와 닿을 정도로 이미지가 망가진 지금의 기독교가 과거 이 나라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한 것으로 얻었던 존경을 다시 회복할 지도 모릅니다. 청년들이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격려해 주시면서 영어나 중국어와 같은 여러 외국어 공부를 권하신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에게 향린교회를 널리 알리고, 촛불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건 분명히 필요한 것이니까요.


한문덕 목사의 하늘 뜻 펴기


        이 청년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불의한 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하고, 그래서 위정자들의 잘못을 성토하는 촛불현장에 계속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작은 노력이 분명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모든 행동과 믿음 뒤에는 향린교회에서 배웠던 예수님의 삶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교회와 사회,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들은 이 청년의 삶을 보고 걱정부터 합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을 응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 중 특히 불의와 맞서는 예수님을 자신이 따라야 할 모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자 예수의 가족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를 붙잡아 두려 했으며(마르 3:21, 31-35), 예수 운동에 동참한 많은 이들이 세대 간의 갈등을 겪었습니다(루가 12:49-53).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반대하여 갈라지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평화 운동은 다른 한쪽에서는 불화와 분열과 싸움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자란 청년이나 또는 우리 교회로 와서 열심히 활동하는 청년들의 가정에서는 때론 불화가 일기도 하고, 부모 자식 간의 의견충돌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충돌과 다툼, 부조화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새로움의 창조란 그런 부조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성숙함 또한 일련의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생한 삶을 살아라]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 그리고 어른 세대로서 청년들을 보시면서 염려가 되시는 어르신들이 계시다면 오늘 전도서의 말씀을 새겨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무엇을 하든지 정말로 그들에게 다양한 경험이 되도록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길이 다소 불확실하고 고난이 예상된 길이라 하더라도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공도 좋지만 실패도 맛보고, 반듯하고 평안한 삶과 더불어 혼란과 방황도 겪어봐야 합니다. 풍족하고 안락한 삶도 좋지만 늘 아쉬움 가득한 가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해 감사를 배울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집착하여 무섭게 정진하는 사람, 그 목표가 기득권을 쟁취하는 것이든, 아니면 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이상이든 간에 목표와 목적이 너무 확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음성, 그들을 향한 다른 사람들에 배려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슨 방법이든지 동원하는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고립된 자신을 벗어나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삶의 생생함이란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회 청년 여러분! 오늘 제1성서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누가 시키는 것을 하기보다, 남들이 선망하는 안정 추구의 길보다 좀 더 풍요로운 모험으로 자신을 던지십시오.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슴이 떨릴만한 일들이라면 그 길로 걸어가십시오. 애인이나 배우자, 가족이 반대하면 확실한 길입니다. 거기로 걸어가십시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젊은이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청년 예수의 삶 앞에서 자신의 삶을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에게 청년 예수는 어떤 존재입니까?


[향린청년과 역사의 예수]


        예수님께서 제게 “향린교회 청년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물어 보셔서 제가 청년들 대신 대답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요? 일단 유대인 남자고요. 목수니까 잡일들을 능숙하게 잘 하실 것 같아요.”


“모태신앙이라 예전 교회에서 배운 대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간이자 신이라고 생각했죠. 그 때에는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어요. 내 신앙을 고민할 때 처음 예수를 생각해 보니 그분은 혁명가더라고요. 혁명은 언제나 폭력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기존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과는 다른 방식으로의 혁명을 보여준 분이라고나 할까요?”


“현재의 복잡한 상황,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죠.”


“예수님은 마음이 따뜻하고요. 제게 천사 같은 분이시죠.”


“예수님은 희망이고 가능성입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사실은 불편하죠. 좀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현실에서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2000천 년 전의 강기갑이라고 할 수 있죠. 반역자의 이미지가 그려지지요. 그러나 민중의 편에 서서 인간다운 삶을 고민한 반역자라고나 할까요.”


“예수님은 좀 다혈질 같아요. 화도 많이 내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을 보세요.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책상을 둘러엎은 것도 그렇고....”


        저는 지난 4주간 복음서를 본문으로 하늘 뜻 펴기를 하였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복음서들은 예수라고 하는 한 청년이 일으킨 사건을 잊지 못해 만들어진 새로운 양식의 문서들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발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는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그 어떤 철학적 원리나 이데올로기, 그 어떤 교리나 그 어떤 세계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구체적 한 인간에게서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하느님의 뜻이 드러났음을 선포합니다.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사랑의 향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인, 특별한 지위나 칭호도 없이 그저 말씀과 치유행위로 여느 랍비나 예언자들의 주장과 권위를 넘어선 인간, 계급 질서를 떠나 사심 없이 봉사하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적과 원수조차 끌어안는 사랑으로 끝없는 용서를 베풀었던 사람, 사제나 신학자도 아니면서 종교적 기성권력체제와 충돌했고, 정치가나 혁명가도 아니면서 정치적 세력과 대결했으며, 통상적 규범을 깨뜨렸고, 어떤 당파에도 편입되지 않았으며, 모든 규정들은 오직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 믿었던 사람, 삶이 깊어질수록 깊이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충돌과 모험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모든 정당성의 근거를 오로지 스스로 더없이 친밀하게 “아빠”라 부르던 하느님께만 두었던 분! 예수입니다.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와 중국의 깨달음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인 붓다와 공자와도 달랐습니다.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수도자나 신비가가 아니었고, 도덕적 세계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학자나 도덕군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유대교의 모세와 이슬람교의 무함마드와도 다른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받들어 민족의 살 길을 보여 준 것도 아니고, 성스러운 전쟁을 벌여 신정국가를 만들고 종교적인 세계 정복을 꿈꾼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 붓다, 공자는 모두 크게 성공한 후, 아주 고령에,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이스라엘의 족장들처럼 “인생을 누릴 만큼 누리고” 죽었습니다. 무함마드도 삶의 즐거움을 한껏 누린 후, 자기 하렘(harem: 궁궐 내의 후궁이나 가정의 내실)에서 총애하던 여인의 팔에 안겨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길어야 3년, 혹은 겨우 몇 달간의 공적활동을 하다가 한창 피어나야 할 30대 초반의 나이에 죽습니다.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배반당하고, 적대자들에게는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채, 가장 치욕스럽고 잔인한 처형방식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이 온전한 이가 되기 위하여]


        그 예수가 2000년 전 동료들에게 물었듯이 오늘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 모인 여러분 모두의 각자의 삶에 따라서 다르게 나올 것입니다. 삶이란 변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은 틀렸고, 저 신앙고백만 옳다’라는 생각이야말로 정말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는 누구였고, 무슨 일을 하였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누구인가?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그 물음을 물으며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의 질문에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그 대답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답을 찾았다”라고 말하면서 거기에 머무르기보다는 예수를 기억하며 답 모를 물음을 계속 물을 때에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청년 여러분! 저는 김재원 청년이 말한 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광야에서 “나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한 사탄에게 “사탄아 물러나라!”며 굶주림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의연한 예수와 같은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불의에 맞서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상황의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는 “늘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늙은이”라고 합니다. 외면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얼이 온전히 가득한 사람을 우리는 얼온이(얼이 온전한 사람) 즉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어른다운 어른, 늘 그러함으로 세상 많은 이들에게 그늘과 버팀목이 되어 주는 참 늙은이가 되기 위해서는 젊었을 때 저를 끝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어둑한 신비의 새벽 공기를 들이 마시며 생명의 바다 깊은 곳으로 생각의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요히 잠잠히, 서두르지 말고 자신 안에 있는 혼을 깨워 좌우로 날이 서게 하십시오. 자신을 묻지 않아 혼과 얼을 기르지 않은 젊은이는 몸은 늙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늙은이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처럼 혼과 얼이 살아있는 젊은이는 모든 늙은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새날을 열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이가 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취업전선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일 때에, 아이들 치다꺼리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서, 늦은 밤까지 야근하고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 올 때에도, 잠시 여러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참 자유를 얻기 위해 숨을 좀 더 죽이고 생각을 더 고요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청년 예수는 누구입니까? 또 청년 예수에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2009년 3월 8일 오늘 청년 예수는 당신과 함께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계십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