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56주년 창립기념/29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 주일

공동체와 영성

(출 18장 17-24절, 고전 12장 22-26절)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은 여러분 아시는대로 2주후 가평에서 진행할 전교인수련회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와 맞춰 하늘뜻펴기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수련회 준비위원회의 요청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아마 이 주제로 하늘뜻펴기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저희 교회가 맞이하는 56주년 창립기념주일인데, 바로 향린교회가 출발하게 된 신앙적 화두 또한 ‘공동체와 영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화두는 바로 저로 하여금 목사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그리고 오늘까지 목회를 하게 만드는 중심 화두이기도 합니다. 아마 중학교 3학년 아니면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입니다. 사실 그 때까지 내가 장래 직업란에 목사라고 쓴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는 가운데 내 스스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강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그래 당시 친구 10명이 모여 클럽을 만들었는데, 자주 하는 얘기가 후에 커서 사회가 나가면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하늘나라에 먼저 간 친구도 있고, 지방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 아프리카에 흩어져 살기에 얼굴 한번 보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 만나면 아직도 이런 얘기를 나누곤 합니다. 저는 지금도 개인으로 뿐만 아니라 향린교회라는 틀 안에서 공동체의 삶에 대한 꿈을 갖고 있고 이번에 수련회를 기점으로 시작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남들이 하는 얘기만 듣다가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눔과 기도]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요즘말로 하면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2장 42절)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2장 44-46절) 이 구절 안에 교회의 사명 혹은 교회의 본질이 다 담겨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행한 일은 서로 도와주며 빵의 나눔과 기도생활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눔과 기도’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초대공동체가 행한 가장 두드러진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의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들이 잡다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함께 했던 제자들이 행한 일을 미루어 볼 때, 가장 핵심적인 일은 나눔과 기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었다는 말은 곧 공동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나누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족도 아니고 성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심지어는 말도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내 것 네 것 구분하지 않고 서로 나누었다면 이건 엄청난 사건입니다. 혁명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로는 고린토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토라는 도시는 동서양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이 성행하고 여러 나라와 도시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였습니다. 자연히 교회 또한 출신과 배경이 전혀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안에 분파가 생겼습니다. 1장 서두에 보면 몇 명되지도 않는 교인들이 나는 바울로파다. 아폴로파다. 베드로파다. 그리스도파다 중도파다 하며 세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야 부활과 제사 음식과 방언 등에 대한 신앙 이해 때문이었지만, 실은 세속의 판단으로 배우지 못하고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차별과 독선이 앞섰던 것이지요. 그래 바울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구성원들은 이 몸에 속한 각 지체이고, 그리고 몸의 지체들은 약한 지체를 보호하듯이 교회는 연약한 교인들을 먼저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얘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얘기를 우리는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이 얘기가 2천년 전 로마라는 군사제국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황제와 귀족과 시민과 노예계급이라는 다양한 계급이 상존하는, 이런 차별과 계급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다 같다고 주장하는 이 평등보편주의는 엄청난 혁명적 사고입니다. 그래 우리는 흔히 바울로를 평할 때에 역사적 예수보다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주장함으로 예수의 진보성을 퇴보시킨 사람으로, 믿는 자들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차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옮긴 보수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로마에 복종하라고 말함으로 부당한 정권을 용인한 사람으로,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말함으로 성차별을 용인한 사람으로 비난하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사도 바울로 또한 엄청난 혁명가였습니다. 그래 오늘날 세계 좌파 정치철학의 거두인 조르조 아감벤이나 알렌 바디유 그리고 슬라보예 지첵과 같은 대석학들이 사도 바울로의 이 평등보편 사상을 자신들의 정치철학의 한 기조로 삼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향린의 창립정신]

 

향린교회는 작지만 처음부터 주목받는 교회로 시작을 했습니다. 12명의 교인들이 지금은 중국대사관으로 변한 남산의 한 가옥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냥 한 주일에 한번 만나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흩어지는 교회가 아닌 마치 수도원과 같이 일주일 내내 새벽부터 자정까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고 먹는 생활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들의 직업에 보다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가정을 가져 독립하게 되고 마침내 교회를 옮기면서 이 생활신앙공동체는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만, 생활신앙공동체라는 향린교회의 창립정신은 우리가 이 땅에 존속하는 한 계속 품고 나아가야 할 신앙의 큰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세상이 구별되는 한 축이 있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이해입니다. 세상은 부모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눈 사람들만이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 정의 평화 생명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형제와 자매들이라는 확대된 가족개념을 갖고 살아갑니다. 생물학적인 피의 DNA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라는 신앙의 DNA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먹을 빵을 함께 나누는 베품과 나눔의 일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예수께서 원하는 일이니 해야 하겠다고 의지로 되는 것만도 아니고,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내오 놓는 이 희생과 헌신은 결코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처음 한두번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되려면 하늘의 부름을 느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공동체 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감동을 계속 지켜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나에 앞서 먼저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나의 아픔에 앞서 타인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아픈 데 어떻게 남의 아픔에 관심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지만, 이건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아픔에 관심하면 그 아픔이 나아지기 보다는 점점 더 상처가 깊어갑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남의 아픔에 관심하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아픔이 치유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신앙인들이 갖는 영성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영성이란 단어는 너무나 흔하게 쓰이고 있고 실은 너무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에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고를 할 때 전인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영과 육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한 사고이지만, 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육을 반대개념으로 놓고 말합니다. 육이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이라면, 영은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육이 이 땅의 것 유한을 말한다면 영은 하늘과 영원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성이라는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화두는 경제입니다. 뉴스의 초점이 되어 있는 것은 부동산과 환율과 실업률입니다. 돈이 우리 관심의 전부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돈을 추구하는 것은 돈이 있으면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그 물건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따지고 보면 행복하기 위함이지요. 물론 아인슈타인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기쁨이나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이것들을 ‘돼지 사육의 이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인들의 경우는 행복을 얻기 위해 일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을 얻기 위해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행복해지기 보다는 돈 때문에 더욱 불행해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에서]

 

행복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는 것이고 그래 마음이 풍성해져서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인도에 혼자 살면서 행복해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행복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얼마 전 제주도 해녀 할머니를 그린 TV 기록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80세 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이 해녀할머니는 물질에서 행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 깨달음의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런 깨달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건 스스로를 끊임없는 경쟁과 욕망의 포로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젊어서 왕창 벌어라. 그리하여 늙어 자유함을 얻어라. 이거야 말로 순전한 사기입니다. 그건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산꼭대기에 올려놓고자 애쓰는 시지프스와 다름이 없습니다. 바위가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 이 바위는 다시금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이는 단순히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허무의 형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수많은 군상들. 그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바위를 밀어 올려 정상으로 갖고 갑니다. 그러나 정상에 다다른 순간 그는 자기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을 발견합니다. 소유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우리는 오늘의 시지프스가 되고 맙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돈을 위해 일하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불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억수가 쏟아져도 잘못 놓인 그릇에는 물이 담길 수 없고, 가랑비가 내려도 제대로 놓인 주발에는 물이 고인다.” 여러분 특히 젊은이들에게 자주 말씀드리지만, 인생은 첫 단추를 잘 꿰야 합니다. 행복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일 이전에, 행동 이전에 자신과 이웃과 세계를 향한 마음과 태도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능력과 학력, 배경이 성공의 잣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 곧 영성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자신의 현 존재의 충만한 상태를 일컫는 것이며,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타락 이전의 상태 곧 하느님과 함께 에덴동산을 산책하는 그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가장 최고의 영성은 예수를 닮고 하느님을 닮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하느님을 닮다니요?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하느님이 어찌 우리 인간의 닮음의 대상이 될 수 있나요? 목사님! 이는 심각한 신성모독이요 현대판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이라고 항의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철 신부님의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숫자에 밝지 못해도

어려운 공식을 외우지 못해도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외국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해도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인류의 시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몰라도

색깔 다른 콩 두 개가

어떤 모양의 콩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어도

아름드리 나무를 안아보고

놀랄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도

조각칼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해도

하늘의 구름이 무슨 모양인지

상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룰 수 있는 악기가 하나 없어도

새와 함께 휘파람을 불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돈 세는 것이 서툴고,

물정에 어수룩해도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줄 서기를 잘 못해서

매번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럴싸한 말로 다른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해도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믿는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글쓰기를 조금 못해도

책읽기가 조금 서툴어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뜻을 물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기보다

용서해줄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반대하는' 특기를 갖기보다

'찬성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나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서로 믿어주고,

서로 희망이 되어주고

서로 사랑할 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을 닮았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임직과 은혜]

 

오늘 우리는 향린교회 56주년을 기념하며 두 분의 장로를 안수하여 임직하는 일과 6분의 권사 임직 그리고 각각 한분씩의 원로장로 추대식과 명예권사 추대식을 갖습니다. 우리가 이 창립기념주일에 이러한 일꾼을 세우는 이유는 56년전 이 교회가 시작했던 그 꿈을 계속 이어가고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장로 권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집사님들을 세우려고 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목사님, 나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사실 오늘 장로임직을 받으시는 두 분이나 권사 임직을 받으시는 여섯 분 중에 어느 한분도 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실제 거절의 의사를 밝혀 오신 분들입니다. 사실 그럴 때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누가 자격이 있나요? 저는 목사의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저 또한 목사 안수를 받게 될 때, 너무나 고민했고, 임직식에서 거의 통곡하다시피 울었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지금 하느님 앞에 예배하러 나왔는데, 자격이 있어 나오신 분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지난 한주간도 우리가 행동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되나요? 아니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죄를 지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얼마나 많은 음행의 죄를 짓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토록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판사의 재량에 따라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판사는 감방에 집어넣어할 사람을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까? 그건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죄인이야’ 라고 판결하면 우리는 평생 죄의 값을 치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회개의 눈물만 흘리다 생을 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과거의 죄에 붙잡혀서 그 자리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시기에 무죄라고 의인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은 자격이 있어 받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의 일을 위해 은혜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향린 공동체가 부름 받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위해 누군가가 나서서 일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냥 하라면 잘 안하니까, 기분이 나면 며칠 일하다가 힘들다고 집어 치우니까 직분을 주어 그 책임을 맡기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가 잘 되면 그 놈의 목사가 혼자 영예를 다 독차지하고, 잘못되면 별 잘못도 없는 집사 장로들이 욕을 먹는다 하더라도 교회의 일을 내 일로 알고 하는 것입니다. 내 의견하고 맞지 않아도 그게 공동체를 위하는 일이라면 하는 것이고 힘들어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름이고 그게 소명입니다. 다름과 버거움이 나의 기쁨이 되도록 더욱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힘이 옵니다. 오늘 직분을 받으시는 분들은 영예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영예는 그 당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은 그걸 인정한 교우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항상 겸손해질 수 있고, 자신의 부름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서양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직분을 붙여 부르지는 않는데, 우리는 유교사상 때문에 이름 뒤에 직분과 직책이 붙기에 이게 실은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니 집사 권사 장로를 회사의 과장 부장 이사와 같은 직급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거야 말로 잘못입니다.

 

인사동에 가면 115년 역사의 승동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초대장로는 박성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이지만, 짐승을 죽여 피를 내고 가죽을 벗기는 사람들은 가장 천한 사람으로 멸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정이라는 사람들 또한 이렇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승동교회의 초대장로가 된 박성춘씨는 백정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장로로 시무하고 나서 3년 후에는 이재형씨라는 분이 장로가 되었는데, 이분은 왕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의 아들 혹은 대재벌의 아들과 무학의 넝마주의 출신 두 사람이 함께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속과 다른 진정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같은 시절 전라북도 김제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두정마을에 조두삼이라고 하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한 소년이 와서 먹여만 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하여 마부로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조두삼씨가 선교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 마부로 일하는 머슴 이자익과 함께 세례를 받고 자신의 사랑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매주 선교사가 올수 없어 자신을 대신하여 하늘뜻을 전하는 조사를 세웠는데, 그는 주인 조두삼씨가 아닌 머슴 이자익씨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두삼씨는 이를 매우 기뻐하면서 머슴이 전하는 하늘뜻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게 되어 장로 한명을 뽑게 되어 교인투표를 했는데, 조두삼씨는 떨어지고 이자익씨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염려와는 달리 조두삼씨는 이를 기뻐하면서 그를 장로로 섬겼고, 이해에 크게 헌금하여 교회를 지었는데, 그 교회가 바로 전라북도 문화재 136호로 지정되어 있는 ‘ㄱ’자 형태로 된 금산교회입니다. 남녀가 서로 보지 못하도록 만든 건물 형태입니다.

 

후에 조두삼씨도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장로와 더불어 함께 교회를 섬겼는데, 그는 이자익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되게 하여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초청하여 그를 섬겼습니다. 머슴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을 뿐더러 이후 장로교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한 이자익씨는 참으로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자신의 마부이자 머슴이 전하는 하늘뜻펴기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후에 그와 함께 장로가 되어 같은 교회를 섬길뿐더러 그를 공부하도록 후원하고 담임목사로 초청하여 이를 섬긴 이자익씨의 인물됨 또한 참으로 위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개인의 영성에서 공동체/사회 영성으로]

 

영성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하고 병을 낫게 하고 모든 일에 초연하여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영성이 아닙니다. 영성이란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신이 자신을 비워 낮아지고 낮아져 인간의 몸을 입어 가축의 우리에서 태어나시어 소외받고 한 맺힌 사람들을 찾아 나서 너희들이야 말로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주역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은 단지 개인의 영역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개혁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말할 때,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고 우리끼리 사랑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공동체를 말하고 기독교 영성을 말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56년 전 향린교회는 수백 수천 년을 한 자매형제로 살아왔던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의 허수아비가 되어 서로 죽이고 죽는 어리석은 전쟁을 3년 동안이나 하던 그 때에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민족과 민중의 아픔에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으로는 56주년 창립기념주일을 지키지만, 밖으로는 29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지킵니다. 오늘 오후에는 경상도, 전라도에 위치한 10여개의 예수살기 교회들이 광주민주화 운동 국립묘역에 함께 모여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전두환군사정권의 폭압으로 인해 최소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지금도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이 구타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과 신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그곳에 모인 예배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기도문을 통해 우리 또한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29년 전 광주에서 울려 퍼진 피울음 소리를 기억하며, 그 역사의 비극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이곳에 모였습니다. 권력의 욕망 때문에 무고한 생명을 처참하게 학살하는 비극, 흉측한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선량한 사람들의 눈과 귀, 입을 틀어막는 무모함을 기억하고 이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골고다 죽음의 언덕이 부활의 언덕으로 뒤바뀌었듯이 그 역사의 비극이 희망의 표징으로 뒤바뀐 사실 또한 기억합니다. 권력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고 온몸으로 그 자유와 해방을 누렸던 민중들의 환희를 기억합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자유와 해방이며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주적 삶의 이정표입니다. 1980년 5월 광주. 주먹 밥 한 덩이만으로도 모두가 배불렀고 물 한 모금만으로도 목마름을 풀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우리를 지켜준 것은 분노와 총칼이 아니었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아픔으로 눈물지었지만 그 눈물로 하나 되었고 상처로 고통스러워했지만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짐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그것은 진정으로 죽음을 딛고 일어선 부활의 언덕이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그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입니다. 오늘 전국에서 모인 작은 교회들이 그 희망의 불꽃을 한 데 모아 마음을 다집니다. 우리의 교회가 역사의 비극에 눈 돌리고 두려움으로 체념하게 만드는 권력과 자본에 순응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성장과 풍요의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 물신의 흉계를 넘어서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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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회가 정의와 평화, 신뢰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데 하나 되게 하여 주시고, 그 하나 됨으로 이 세상의 희망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517 광주연합예배문에서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곳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잠시 머물러 쉼을 얻은 곳일 뿐. 이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지상을 다녀가는 순례자입니다. 사랑이 여러분의 노래가 되고, 여러분의 삶이 거룩하고도 행복한 축제가 되게 하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친형제 친자매처럼 서로 따뜻이 사랑하고, 존경하며,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쉬지 않고 기도 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교회들과 교우들의 딱한 사정을 돌보아주고, 손님 대접하기를 지극정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서로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생각 을 버리고,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