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어린이/어버이주일

샤바트(Shabat) 창 1:26-2:4 엡 6:1-4

 

저의 3개월 안식월 기간동안 교우 여러분께서는 임보라 한문덕 두 목사님의 하늘뜻펴기에 매우 만족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다른 어떤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듣는 것보다 두 분의 하늘뜻펴기에서 더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2주전 부활주일에 예배가 끝나 인사를 나눌 때에 한 권사님께서는 두 분의 목사님을 가리키시면서 저에게 매우 위협적인 인물들이라고 뼈있는 농담 한마디를 하시기에, 저야 사라지는 사람이고 저 분들은 떠오르는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래 제가 없는 동안에 여러분의 염려와는 정반대로 예배 참석 인원도 더 늘었지 않았나 생각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그간 부목사님들의 하늘뜻펴기 참여는 전임목사님들의 예를 좇아 분기별로 한번 정도했는데, 앞으로는 월 1회는 부목사님들이 담당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아멘하세요!)

 

오늘은 가정의 달이라고 일컫는 5월 첫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첫 주일은 어린이주일로 두 번째 주일은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다음 주는 향린공동체가 평화현장예배를 갖는 주일이어서 오늘을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로 함께 지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은 제가 안식의 기간을 보내고 향린강단에 돌아온 첫 주일이기도 하여 두 주제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안식과 안식일]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은 샤바트입니다. 오늘의 본문 창세기 2장 2절에서 하느님께서 6일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이렛날에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쉬셨다’는 동사가 바로 히브리어로 발음하면 샤바트(shabat)가 되고, 이 샤바트라는 동사에서 안식일을 뜻하는 사바트(sabbath)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을 지킵니다. 다른 날을 지킬뿐더러 하루에 대한 시간의 개념이 다릅니다. 성서에서 하루는 해가 기준이 아닌 달을 기준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중동의 사막지역에서 해가 내리쬐는 낮은 너무 뜨거워 인간이 활동할 수 없는 휴면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달이 뜨는 밤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 활동하기 적당한 시간입니다. 그래 중동의 유목민들은 달의 뜨고 짐을 하루의 기준으로 정했고 성서에서 말하는 하루의 시작은 우리가 말하는 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중동의 국가들이 초생달을 국기에 그려 넣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래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금요일 달이 뜨는 시간으로부터 토요일 달이 지는 시간까지로 지킵니다. 안식교나 여호와 증인교와 같은 특수교단에서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하고 토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하여 안식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이란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번역입니다. 안식은 보통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편히 쉰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래 죽음의 세계를 안식의 세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안식(安息)은 한자어로 편안할 안에 숨쉴 식이니까 편하게 숨을 쉬는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편하게 숨을 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기도, 요가, 선(禪)에 있어 가장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은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는 의식하는 가운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말합니다. 숨을 내쉬고 들어 마시는 일은 우리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쉬운 일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래 가장 작은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숨 날숨을 알아챈다는 말은 곧 자기를 돌아본다는 말이고 자신의 작은 생각까지도 성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은 안식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참된 안식 이해가 있습니다. 안식은 일의 반대가 아니라,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 놓고 자기 자신을 바라다보는 곧 깨달음의 표현입니다.

 

[안식과 일]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안식과 일을 반대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면 하지 말아야 되는 일들을 법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곡식을 털어서도 안 되고, 일정한 거리 이상을 걸어 다녀서도 안 되었습니다. 사실 출애굽기의 안식일 규정을 보면 이 말씀은 맞습니다. 잠깐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할 것이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출 31장 12-16절)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다 경험을 하셨지만, 제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흔히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에는 일체의 오락행위나 상업행위를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 텔레비전을 키지도 않았고,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빗자루를 들어 마당을 청소하는 일도 금하는 교단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깨트리셨습니다. 물론 무작정 깨트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 법이 무조건 틀렸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였습니다.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 사람이 안식일 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1성서의 율법의 규정들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가 상주하던 시대에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규정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건 노예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규범이었습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약자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보호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 법을 제정하게 된 이런 사회배경을 빼버리고 일해서는 안 된다는 문자에만 매어 달리게 되면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일이 아닌가를 구분해야 하는 세세한 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안식일 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을 613개 항목이나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해 처음 시작했던 안식일법이 후에는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는 악법으로 둔갑하고 만 것입니다.

 

손으로 뭔가를 비벼서는 아니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고 고파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 뭔가를 들고 다니면 안 되는데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그가 누워 자던 자리를 들고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고픈 배를 채우고 힘을 내어 좋은 일을 하고 병으로부터 고침 받아 건강해진 몸으로 평화를 만드는 일이 안식일의 세세한 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법 조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20년 전 이스라엘을 갔을 때에 한 정통파 유대인이 타고 가던 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나사를 돌려 타이어를 바꿔야 되는데, 안식일에는 뭔가를 돌리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래 지나가던 우리 목사 일행이 대신 그 일을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호텔들의 엘리베이터들은 안식일에는 모든 층에 서도록 자동조절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뭔가를 누르는 일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뭔가 잘못된 법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는 절대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고 하시며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짓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 말을 사람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사람은 하느님 곧 창조주 야훼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처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했던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창조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원한다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타락과 방종이지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과는 그 개념이 다릅니다. 오늘날 ‘일’이란 단어는 돈을 버는 행위와 관련지어 말합니다. 예전 농사나 사냥 혹은 고기를 잡는 1차 산업시대에 일한다는 말은 자연으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때는 자연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서로서로가 힘을 합쳤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2차 3차 산업시대에서 일하러간다는 말은 자신의 노동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농경시대에 일은 즐거운 행위였지만, 현대에서 일이란 의미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되어, 흔히 말하기를 ‘누가 일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안식]

 

그래 하느님께서 6일간 일하시고 7일째에 쉬셨다는 말을 오늘의 상황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와 같이 하느님께서 6일간 일하시고 나서 피곤하셔서 쉬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쉬셨다는 말은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쉬신다고 해서 세상이 쉬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인 해와 달과 별과 짐승과 물고기와 나무와 풀도 함께 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쉬셨다는 말은 피조물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 평화의 마음을 말합니다. 열 다섯살 딸 아이가 파티에 참석하고 자정까지 들어오겠다고 하고 나갔습니다. 어떤 부모는 딸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합니다. 들어온 후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꼬치꼬치 캐어묻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는 그가 약속대로 12시에 들어오고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편안히 잠자리에 듭니다. 바빌론을 비롯한 이방의 신들은 인간을 믿지 못하여 쉬지 못하고 이것저것 간섭합니다. 작은 항목까지 법으로 규정하여 간섭합니다. 반면 야훼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어 모든 것을 맡기고 이를 평화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 하느님께서 7일째 쉬셨고 그래 우리 인간들 또한 7일째에는 쉬여야 한다는 말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쉴 때, 일에서 떨어져 그 일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쉬면서 왜 하느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는지? 왜 하느님은 이 세계를 우리 인간의 손에 맡기셨는지? 그리고 하느님은 왜 인간을 짝으로 태어나게 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 쉰다고 하는 것은 역사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역사 창조를 향한 자유와 번영의 길을 말합니다. 전 사실 교회로부터 3개월간 안식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이중 2개월을 네팔에 있었고,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간을 수천미터의 히말라야의 산들 사이를 계속 걸어 다녔습니다. 하루 열 시간 가까이 산들을 계속 오르내렸습니다. 육신적으로 힘들었고 위험천만한 순간들도 자주 있었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의지로 극복해야 했으며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히말라야의 산들을 걸어 다녔던 시기는 40일 수난절 시기였습니다. 자연스레 저는 예수님께서는 40일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저 뒤에 있는 그림과 같이 한 곳에 조용히 않아 침묵가운데 묵상하시는 모습이 주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번 트레킹을 통해 저는 예수님께서도 계속 걸으시면서 기도하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인도를 다녀가셨다는 전설이 있는데, 저는 히말라야를 다녀가셨을 것이라는 추측을 넘은 확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본래 저의 3개월 계획은 미국으로 가서 약간의 공동체 생활을 경험한 후 모교인 뉴욕 유니온신학대학과 하바드신학대학을 방문하여 현대신학의 흐름들을 공부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책과 강의 곧 이론과 논리를 통한 이성적인 신 이해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게 거대한 산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태고의 신비를 품어내는 빙하와 설산 그리고 광야 사이 속에서 약간은 원시적인 자연인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시계가 필요 없었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따라 삶의 양식이 결정되었습니다. 사람보다는 새와 작은 동물들과 더 많이 부닥치며 수백 년 전부터 누군가가 걸어온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말이 필요 없었고 영어 약간 하는 짐꾼 한명과 다녔으니 기본적인 말 외에는 할 수도 없었습니다. 현대 문명과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시간이었습니다. 설령 부모님 한분이 돌아가신다 해도 연락할 길이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의 완전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의 현존과 영생과 부활의 의미를 더 깊이 체험하는 영성의 시간이었습니다. 논리와 머리가 아닌 몸과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침묵]

 

그래 저는 안식의 첫 번째 행위는 곧 말을 놓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고 그래서 말쟁이입니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란 말은 얼마나 말을 잘 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 트레킹을 하는 한달 내내 생각한 물음 하나는 말하지 않고 하늘뜻펴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은 없는가? 말하지 않고 목사의 일을 할 수는 없는가? 였습니다. 사랑은 눈으로 말한다는데, 그냥 눈으로 사랑의 하느님을 알게 하는 방식은 없을까? 석가모니가 연꽃을 하나 들자 제자 마하가섭이 빙긋이 염하시중의 미소를 띠우는 그것으로 하늘뜻펴기는 끝났다는데, 그런 방식은 없을까?

 

예수님도 항상 말로만 하늘뜻을 전했을까? 저 새를 보라, 저 백합화를 보라. 그냥 손가락으로만 하시지 않았을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삶을 글로 남기려다 보니까 언어의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예수님의 삶이 글로만 제한될 수는 없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예수님은 항상 당시의 언어의 제한 속에 갇힌 종교와 하느님 인식을 깨트리신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 또한 이 언어의 형식과 제한을 뛰어넘는 다른 방식이 생겨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여전히 신교 교회는 논리와 언어에 의존한 설교라는 형식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2년 전 아프카니스탄에 갔던 우리나라 선교팀원들이 인질로 붙잡히고 두 명이 살해되던 그날 저는 예고 없이 25분을 침묵으로 하늘뜻펴기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날 조목사는 무엇을 한거냐?는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몇 명의 ‘가섭’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제가 지냈던 3개월의 깨달음은 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주간은 가족과 함께 보냈습니다. 80세가 넘으신 연로하신 부모님을 만나 함께 잠을 자고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여행을 하며 삶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버이날과 어머니날]

 

오늘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동시에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보통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놀이공원 한번 가는 것으로 지나치고 마는데, 이는 이 날을 시작한 방정환선생님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헌장에 보면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새끼들만 잘 먹이고 즐겁게 하는 날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노력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5월 8일은 원래 어머니날로 오랫동안 지켜오고 있었는데, 박정희유신정권 시절, 위에서 누가 시켰는지(사실 그때는 육영수여사가 살해당해 없었으니 청와대의 어머니날은 쓸쓸했겠지요.) 아니면,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던 질투 많은 아버지 관료 몇 명이 숙덕숙덕거려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어버이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도 아버지이지만,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매우 유감인 사람입니다. 자식을 향한 헌신과 사랑에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를 결코 동일하게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원숭이를 실험해보면 아주 분명해지지요. 어머니와 새끼 원숭이를 철판이 깔린 우리에 가둬 놓고 밑에서 불을 가열해서 철판이 점점 뜨거워지면, 어머니 원숭이는 철판 위에 드러누워 자식들을 자기 배 위에 올려놓아 자식들을 보호하지만, 아버지 원숭이는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들만 한번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끼리 얘기이지만, 정말 말하기 창피합니다. 그래도 살겠다고 자식들을 밟고 올라섭니다. 그리고는 늙어서 효도는 더 받으려고 하지요. 원숭이가 그런다고 우리 인간들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의는 할 수 있겠지만, 하여간 우리 아버지들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아버지들도 사회에 나가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 나갑니다. 그러나 정말 자식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것은 아닙니까? 아버지로서의 의무감 혹은 위신과 체면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닌가요? 진정 뜨거운 철판 위에서 누워 자기 배에 자식을 올려놓는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을 같이 하려는 어버이날은 반드시 어머니날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제의적 역할]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전적으로 못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결코 어머니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버지란 무엇인가?](이은정 옮김 르네상스)라는 책에서 심리분석학자 루이지 조야(이탈리야 출신으로 뉴욕 심리상담가)는 아버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좋은 시절이건 궂은 시절이건 이런 아버지들은 말없이 인류의 역사를 구성하는 주요한 힘이 되어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역사의 당나귀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아버지의 실종을 사회적 병폐로 규정하고 그 원인은 현대사회의 불완전성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감소됐기 때문으로 결론 내리는데, 그는 이는 오류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자식이나 부인의 관점이 아닌 아버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부성의 몰락은 아직까지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진행 중이며 남성들에게 닥친 불행은 사회 전체에 깊은 혼란을 주게 될 것이고 이는 현대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부성의 퇴보로 생기는 아버지의 숫자가 감소하는 것은 어머니가 채워줄 수 있지만, 자식을 축복해주고 가정을 지키는 ’제의적인’ 역할은 문화 속에서 스스로 지켜왔던 아버지만이 할 수 있다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하는 ‘제의적인 역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가까이에서 세세하게 자녀들의 일상사를 사랑과 헌신으로 돌본다면 아버지는 그 밖에서 보다 크게 저들의 인생관을 이끌어주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제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에 진정 아버지됨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실 어린이날이니 어버이날이 국가의 공휴일로 제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평소에 어린이들이나 어버이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나 어버이들이 제대로 보호를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은 일종의 인륜의 근본이요 행복의 원천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가 점점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 위주, 능력 우선주의의 사회가 되면서 젊고 똑똑하고 힘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요즘은 4,50대의 갖는 사회적 중압감이 엄청 큽니다. 이를 가정이 해소해 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다 직장에 나가고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가정 안에서 가족들이 함께 갖는 작은 시간마저도 TV와 컴퓨터 인터넷 MP3 휴대폰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단지 5월의 하루 이틀을 기념일로 지킨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1년 365일이 가정의 날로 될 수 있도록 가족 스스로가 몇 가지 규칙을 정하고 가정이 사랑의 샘터로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늙음에 대한 자부]

 

그리고 끝으로 우리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지만, 요즘 사람들은 늙는다는 것을 일종의 창피한 것으로 여겨 화장품이나 의학의 도움으로 젊어지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라는 말은 사용해도 괜찮지만, 늙은이라는 말은 웬지 사람을 비하하는 느낌이 들어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가 네팔에서 돌아온 직후 한 주간동안 설악산과 동해안을 다녀왔습니다. 동강에 가니까 3시간짜리 아주 좋은 트레킹 코스가 있더군요. 제 앞에 40대 중반의 산악인 4명이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레킹에는 이력이 생겨서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올라갔습니다. 조금 올라가니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니 저 늙은이는 저렇게 빨리 가는데 우리는 뭐야’ 사실 56세에 그런 얘기 듣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젊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부르듯이 하얀 수염 난 사람을 늙은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는가요? 젊은이는 젊은이들만이 갖는 생기발랄함이 있다면, 늙은이는 늙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왜 늙은이가 젊은이들을 시기하여 젊어지려고 억지로 꾸밉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일에 말려들지 마세요.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돈 안드는 노후 준비 7원칙]을 펴낸 김창기끼는 ‘벌기도 힘들고 벌었다 하더라도 이를 지키기도 힘든 환경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은퇴 이후 삶을 바라보는 자세’라며 평균수명이 100세에 이르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평생 현역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노후자금으로 몇 억원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상류층을 대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금융회사의 얄팍한 상술이라고 혹평합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들 가운데는 이 공포에 휩싸여 안절부절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실제 노후자금으로 몇 억씩 들지는 않으며 노후는 산책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은퇴 후 10년 정도 살다 삶을 마감하던 때에는 쉬면서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은퇴하고도 3,40년을 더 살게 된 지금은 여가 생활만으로는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래서 행복한 노후 건강한 노후를 위해서 실천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말합니다. 1원칙은 ‘평생 현역’이고 2원칙은 ‘평생경제’입니다. 젊어서 돈을 벌기 위해 일했다면 은퇴 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행복해지는 일을 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70세가 넘은 노인들도 톨게이트 징수원이라든가, 지하철 안내원으로 일하는 것을 쉽게 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그 풍토가 바뀌어야 합니다. 네팔 포카라에서 새벽 호수 길을 걷다가 70세의 한 태권도 사범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 그저 하는 일이라곤 친구들하고 술 마시며 잡담하는 일 외에는 없어 무작정 이곳에 왔다고 하면서 할 수 있으면 조그마한 장소라도 빌려 아이들에게 태권도라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다니며 호숫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한 달째 줍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요! 우리나라는 나이가 들어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는 당장 고쳐야 할 일입니다. 젊어서 장관을 했던 대학 총장을 했던 늙어서도 건강이 허락되면 설사 쓰레기를 줍는 일도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진정 선진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3번째 4번째 원칙은 ‘평생 건강’ ‘평생 젊음’인데 그가 말하는 젊음은 마음이 주는 것이지, 육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생 공부’와 ‘평생마음 개발’입니다. 지난 2월부터 우리 교회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계발하기 위하여 ‘그날’이라는 월례모임을 만든 일은 너무나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3번 모였는데, 교회게시판에 실린 글과 사진을 보면서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이분들이 향린의 진짜 젊은이로 교회활동을 주도해 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생은 후반전부터라는 마음으로 ‘다시 날기 위해’ ‘다날’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냅시다.

 

[늙음의 특권]

 

성서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는데, 백발의 늙은이들만이 갖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사실 늙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성공이라는 미래의 꿈에 지배를 받기에 자유하고자 해도 자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고 있는 짐 가운데 일부는 분명히 그대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짐은 그대가 직접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제 늙음에 이르러 그 거짓된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유는 늙음에 이르러 얻을 수 있는 멋진 열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는 것은 육체의 쇠퇴가 아니라 영혼의 수확입니다. 이를 위해 늙었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십시오. 자신의 실수나 아픔을 파헤치지 마십시오. 현대 심리학은 그것을 파헤치고 분석하고 그래서 상처를 더 깊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몰랐던 일이라면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일이라면 다시금 상처를 되살려 자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욕망을 내려놓고 더욱 순수해지시기 바랍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자주 분노가 일고 조그마한 일에도 고집스러워 지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세요. 이제는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대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존재를 놓친다면 단 한 번의 생을 여행하는 그대에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늙은이들이여! 그대는 자신들이 느끼는 만큼 젊습니다. 마음은 아직도 20대에요. 그런데 몸이 말은 안 들어요. 그렇습니다. 몸은 그냥 흘러가도록 두세요.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여러분의 마음이 20대이면 그대는 20대의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여러분의 영혼이 그 젊음의 열기를 느낀다면 그대 안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젊음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부르든 세상이 뭐라고 얘기하든 여러분은 영혼의 젊은이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영원과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