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시편 19, 11-13 ; 마르 1, 21-28


정 원 진 목사

    


[인사] 


        안녕하십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지난 2005년 1월에 고국을 방문했었는데, 만 4년이 조금 지나서 이렇게 그리던 향린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 뵈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특히 연로하신 어르신들께서 아직도 정정하게 교회를 지키시고 계신 것을 보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다음에는 체중을 조절한 ‘핸섬’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머리카락도 더 많이 ‘휴거’ 했는데, 이제 더 이상 저의 핸섬한 겉모습은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찌고 머리카락 빠진 ‘나쁜 소식’ 말고, ‘기쁜 소식’도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제가 학위 과정을 거의 다 마쳐 이번 5월에는 졸업할 예정입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느라고 고생 좀 했는데 아무튼 미국에 갔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를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동안 가족들도 고생이 참 많았는데, 그 와중에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큰아들 호현이는 대학교 2학년이고, 작은아들 석현이는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희망하기로는 이번 여름 방학에 아이들이 고국을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어떻게 자랐는지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


        제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마음만은 늘 조국에 두고 삽니다. 특히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던 지난 8년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소식은 한국에서 안티 기독교 운동이 엄청나게 확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안티 기독교는 단순한 ‘문화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사회 운동’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기독교는 ‘개독교’라 불리고, 목사는 ‘먹사’라고 불린다지요? 어쩌다보니 저도 그 ‘먹사들’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실 지 모르겠는데 제가 2000년 하반기에 안식년 휴가를 다녀와서 향린 강단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어떤 목사님을 언급했었는데, 그 목사님은 청년 선교를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할 기독교 엘리트를 육성해서 한국을 기독교 이념이 지배하는 기독교 제국(Christendom)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던 분이었습니다. 또 그 주장이 큰 호응을 얻어서 부임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교회 내에 법조인, 정치인, 의료인, 고급관료 등을 육성하기 위한 각종 고시반을 만들고 그들을 후원했습니다. 저는 안식년 휴가 기간 중에 우연히 그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서 21세기의 ‘적(敵)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었습니다. 제발 그 목사님의 희망이 실현이 되지 않기를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빨리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청와대와 내각은 소망교회 인맥을 중심으로 채워졌습니다.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 부자). 이것이 바로 그 목사님이 바랐던 기독교 제국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제국에서의 삶은 여러분이 경험하고 계시듯이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제가 작년 연말에 참 기가 막힌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그 기사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란 단체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에 대해 여론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니까 “한국교회를 (약간 또는 매우) 신뢰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18.4%에 그쳤습니다. 점수로는 5점 만점에 2.55점이었고, letter grade로는 C-에 해당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지금 한국 사람 10명 중 8명은 교회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실을 얘기하고, 진리를 선포해도 ‘교회가 말하면’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왜 저래?” 하고 흉을 봤는데, 요즘은 “교회 다니니까 당연히 저 모양이지” 하며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안티 기독교 운동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안티 기독교 운동이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안티 기독교 운동이 발생하도록 그 근거를 제공한 한국교회 자체에 있습니다. 즉, 안티 기독교 운동보다 저들에게 안티의 빌미를 제공한 한국교회가 더 나쁘다는 말입니다. 저들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렇듯 작금의 현실은 참으로 ‘비상(非常)’합니다. 따라서 향린교회도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떡고물만 주워 먹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향린교회는 적어도 ‘전도’라는 측면에서는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죽을 쑬수록 기존 교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향린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향린에 있을 때 누누이 강조했듯이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믿는다”는 것만 가지고 자족할 수는 없습니다. 다르게 믿기만 하고 다르게 살지 못하면 일반 한국교회와 향린은 실제로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이기는 저들이나 우리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작년에 한국교회 일부에서 “예수 살기” 운동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향린도 거기에 참여하고 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오늘 이 땅에서 예수를 “사는” 것일까요? 물론 그 답은 여러 가지이고,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악령의 실체는 무엇인가?]


        오늘 복음 말씀은 가파르나움이란 동네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사탄에게서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혹을 물리치신 후에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선포 내용은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15)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포를 듣고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마르 1:16-20). 예수님을 비롯한 이 네 명의 제자가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가파르나움이란 동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동네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졸지에 유명 인사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악한 귀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귀신이나 악령이 진짜 있다고 믿으시냐는 말입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많은 현대인들은 귀신이나 악령을 우리의 인식 속에만 존재하는 ‘허깨비’ 정도로 생각합니다. 즉, 실제로는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신이나 악령을 ‘미신’이나 ‘과거의 유물’ 정도로 취급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나 악령을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정도로 생각합니다. 즉, “귀신 들렸다.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미쳤다”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귀신(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현대에는 정신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작년에 로마 교황청에서 Exorcist 사제, 즉 귀신을 내쫓는 사제를 대대적으로 양성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이 뉴스를 접하고 “21세기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고 생각한 분들도 계실 텐데, 적어도 이 뉴스는 로마 교황청이 귀신이나 악령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귀신이나 악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했기에 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약성서학자 가운데 월터 윙크(Walter Wink)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지난 30년 동안에 성경에서 “사탄”(satan)이나 “악마”(demon), 혹은 “권세”(power)라고 부르는 악령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3부작으로 3권의 책을 썼는데, 그 책들은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세계 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로 뽑혔습니다.

        그분은 귀신이나 악마를 “이 세상의 악한 세력들, 특히 정치·경제·문화적인 지배 체제(dominant system)라는 구조악(systemic evil)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실재”라고 해석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느님 외에 실제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엄청난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탄”이나 “악마”, 혹은 “권세”라는 것입니다. 즉, 악의 힘이 통합된 형태가 바로 지배 체제이고, 그 지배 체제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악한 정신 또는 영이 바로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히틀러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는 지배 체제입니다. 그리고 그 나치 독일을 지배하던 악한 영(정신)인 파시즘은 사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구조의 문제나 체제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악한 영이 개인의 내면 또한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문자 그대로 자(資)를 본(本)으로 삼는 사회체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자(資)는 재물, 즉 돈을 뜻하니까, 자본주의란 결국 돈이 근본이 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도 사람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돈 많은 국가가 선진국이고, 돈 많이 번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월터 윙크의 말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가 구조악이라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정신은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악의 힘인 사탄은 제도나 체제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세계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악의 세력을 실체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악의 세력을 극복하고자 싸우고 있는 사람까지도, 그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한 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욕하면서 배운다”고 그 악을 점점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책이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한 바는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남이 가진 파시즘”은 보면서도 “자기 안의 파시즘”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보면서, 내 눈 안에 든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배자가 물러나고 그 지배자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도 늘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파시즘에 지배당하고 있기에 겉으로 보기엔 달라도 속은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1월 말에 시카고에 있는 학교에 가서 그것을 직접 경험하고 왔습니다. 제 지도 교수는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가장 senior입니다. 작년 10월에 제 지도 교수님께 학위 논문을 제출했더니, 그분이 고칠 곳이 한 곳도 없다고 그냥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맘 편히 지난 1월에 시카고로 갔지요. 그런데 엉뚱하게 한 junior 교수가 제 논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하도 집요하게 몰아붙여서 1주일동안 고생하면서 논문을 수정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junior 교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저더러 ‘제국주의자’(imperialist)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시각으로 한국교회를 바라보고 비판한 후, 제 시각에 따라 한국교회의 문제를 도려내고자 칼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맞고, 한국교회는 틀렸다. 그러니 내 생각대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제 태도가 ‘제국주의적’(imperialistic)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교수님은 제 생각이나 제안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도 절대적으로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현하는 방법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put-in’ 하려고 하지 말고 ‘draw-out’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로 하여금 자기 잘못을 스스로 끌어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동의하고 그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논문을 수정했습니다. 저 역시 남의 파시즘은 잘 보면서 제 안의 파시즘은 잘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에 대한 생각의 변화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진보와 보수를 그 사람이 가진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에 관한 입장에 따라 구분했었습니다. 즉, 그 사람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가서 진보와 보수는 ‘입장’이 아니라 ‘태도’에 따라 갈라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inclusive한가 아니면 exclusive한가, 즉 포용적인가 배타적인가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열려있는 사람은 진보요, 닫혀있는 사람은 보수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요, 남도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입니다. 그래서 보수는 “이것 아니면 저것,” 즉 “either-or”이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진보는 “이것도 저것도,” 즉 “both-and”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둘 다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처럼 보이는 이 태도는 입장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도 끄덕, 저것도 끄덕하는 사람은 결코 진보가 아닙니다. 진보라면 확실한 자기 입장은 있어야지요. 하지만 그 입장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속에서 자기 입장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짜 진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파시즘과 싸우면서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파시즘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닌지,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데로 만사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파시스트나 제국주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 사람은 벽을 부수는 사람이 아니라 벽을 쌓는 사람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예수를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향린도 진보적이라 자부한다면 이 점에 대해서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악한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싸우려면 전방에서 직접 전투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후방에서 지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전방에 나가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 문제입니다. 몸의 각 지체처럼 서로가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한 몸을 이루어 같은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의 고유한 역할을 존중하면서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델입니다.


[우리 안의 악령을 내보내자!]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악령 추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가르침과 악령 추방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에 대한 악령의 반응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24절에 있는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그냥 그대로 살고 싶은데, 현재 상태와 지금까지의 살던 방식이 좋은데, 익숙하고 편한데,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악령이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하고 반응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익숙하고 편하고 좋아도 이제까지 살던 방식으로 살아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실재하고 있는 악령을 내 보내야만, 우리 안의 파시즘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만 비로소 우리 밖의 악과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 살기의 출발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셨다면 청중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 ‘지식’을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는 하루하루 아는 것을 쌓아가야 합니다. 새 지식을 차곡차곡 늘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학문이란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배울 때는 달라야 합니다. 진리는 쌓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비로소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에서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고 했습니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버려야 얻습니다. 악령을 내보내야 성령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방식을 버려야 새 삶의 방식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을 내보내야 비로소 우리 밖의 파시즘과 싸워 이길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가버나움 회당의 이 사람처럼 부디 악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 삶을 사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