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2 하늘뜻펴기 / 사순절 4 / 임보라 목사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 / 이사야 58 : 6-12 ; 요한 3 : 14-21


[우리도 혹시 좀비?]


좀비(zombie)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 무섭게 덤벼드는 좀비처럼 동일한 상대에게 두 번, 세 번 져도 단 한 번의 기회만 살리면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는 희한한 경기 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합리적이다.' 이것은 지난 주간 남한을 달구었던 WBC 관련기사의 일부입니다.
'좀비은행‘ ’좀비PC' '좀비기업‘이라는 말이 주로 많이 쓰이고 있고, 작년부터는 보수언론에서 ‘촛불 좀비들’이라고 하면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사회 불만자로 비하하고, 몰아세울 때 쓰기도 합니다.   


만화에서는 주로 무표정하며, 회색 그림자와 같이 희멀건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비척대며 걸어 다닙니다.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쯤하면 좀비의 뜻을 잘 모르셨던 분들도 조금은 감이 오겠지요. 살아있는 시체, 본능적인 욕구만 발달되어 있는 존재, 뿐만 아니라, 물리면 상대도 순식간에 동종으로 변하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가 좀비입니다. 


주일 아침, 알듯 말듯한 ‘좀비’를 거론하는 이유는, 기독인이면서도 살아있는 시체와 같이 비척거리면서 한주간 살다 이곳에 온 것은 아닌지, 본능적인 욕구만 쫓아다니다가 허한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 기독인이랍시고, 덜컥 다른 사람을 물어놓고 또다른 좀비 하나를 탄생시켜 놓고 거기에 만족해 하는 것은 아닌지, 이 시간, 잠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해서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다음다음 주일이면 종려주일을 맞게 되고, 그 주간부터는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금식이나,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절제하고자 하는 것들을 따로 정하도록 독려하지 않았습니다. 재의 수요일 예배와 성금요일 예배 외의 다른 공 예배를 새로이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허전하게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수도 있겠고, 혹자는 그런 것 강요당하지 않아서 살 것 같다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향린교회는 앞서 나가는 교회이니, 사순절이든 뭐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맘대로 지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님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경색되다 못해, 마주 보고 달리는 두 대의 기차와도 같은 남북관계, 실업자 100만 시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불안한 사회구조, 이젠 천원 갖고서는 김밥 한 줄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서민경제 파탄의 시대를 살면서, 어찌 기도를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 금식은 커녕 과식에 폭식을 하며 살지요. 물론, 금식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내 건강, 내 몸매를 생각할 때요. 그러니,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작은 고통을, 사순절 때 만이라도,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띄더라도 신앙훈련을 위해 해야할 필요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순절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사순절 영성훈련을 위한 질문들’ (로렌스 훌 스투키, 웨슬리신학대학 예배학 교수)을 나누었습니다. 열한가지 질문 중  몇 가지만 이 시간 되짚어 보겠습니다.  
 

- 내가 가진 것을 낯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고 있는가?

-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 예배를 드릴 때, 다른 회중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 생기고 있는가? (내가 속한 교회의 성도들이 기여하는 부분과 필요로 하는 부분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었는가? 혹은 침묵한 채 방조하였는가?

- 경건한 기도와 독서를 통해 말하기 보다는 듣는 시간을 더 늘려가고 있는가?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시간을 더 늘려가고 있는가?

- 나의 삶 속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돌볼 필요가 생겼을 때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향린 게시판에도 올린 내용이기는 하지만, 다음 주일 향린 강단이 나오면, 남은 사순절 기간이라도 이 질문들을 놓고 진지하게 매일매일 묵상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고립된 섬, 그 이름 개.신.교]


30세라는 젊은 나이, 한창 혈기왕성한 한 젊은이가 등장하더니만, 많은 이들, 특히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던 사람들의 친구를 자처하면서, 성문 밖으로 밀려나거나 마을 공동체에 있더라도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여김을 받았던 이들을 온 몸으로 껴안으면서, 당시의 핵심세력 중의 하나인 성전체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고’만을 외치며, 그야말로 화를 자초하더니만, 결국 그이는 처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를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 따르미’로 자처하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하는 이들이 세계적으로는 31.4% (22억명) 이요, 남한에서만도 개신교 18%, 캐톨릭 11%이니 29%가 됩니다. 
지난 주 정원진 목사도 언급하셨던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내용 중에는, 종교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은 37.8%로 카톨릭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얼마 였을까요? 7.6%의 신뢰도를 얻었습니다.
다 아는 얘기 자꾸 반복해야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실테지요. 정작 그 얘기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니까 하실테구요.
그러나, 이미 전체 사회에서 고립된 섬. 개.신.교. 이는 결코 ‘너네들’ 문제가 아닌, 분명 우리의 문제입니다.


지난 3월 4일, 향린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아고라라는 필명으로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솔직히 언론이 답답하고 시민들께 섭섭합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시국미사나 집회는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시민들도 열렬히 지지하는데, 개신교의 목회자와 교회 등의 시국기도회는 거의 보도를 하지 않네요. 아고라에 올려도 무자비하게 악플만 달리구요~~!!!! 개신교는 시민운동에 끼어들지 말랍니다.~!!!
암만 진보교단이라고 쇼해도 너희는 뉴라이트와 똑같은 유전자라면서 아주 매도해버리네요!!!
진보의 탈을 쓰고 국민을 홀리는 향린개독들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더러워졌다네요!!!
사회운동하려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민족의 이름으로 양심 선언 하랍니다.!!!
너무나 황당하여 어제 하루동안 속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진보적인 교회가 양심적으로 정의를 위하여 행동하는것까지
시민들은 그렇게 보기가 싫은겁니까?? 개신교 자체가 싫은겁니까??
도대체 시민들은 향린교회도 안 믿는단 말입니까???  기가 막혀서!!!
어떻게 반응해야 좋습니까??


이에 대해 우리 교우들은 이러한 답글을 달았습니다.

- 우리가 인정 받으려고 하는건 아니니까요.쩝.뭐 할 수 없지요. (빼빠)

-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실랑이 해 봐야, 힘만 빠집니다. 저도 다른 곳에서 그런 비슷한 일로 힘 뺀적 많습니다. 그럴 정도로, 워낙 '기독교' '기독교인'에 대한 정서가 삭막합니다. 오죽하면 '개독'이라고까지 하겠습니다. 우리가, 행동으로, 몸으로, 보여 주어야지요... 그래야 겠지요. (스트라디)

- 우리를 지지하는 편이 많든 적든 우리가 갈 길을 가는 게 우리 스타일이지요. (가을하늘)


여러분들은 속이 터질 정도로 답답한 아고라 님에게 무엇이라고 답글을 다시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기독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표식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면서,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먹어버리기도 하고, 먹히기도 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단서와도 같습니다. 적어도 매주일 한번씩 (한 달에 한번 오는 분들, 분기별로 오시는 분들도 상당수 입니다만) 이 교회라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았다면, 그에 대한 적용을 교회 안에서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밖에서 제대로 해야 하는 의무를 지난 사람들이 바로 기독인입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품새를 맹렬히 비판하고 당장 오늘이라도 전복시킬 듯이 폭발적인 열정을 보이다가, 어느 새 한 발자국 교회 울타리 밖을 벗어나면, 기독인이라는 가면을 싹 벗어던지고, 더 세게 짓누르고, 더 가열 차게 경쟁대열에서 뒤질세라 악다구니를 쓰는 것은 2MB 계열의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솔직히 바로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참된 단식의 의미]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언서 말씀 앞에 비춰보면, 더 확실히 우리 자신이 보입니다.
함께 읽은 이사야 58장은, 제3 이사야에 속합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친 유다 공동체는 희망을 안고 새로운 민족 공동체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지배층 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민중들은 또다시 쓰라림을 맛보게 됩니다.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서 또다시 배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은 경건 생활을 마치 자신들만 해왔던 양, 예루살렘 멸망 후 유다에 그대로 남아있던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따위 단식은 집어 치워라’라는 호통을 들을 수밖에요.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는 것(이사야 58:5), 그렇게 시늉하는 것이 단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게다가 맨날 하는 일이 시비와 싸움에,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기나 하면서, 단식 합네 하고 있으니, 집어 치우라는 것이지요.
대신, 제3이사야는 오늘 읽은 58장, 이사야 61장에서, 그리고, 예수께서 광야에서의 유혹을 물리치고 난 후, 회당에 들어가 읽은, 루가 4장에도 반복되는 내용과 같이,
“끌러 주고, 풀어주고,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릴 뿐 아니라, 먹을 것을 나누고, 떠돌이들을 집에 맞아들이고, 벗은 사람은 입혀주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2MB가 농림부 장관에게 외교관처럼 넥타이 매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지요? 그 말과 함께 어느 리셉션 장 같은 데서 남들은 다 정장 차림인데 잠바 차림인 한사람이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 한동안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작업복을 매일 입은들, 날로 찢어지는 농민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농민들의 심정을 쌀 한 톨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작업복이 문제겠습니까? 호미, 낫을 들고라도 출근해야지요. 
전과 14범님 그 누구는 그럼 죄수복으로? 국방부 장관은 군복입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츄리닝? 해양수산부 장관은 해녀복? 내용보다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것을 초지일관 보여주고 있는 천박한 이 정부에 대한 네티즌들의 비꼼과 마찬가지로, 제 3 이사야 또한 단식한답시고, 그 의식만 흉내 내는 척 해봐야 말짱 허튼 일 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인권이나 민주화를 억압하는 국가 전략을 ‘잔인한 선택(cruel choice)’이라고 하지요. 성전 재건과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의 잔인한 칼날을 휘두르며 이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무자비하게 짓밟겠다는 의지만 살아있는 지도층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82주 연속 1위를 비롯하여 수많은 상의 받았다는 ‘세 잔의 차’라는 책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네팔 트래킹 소식을 전해주셔서 그런지, 산에 올라봐야 제일 늦게 올라갔다가 제일 늦게 그것도 간신히 내려오는 제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K2 등반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광고 카피가 눈에 띄어 책을 한권 샀습니다.


등반 중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그레그 모텐슨이라는 사람은,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그 은혜를 갚고자,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마을 중의 하나인 파키스탄의 산골마을 코르페와 인근 산간마을에 전혀 교육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무려 78개나 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교육의 혜택을 받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돈이 많아서 사립학교를 마구 세워댄 것이 아니고, 생사의 고비를 넘어선 후의 삶은 덤으로 얻은 것이다 라고 여기고, 죽었으나 새롭게 생의 장을 열어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레그 모텐슨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는 사실 부지기수로 많이 있을 것입니다. 생과 사의 고비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을 통해 앞으로 어떠한 삶을 전개할 것이냐, 단식의 시늉만이 아닌 참된 단식의 의미를 어떻게 삶 가운데서 체현시키며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고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제, 복음서의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입니다. 그 가운데 3장 16절은 기독인이라면 대부분 외우고 있는 요절이지요. 교회 문턱을 한번이라도 드나든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하는 복음성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전도할 때 제일 많이 쓰이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앞뒤 구절을 놓치는 우를 범해왔습니다. 앞뒤를 봐야 그 ‘믿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거든요.


요한 3장 14절의 구리 뱀 이야기는 민수기 21장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구리 뱀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높이 들려야 하는 것’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명예와 명성을 얻거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성전체제와의 대결 속에서 경멸당하고 배척당한 결과,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이 들려지는 것을 좋아하지요. 평생의 과업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높이 들려짐이란 사실, 땅바닥에 내팽개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라는 것은 땅바닥에 내팽개침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왜?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으니까,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아쉽거나 무서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그동안 단 사탕 깨물어 먹듯 너무 쉽게 여겨왔지요.결단의 고백은 전혀 없이 말입니다.    


가마우지라고 불리 우는 물까마귀는 중국 계림 지역에서 물고기를 잡는 도구처럼 사용된다고 해요. 이 가마우지는 잘 날지는 못하는데, 길고 끝이 구부러진 주둥이를 갖고 있고 목이 길어서 물고기를 재빠르게 낚아채서는 꿀꺽 삼킨다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끈으로 목 아래쪽을 묶어 삼키지 못하게 한 다음 가마우지가 잡은 물고기를 챙긴다고 합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번다는 말처럼, 가마우지는 영리한 사람들에 의해서 한낱 도구처럼 부림을 당하는 셈인데,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을 가마우지처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필요할 때는 -뭐, 기독교인 우대, 연봉 4천,- 챙기고, 불이익이 생긴다 싶을 때는-기독인 절대 사절, 향린인 더더욱 금물-휙 하고 버리고 마는 존재입니다.


[일상의 성화-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교활하다고 할까요? 우직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를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민감성을 잃고 만다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 듯, 예수를 따라, 진리를 따라 간다고 고백하는 우리들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하늘 뜻 제목에 작은 따옴표로 ‘사는’이라는 말에 강조점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일상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 나의 일상이 얼마만큼 빛 가운데 드러나 있느냐. 나의 일상이,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물음입니다.

일상의 성화, 즉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예수를 따라 살고 있느냐는
‘하느님은 만물과 모든 장소에 똑같이 존재하시고,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똑같이 내어줄 의향이 있으시다. 하느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어디에서나 똑같이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라는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말처럼, 내 삶과 내가 접하는 모든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얼마나 만나며 살고 있는지, 모든 실천 속에서 그분을 온 몸으로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가운데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상의 성화, 진리를 ‘사는’ 삶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세계 곳곳에서 선언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류인 ‘자본주의’을 상대화 시켜내고, 그 한계와 넘어서는 안 되는 영역에 대해 명확히 짚어내면서, 모든 사회가 다 가치 있다고 입을 모으더라도 ‘아니오’할 것에는 ‘아니오’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키워야 합니다. 대신 자기 스스로를 절대화하려는 오류는 경계해야겠지요. 


앞서서 보았듯이 개신교의 신뢰도가 나날이 추락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서있다고는 하지만 교리의 견고한 성벽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안정만을 쫓아갔기에 나타난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도, 십자가도 수단처럼 여기고, 졸지에 가마우지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으니 오죽이나 하겠습니까.
참된 생명의 길을 얻기 위해 감내할 수밖에 없는 고통과 죽음, 자기 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종교의 참된 거룩성은 절대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 공동체로 모여 있습니다. 일상을 나누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예식을 통해 하나됨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요? 우리가 스스로를 예배 공동체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가부장적인 혈연집단이나 경제적 이익집단을 넘어서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기 위해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예수는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였고, 심지어는 새로운 가족으로의 확장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온전히 넘어서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공동체가 필요한 것인가요? 너무 쉬운 질문이지요.
서로 함께 일 때, ‘관계’를 맺어갈 때, 그 안에서 스스로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야 사랑이 뭔지, 화해가 뭔지 알게 되고, 섬김, 나눔, 용서 등등의 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일상을 함께 살면서, 고민도 나누고, 그러면서 감수성과 민감성도 계발하고 또 그래야 비로소 몸이 움직이는데 까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의 시작하여 체험에 이르고, 마음과 몸으로 직접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서, 통합하고, 다양성을 살리며, 역사의 큰 흐름을 통해 그리고 구체적인 현실과 몸을 통해 이루어가는 것이 제대로된 영성일 뿐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거룩한 영을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욕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일회적인 것이 아닌 지속 가능한 것들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통합시켜나가고, 성숙해가고자 하는, 그런 의지와 마음을 길러내는 곳,
 그것이 참된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가 간 길을 간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뿐만이 아닌,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 뚫는, 새 길을 내어가는 과정입니다. 타성에 젖은 행위가 아닌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통해 호흡해 가면서 가는 것입니다.


하늘 뜻 펴기 원고 마무리를 하면서, 문득 정호승 시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하는데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중에서)

사랑대신에 ‘진리’라는 말을 넣어보겠습니다.
눈을 감고 그 부분을 묵상하시면서 침묵기도로 이어가겠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을 한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진리라고 말한다

진리를 위해 죽어야하는데
내가 진리를 위해 죽어야하는 것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진리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살다가 죽어버려라


****************

20090322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흩어진 나의 인생을 한데 모으십시오. 
다툼으로 갈려진 것들을
하나로 묶어 내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늘의 뜻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세상 또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주간도 당당한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