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5 하늘뜻펴기 / 종려주일 / 임보라


이사야 50 : 4-9 ; 마태오 21 : 1-11 / 이 분이 누구냐?


[환호하는 군중]

요 근래 부쩍 신문, 방송에서 스포츠 관련 소식을 자주 듣게 됩니다.


한국이 일본에 석패한 야구 경기며, 김연아 씨의 피겨스케이팅 세계 1위 소식, 또 뭐가 있으려나요? 수요예배 시간과 경쟁했던 북남 축구 경기, 제가 아는 수준은 이 정도라서, 요즘 스포츠계 동향이랄까, 그런 것을 알아볼 요량으로, 스포츠 신문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긴 했는데, 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제 자신, 스포츠 경기를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닌데요. 그래도 한 때는 스포츠 광이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천안북일고와 선린상고가 한창 날릴 때의 고교야구며, 요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근황을 알 길 없지만 장윤창 씨가 스카이 서브를 날리던 배구 경기에 매료 되었던 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좋아했던 야구 선수는 천안북일고의 포수였던 김상국 씨였는데, 당시 인기 짱이었던 사람은 박노준 선수였지요. 언젠가 부상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박노준 선수 팬이었던 제 친구를 따라 시내에 있었던 병원까지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 근처에 장사진 치고 있는 팬들의 행렬에 기가 질리고, 혹시 선생님들께 혼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발길을 되돌려 왔지요.


스포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뼈를 깎는 훈련 과정을 지나,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해, 그리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 승리의 기쁨 등을 지켜볼 때, 국민들은 열광하게 되고, 그 승리의 몫을 내 몫으로 여기며 기뻐하지요. 그런 속성을 이용해, ‘3S정책’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Sports, Screen, Sex, 이 3S는 통치자들이 비판의식을 무디게 만드는 우민화 정책으로 독재정권 때, 적극 활용했습니다.


근데 문득, 요즘도 이런 수법을 써먹어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번 쯤 곰곰 생각해 볼 일입니다.


스포츠에서는 반칙을 하게 되면, 옐로우 카드나 레드카드를 받습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누적되면 경기에 얼마 정도 참여할 수 없는 규제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반칙을 해도, 규제는 고사하고, 활개 치며 다닐 수 있도록 오히려 보장해주고 있는 정치권 세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번 주도 다양한 반칙들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성매매 이야기를 꺼내면 남성분들은 ‘왜 우리들을 잠재적 범법자로 보는 거냐?’ 며 기분 상해하십니다. 2004년에 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니 이제 5년이 되어가지만, 2007년 한해동안, 우리나라의 연간 성(性) 구매자 수는 약 9400만 명 정도가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매매 특별법에 의해 처벌받는 사람이 연간 5만명 이라고 하니, 일상에 박혀 있는 성매매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 별일 다 하고 있다’ 하면서 성매매 알선한 경험담을 버젓이 얘기하고, 그 얘기 들은 사람들은 알아서 off the record 처리하는 상황을 봐도, 가늠이 되지요.


‘얼굴 못 생긴 마사지 걸이 서비스를 더 성심껏 한다’고 들었다는, 그러나 들은 건지, 경험담인지 듣는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친절한 대통령이나, 유착관계에 있던 기자들 대접하느라 모텔 키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느라 숨 차셨을 경찰청장이나, 음담패설을 안주삼아 쌍쌍파티 성접대 받는 좌우분별 못하는 청와대 행정관이나, 성매매 방지법 피해 해외 나가시는 분들이나 다 치졸하기 이를 때 없는 영구 추방령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그 진실은?]


해마다 종려주일이 되면, 그 모습들을 재현하는 행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스포츠 경기 때마다 뜨거운 응원전을 펼치는 군중들이나 우승한 선수들을 열렬히 맞이하는 환영인파들을 볼 때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던 때 환호성을 보냈다는 군중들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별반 의심 없이, 종려주일 하면, 종려나무 가지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들, 그리고 그 사이로 입장하는 어린 나귀 탄 예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4월 첫날이 만우절이었지요. 만우절하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많이 떠오릅니다.
수요예배가 있었던 날이 만우절이었는데요. 교회에서야 한목사와 제가 자리를 바꿔 앉아있은들, 누가 보고 즐거워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심심하게 지나갔습니다. 수요 예배 끝나고, 집에 갔더니 아이들이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재잘대며 보고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둘째 아이와 한창을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혜리언니 네에 불이 나서 오늘 혜리언니 학교에 못 왔다’라고 하는 거예요. 혜리는 큰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라서, ‘어머나, 어떻게 하니..’했지요. 엄마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이는 근심걱정 구름이 뒤덮이는 것을 확인하더니만, ‘뻥인데....만우절인데...’ 하며 한건 해낸 뿌듯한 얼굴에 웃음이 가득 합니다.


좀 이따 저쪽에 있던 큰 아이가 와서는 또 한창 이야기 합니다. 그러더니 ‘근데 말이야...’하면서 “혜리가...” 하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모르는 척, “혜리가 왜?” 했더니, “혜리네 집에서 불이 나서 말이야...”하며 또 한창 뜸을 들입니다. 작은 아이가 언니한테 당했던 게로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터져나와, 아예 제가 “뻥인데...만우절인데....” 했습니다. 눈이 동그래지던 아이는 이내 자지러지게 웃더군요.


우리 뇌리에 박혀 있는 그 성서의 장면이 실은 ‘뻥인데...’하면 여러분들 다 기절하실까요?


오늘 읽은 마태오에는, 많은 사람들,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온 시민으로 표현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서인 루가에서는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이 맞이한 것으로 나와 있고, 마태오와 루가의 원자료인 마르코에는 뭐라고 되어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1세기 경 복음서를 기록한 그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란 얼마나 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도 매일 씁니다만, 인터넷 인스턴트 메신저를 ‘소셜 소프트 웨어(social software)’라고 하더군요. (클레이 서키 교수, 미국 뉴욕대학)
인터넷 시대에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소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조직도 가능해 졌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공유’와 ‘협력’ 뿐만 아니라 집단행동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집에서도 실시간으로 집회 현장을 지켜볼 수 있고, 위급한 상황이 되면, 현장방송은 물론, 문자, 메신저, 댓글 등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촛불 집회를 통해 경험을 했지요.


20여년 전, 6월 항쟁 때는, 시위를 시작을 알리는 구호, 행동지침,  시위장소 변경 등  지도부에서 연락이 오면, 약속된 장소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귀엣말로 넌지시 전해주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모이곤 했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사람들 모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하튼, 주후 30년경으로 추정되는 예루살렘 입성 당시, 정말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을까요?


복음서 기자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에 대한 사전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마태오 2장에 나오는 예수 탄생 설화에도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는 얘기를 하자, 헤로데 왕이 당황하였을 뿐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표현됩니다.


보도매체가 발달된 요즘처럼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실은 그럴만한 사건도 되지 못했지요. 단지, 기록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온 도시가 들썩였을 법한 사건이었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를 맞이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모였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4만 명에서 7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습니다. 축제를 맞아 찾아간 순례자들의 숫자를 더하면 많게는 20만 명 정도가 모여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 인원이 다 예수의 행렬을 지켜본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이 역시도 수많은 군중들이 맞이할 만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자 한 말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하지만, 마태오와 마르코는 나뭇가지를 흔들었다고 되어 있고 요한에서만이 종려나무 가지라는 이름이 나올 뿐입니다. 그나마 루가에서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밝히고자 퍼즐 게임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제 1성서의 이사야나 즈가리야의 예언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을 각색했다고 말합니다.


즈가리야는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실 것이다.’ (즈가리야 9:9-10)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축제의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긴장이 최고조 되는 때이기도 했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시위가 매우 흔하였기에, 로마군 수비대가 그 시기에는 더 많이 주둔하여 성전과 그 주변을 감시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총독의 인솔에 따라 서쪽으로부터 행렬을 이루며 왔습니다. 반면, 예수와 그 제자들은 동쪽으로부터 등장합니다.


‘도와주세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담긴 “호산나!”는 유월절과 오순절에 부르는 시편인 할렐(Hallel)에서 유래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입니다. 예수를 환영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롸산이 함께 쓴 ‘마지막 주간 (The Last Week'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06년도에 나온 책인데,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쫓아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주간의 하루하루를 새롭게 조명한 책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30년 봄날, 예루살렘으로 두 행렬이 들어왔다. (중략) 하나는 시골뜨기의 행진이요, 다른 하나는 제국의 행렬. (중략) 고난 주간은 이 대립에 대한 이야기이다.”(p2-p5)


병거와 병사와 무기를 앞세우고 위풍당당히 들어오는 행렬과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행렬, 완전히 상반되는 행렬이지요. 그러면서, 종려주일은 속회를 위한 고난 주간의 시작이 아니라 제국에 대항하는 정치적 시위를 위한 D-day 였다고 설명합니다.


병거와 병사와 무기가 아닌, 불의와 폭력과 배제와 교만에 대항했던 예수의 행렬은 그 의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사실 당시에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로마 수비대가 행렬을 막아서고 그 자리에서 연행해 가지 않았을까요?


예수의 행렬은 두 개의 행렬로 대비되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형편없었던 행렬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성전체제에 매스를 들다]


예수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본격적인 사건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께서 결국 사고를,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치신 겁니다.


위풍당당 로마제국 못지않게 예루살렘 성전 또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지요. 제사에 쓰일 물건은 모두 성전 안에서 사야했으니, 당연히 비싼 값에 팔았습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이니, 각자 속한 곳의 돈을 사용하고자 했을텐데, 외국돈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로마 식민지로 있는 때라, 당연히 이스라엘 돈이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 환전상을 두고 비싼 환율로 바꿔주는 상인이 생겨나게 되고, 제사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하는 상인이나 돈이 되는 장사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쥐고 있는 그 핵심 세력에게 온갖 로비를 했을 겁니다.


신문을 보니 “연차수당 탔어?”라는 말이 요즘 유행이래요. 자금사정이 어려운 요즘, ‘회사에서 연차수당이나 제대로 받았느냐’ 라는 뜻이 아니래요. ‘박연차 회장한테 좀 얻어 썼어?’라는 뜻이라네요.


예수 당시에도 로비를 위해 뿌리는 연차 수당으로 호의호식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을 예수가 겨누신 것입니다. 자신의 돈벌이를 위한 행태를 종교적으로 합리화 했던 사람들을 향해서 매스를 드신 거예요.


그 썩은 고리를 만천하에 드러내는데, 단지 사람들을 내쫓고 상을 뒤엎은 것만이 아니라, 마르코에서는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까지도 금지시켰다고 적고 있습니다. 물건이라 함은 제사용품 일텐데, 나르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아예 제사를 못 지내게 방해하셨다는 거지요. 형식 만 갖춰서 하는 종교의식을 무엇 하러 하냐, 이웃 앞에서 겸손은 커녕, 정직하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의 의와 자비를 입으로만 외치면서, 뭣들 하는 짓거리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끔 ‘저는 보수적인 사람이라서요.’ 하는 경우를 봅니다. liberal한 관점에서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고갈 때 이런 얘기가 나오면 십중팔구, ‘나는 차원이 좀 다른 사람이다’, ‘나는 당신들과 달리 품위 있고 우아한 사람이다’라는 얘기입니다.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반대로 개방적이고 꽤 대범한 척, 오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아..저 얘기는 일종의 내숭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한 단계 수위를 높여 짓궂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역시나 발끈 화를 냅니다. 그 때 품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군요.


예루살렘 성전 체제는 자기 모순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경건함으로 포장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품위를 잃지 않으려구요. 구린 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아닌 척 하느라 무척이나 힘들었겠지요. 그런데 정면으로 그 모든 것을 까발리는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하필이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 이 때, 그 한복판에서 ‘나의 앞에 나서서 살려 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는 강도의 소굴’(예레미야 7:10)이라고 길길이 뛰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그 알량한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겠습니까. 완전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떵떵거리는 로마 제국주의, 성전을 중심으로 불의를 일삼으면서도 의롭다 떠들어대는 종교 왕국주의를 향해 메스를 들이대신 그를 그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겠지요. 그렇게 해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로, 종려주일을 맞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행사를 할 것이 아니라, 성전 정화를 다짐하는 결단식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희생양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시대]


기독교 교리 중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죽음은 ‘나의 죄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온 세상을 위해서’ 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의 죽음에 대한 견해 역시도 다양합니다만, 초기 기독인들은 고난 받는 종을 비롯한 예언서에 기록된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연결시키면서, 예수의 죽음은 마치 유월절에 바쳐지는 속죄양과 같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백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 했던 것이 아니라, 부활 이후, 그 모든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고백된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상처, 소외, 분리, 고독 등등이 엉켜있습니다. 죄책감과 그에 따른 공포감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라는 의식은 사실 죄를 진 나를 통째로 드려야 함에도 나를 대신하는 그 무엇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 모양이라도 나를 제물로 바치기는 싫으니 나를 대신할 희생물이 필요한 것이지요.


흠 없는 어린 양에게 세상의 죄를 지게 하는 것,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신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1 요한 4:10) 하신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머리에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제단을 쌓고 자기 아들, 딸을 불에 사르는 사람들에게 언제 그런 일을 시켰냐고 (예레미야 7:31) 하셨던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으시길래, 그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셨단 말입니까?


자녀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들의 심정은 찢어지지요. 단순히 ‘불효막심한 ’ 차원이 아닙니다. 자식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 부모에게 당신의 딸, 또는 아들은 우리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왜 우리 아이여야 하지요?’라는 울부짖음을 듣게 되겠지요. 물론, 하느님은 하느님이니까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나요?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우리 입으로 우리 죄를 위해 자녀를 내어주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송구스럽지 않습니까?


마치 고난에 대해 진리를 꿰고 있는 양, ‘하느님께서 당신의 고난에 어떤 뜻을 두고 계십니다’ 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결국 고난 속에서 발견되는 의미를 찾아내야하는 사람은 고난을 겪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대속론이라는 교리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자식을 죽이는 냉혈한으로, 예수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거기에 철저히 복종하는 애초부터 이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 취급을 당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보다는 믿음을 통한 개인의 영혼구원에 집착할 수 밖에요. 모든 고난은 하느님이 내리신 불가피한 것이니, 고난을 만들어낸, 억압과 폭력의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모든 고난은 예수만 지고 가면 되니까요.


이사야 50장에 그려진 야훼의 종은 당당합니다. ‘나를 걸어 송사하는 자들이나, 나를 그르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법정으로 가자, 겨루어 보자’고 합니다.


당당해도 될 야훼의 종, 예수는 결국 처형을 당합니다. 패배와 고난, 모욕과 추함을 상징하는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그 모욕을 함께 감당해줄만 했던 사람들은 곁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죄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통해 사람답게 존중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 대신 여전히 사회에서는 손가락질 받았던 여성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의 행렬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가 누구인지, 적어도 그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라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도 있었지만, 주변 분위기에 들떠서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정작 ‘근데 이 사람이 누군가요?’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평생을 ‘근데.. 그 사람이 누구더라?’하면서, 정작 자신 또한 보지 못한 채 다른 희생양만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죽어야 하고, 변해야 하는 사람은 내 자신인데, 애꿎은 다른 사람 탓만 하는 꼴입니다. 내 자신이 이 시대의 아킬레스건을 끊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옆구리만 쿡쿡 찍다가 정작 내 이웃이 목숨을 잃게 되면,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갔다고 울면서, 뒤돌아서는 ‘내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꼴입니다.


[오늘도 눈물 짓고 있는 갈릴래아를 향해]


종려주일 하늘뜻 펴기를 준비하다 보니, 2006년도 종려주일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순절 기간 주말마다 평택 대추리의 대추 초등학교에 있었던 천막교회에서 심야 기도회를 하고 마을회관에서 잠자고, 이른 아침 새벽성찬을 하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대추리 수로파괴 작전이 강행되던 날, 조헌정 목사님이 연행되는 사람들을 막아서다가 경찰에 연행되셨지요. 조 목사님은 그 해 종려주일을 유치장에서 보내셨습니다.


“맞으면 너희도 대응해 …그래그래 잘 한다… 머리 쪽으로 하지 말고 아래쪽을 향하란 말야”

"밀고 들어가 밀고 들어가 박살내버려, 박살내"

"작대기로 쳐! 방패로 쳐!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어이 시위대 돌아가 이제 돌아가 여러분 팰 병력도 없어"


그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기 앉아계신 분들 중에, 그날 현장에 함께 계셨던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2005년도 710 평화대행진 때, 우리는 하루 종일 그 소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지난 주일 ‘기억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마음의 빚이요, 우리의 눈물로 남아 있는 대추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지요. 파주 무건리, 제주 강정마을로요.

꼭 같은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대추리 때만큼 몸은 물론이요, 맘도 함께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평화나눔공동체 통일에서 매월 한번씩은 무건리 촛불집회에 참석하기로 하고, 그 다짐을 매월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종종 제 마음이 무거울 때는, 가만히 심연으로부터 울려나오는 하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주일 오후 3시에 열리게 될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 연대 집회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추리에 대한 기억을 마음의 빚으로 간직하고 계신 분들, 오늘날도 로마 제국처럼 국제질서와 정의 속에 감추어진 ‘폭력성’과 ‘오만’을 드러내는 미군기지 확장의 현장을 아직 접해보지 못한 분들은, 다음 주일 오후, 함께 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날 같은 시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어둠을 빛으로, 생명을 살리는 부활절 연합 예배’도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용산 참사 현장에 촛불 방송국도 개국을 했던데, 멀리까지 움직이기 힘드신 분들은 부활절 연합 예배에 참석하시거나 촛불 방송국 방문을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예수를 살기위해]


우리의 신앙은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막연한 허상을 쫓아 내 이웃의 고난은 물론이요, 예수의 고난조차,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거룩’의 참 의미는 바로 공감과 연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엑기스를 다 빨고, 이용할 만큼 다 이용했을 때, 그리고 그런 자기의 밑바닥이 드러날 때 쯤, 새로운 먹이 사냥 하듯 미끼를 던지고, 가면을 쓴 채 다가가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약이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변화는 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밑바닥이 잊혀질 시간을 벌다가, 상대는 다 기억을 하는데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가서는 비겁한 사람들이지요.

이런 기회주의자 같은 사람들의 특기는 ‘무임승차’입니다.


죽음을 딛고 선 예수의 부활사건에 기회주의자 같이, 비겁한 사람처럼, 무임승차 하지 맙시다.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과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 무기력해 집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내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일정한 법칙과 리듬이 생기고, 의무감과 형식만이 남게 됩니다. 흐르는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면 자리를 독점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표상인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으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는 앞길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면 안됩니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서 푯대를 향해서 묵묵히 나아가면 됩니다.


유월절의 두 행렬, 빌라도의 행렬과 예수의 행렬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무차별적인 제국주의와 평화, 치유, 그리고 전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대비일 뿐만 아니라,
교권 강화에 골몰해 있느라, 자기중심적인 것에 빠져있는 이기적인 종교냐? 아니면, 참 사람 예수를 따라 억눌린 것을 풀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공감, 연민, 치유의 종교이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곧 무너져버릴 대열에 설 것이냐? 아니면 하찮게 보이고,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여도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대열에 설 것이냐? 라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초라한 행렬의 주인공인 예수, 그 자신은 그때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까지 ‘예수 운동’, ‘예수 따르기’, 아니 예수를 따라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예수 그 자체를 살자’ 라는 예수살기 운동까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우리는 좌절과 상실감에 빠져있고, 대결 구도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와와’ 소리 지르면서도 틈만 나면 ‘근데 이분이 누구지?’ 하면서 어리버리 살고 있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두려워말고,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 그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을 찾아 떠나는 한 주간의 여정이 되길 빕니다.


혹, 그곳으로 향하는 지도가 필요하시다면, 예배 후, 2층에서 한 장짜리로 되어 있는 고난주간 묵상집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간 우리가 묵상해야 할 주제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100부만 준비했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 오늘의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만날 각오가 되어 있는 분들만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혹, 매일 묵상하는 것이 버거우신 분이 계시다면, 고난 주간 중에 드려질 목요촛불예배 또는 오늘날의 14처를 묵상하게 될 성 금요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절인 다음 주일, 그 해답을 갖고 만납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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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오늘도 예수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함께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기 전에는

‘사랑한다’ 말 하지 마십시오.


성문 안에서 썩어가는 고인 물이 되기보다는

성문 밖으로 나가, 온 몸으로 예수를 증언하십시오.


예수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당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