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성령강림주일

하나 되어 세상 안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

창 11:1-9 ;행 1장 1-5, 2장 1-4절

 

[계속되는 민족사의 비극]

 

우리 모두는 어제 아침 노무현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의 소식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생무상 권력무상이라는 감상을 넘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짜릿하게 저며 옵니다. 왜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이러한 불운한 말로가 지속되어야 하는지 정말 괴롭습니다. 이승만씨는 삼선개헌을 하려다 419을 맞아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했고, 박정희씨는 삼선개헌을 넘어 영구집권을 꾀하다 부하로부터의 총격을 받아 죽었고, 전두환 노태우씨는 수천억원의 뇌물과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실형을 언도받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살아있지만 어떠한 공적 활동도 없어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김영삼씨는 아들의 지나친 정권개입으로 명예롭지 못한 대통령이 되었고 김대중씨만이 수많은 정치탄압에도 불구하고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평화적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아 영예로운 대통령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반공이념과 지역주의로 인해 인기가 덜하지만, 외국에서의 인기는 상당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명박정권의 반북퇴행정책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노벨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직전 대통령 노무현씨가 뇌물과 관련한 정치적 법적 혐의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였습니다. 돈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뇌물이라면 그 대가가 무엇인지 밝혀져야 하는데, 그런 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이 이상합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대 역사가들이 정당한 평가를 하겠지만, 인권변호사로 시작하여 5공 청문회의 스타를 거쳐 시대 시대마다 지역주의와 파당이라는 정치의 검은 물결을 거슬러 보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란 말도 생겼지요. 저 개인으로서는 국정 초기 국가보안법은 박물관에나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그 기회가 왔을 때에 이를 단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였고, 자주를 외쳤던 사람이 이라크파병을 하고 서민의 편에 서야 하는 사람이 한미 FTA를 주장할 때는 실망하기도 하였지만, 조중동의 보수언론을 정면에서 비판하면서 기득권과 권위에 안주하려는 검찰 안기부 사법부에 변화의 기운을 불어 넣고, 국정 전반에 걸쳐 진보적인 개혁을 추구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입니다. 아마 최근 고민하면서 내가 퇴임 후에 이런 공격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을 것을 하고 후회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한 인간으로 볼 때는 너무 솔직한 성품이 흠이라면 흠이었고 매우 서민적인 분이셨습니다. 유서의 내용 중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화장을 하여 집 가까이에 조그마한 비석 하나를 세워주라.’는 말은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정치인의 모습보다는 삶에 초연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목사로서 전진 대툥령의 죽음에 마음 깊이 조의를 표하면서 여기 촛불을 밝히고, 함께 잠시 묵년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성령과 삼위일체]

 

세계 교회가 정한 성령강림절은 다음 주일입니다만, 다음 주에는 저희 교회가 전교인수련회를 가기에 성찬식을 겸해 오늘 지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향린교회의 생일 곧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새로이 장로 권사님들을 임직하고 향린교회의 창립 정신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은 그 말 그대로 성령께서 강림한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이지만, 바로 이때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교회공동체가 시작하였습니다. 곧 교회의 생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함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우리 믿음의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알고 고백하고자 함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르는 중요한 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적도 없고 성서에 나오는 단어는 아닙니다만, 초대교회가 약 3,4백 년 동안 철학, 인문학을 비롯한 세상의 학문 그리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들과 부딪혀 오면서 정립한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서로 다른 세 분이지만, 결국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인데, 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엄청난 작업이 필요한 일입니다.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식은 조헌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 본질은 한 사람이지만, 사회에서는 주민등록번호 13자리로 대변되는 한 구성원이지만, 집에 가면 아버지나 남편이 되고 교회에 오면 목사로 불리는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리를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지금도 이 교리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파에서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주는 신앙고백이 바로 사도신조 혹은 사도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되는 사도신경은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세분 각각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주기도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글이고, 한국교회는 거의 대부분이 공예배시에 이를 암송합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는 이 사도신경 대신에 저희 교회가 만든 ‘향기로운 이웃’이라는 향린만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 저희 교회에 오신 어떤 분들은 사도신경이 예배순서에 없어 의아해하기도 합니다만, 저희 교회가 사도신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례예배와 같은 경우에는 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저 개인으로는 한국교회가 사도신경의 분명한 이해 없이 고백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이래 교회는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세상을 향해 여러 개의 신앙고백을 내어놓았습니다.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도신경 이전에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니케아신경도 있었고, 그 이후로도 웨스터민스터신경을 비롯한 여러 신앙고백들이 있습니다. 특히 저희 교회가 소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70년대 독재체제 하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선언한 희년신앙고백도 있고, 미국장로교와 같은 경우는 히틀러체제 하에서의 독일고백교회가 선언한 신앙고백을 채택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를 반영하여 남성 여성의 동등함과 지구생명체와 환경보호를 강조하는 새로운 신앙고백문도 채택하여 공예배시에 여러 개의 신경들을 돌아가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교회만이 천5백 년 전에 그 얼개가 형성 된 사도신경에 집착하고 있고 대부분의 목사님이나 교인들은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한 채 이를 구원의 암호마냥 집단적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일이고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부분입니다. 21세기 오늘의 시대에 사도신경의 문자들을 계속해서 고백해야 이유가 뭔지, 이를 오늘의 시대에 재해석해서 다르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전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통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옛 것의 반복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져 의미 전달이 되지 않을 때는 그 전통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로마 총독 본디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구절 외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구절만 갖고는 왜 로마 총독에게 고난을 받아야 했는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에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한국교회의 사도신경은 서구교회의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바,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하는 구절을 빼버렸습니다. 남한의 보수 신학자들이 ‘이 구절은 가톨릭의 연옥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이유로 뺐는데, 그렇다면 서구 교회는 이걸 인정해서 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성서무오설을 주장하고 전통과 교리를 중요시한다는 보수교회들도 자기 편리를 따라 뺐다 넣다 하는 것이 실제 모습이지요, 이 한 구절을 빼도 된다면 내재하는 부활을 믿는 실존 신학자들은 ‘하늘에 오르사’라는 구절이 마음에 안 들어 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한의 신교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학적으로 예배학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향기로운 이웃’이라는 신앙고백문은 세계에 자랑하고도 남을 위대한 고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오늘의 고백과 아울러 교회와 신도들의 선교적 사명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신학적 고백문이고 게다가 국악 가락과 음송을 함께 엮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겠지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신앙고백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또 다른 신앙 고백문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고 저는 이러한 작업을 계속하는 신앙고백위원회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여간 한국교회가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유일한 신경이 아니라는 것과 이는 본래 삼위일체 곧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한분이라는 신앙을 고백하고 강조할 필요가 있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예수와 성령]

 

4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성령을 모두 언급합니다. 우선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 세례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은 그냥 ‘성령’이라고 말한 반면에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라고 하여 ‘불’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였습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이 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불세례’라는 말을 사용하고 신앙은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소리를 치고 박수를 치며 방언과 치유를 강조하는 은사 운동을 합니다만,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복음서와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이 이 불을 생략한 것을 보면 ‘불’이라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는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복음서 어디에도 실제로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 장면도 없고 불을 내린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평화가 아닌 불을 던지로 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평화의 반대 곧 분쟁의 의미로 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불을 문자적으로 읽는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령과 함께 언급되는 불은 거짓된 것을 태우는 강력한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기록은 4개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여기서 성령의 모습이 비둘기 같다는 말은 성령의 실제 모습이 비둘기와 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비둘기는 하나의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곧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내려왔다는 말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의 명령이 예수님께 직접 내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명령 중 첫 번째가 광야기도였습니다. 그래 마태오 마르코 루가복음서에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펼치시는 과정 속에서는 몇 곳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악령을 쫓아내신 이야기는 나오지만,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성령 이야기가 다시금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부활의 이야기에서 등장합니다. 그것도 루가복음에 한번 나오고 주로 요한복음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예수가 떠나가면 성령께서 대신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광야기도를 마치신 다음부터는 성령은 곧 예수님과 따로 분리되는 존재가 아닌 하나로 계셨다가 예수께서 죽으실 때 그리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승천하시고 나서 예수의 몸은 하늘로 올라지고 그 대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남아 계셔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초대교회]

 

그래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 제자들의 활동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인데, 이 책에는 성령이란 단어가 수없이 등장하고 사도들은 다름 아닌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임을 말합니다. 그래 사도행전을 아예 성령행전이라고 바꾸어 말하기도 합니다. 1장 5절에는 “오래지 않아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이어 2장은 그 성령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임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 3대 절기 중의 하나로 유월절 이후 50일째가 되는 날을 말합니다.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때는 모든 유대인들이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박해가 있어 성전에서는 모이지 못하고 따로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120명 쯤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 휘-ㄱ-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혀 같은 것이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립니다. 혀의 갈라지는 모습은 하늘에서 불같은 것이 내려오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까지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여기서도 외국어라는 말은 손가락이지 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영어로 말을 하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미국사람한테는 한국어가 외국어가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외국어로 말을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여러 외국어를 말하는 예수 제자들에게 의해 각기 자기의 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얘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 민족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소통이 잘 안되던 각 민족들이 이제 하나가 되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모든 민족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벽돌을 빚어내는 등 문명이 발달하자 서로 의논하기를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한마디로 하느님과 맞먹어 보자 그런 것이지요. 그래 오만해진 인간을 보고 더 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은 민족 간의 말이 다르게 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이런 일만 하지 않으셨다면, 오늘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의 반은 줄어들었을 것이고, 영어마을과 같은 이상한 마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성서 기자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 국가라는 것들이 조금 힘이 생기면 피조물 본연의 자세를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맞먹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당시의 바빌론제국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운다면 그 수고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유대민족과 같이 포로로 끌려온 노예들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누가 만듭니까? 노예들과 힘없는 민중들이 끌려와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언어혼재의 성서 이야기는 인간 문명 발달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반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소민족과 힘없는 민중들을 짓밟는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한 하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어 혼재 이는 각 민족 간의 소통부재를 말하고 이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강림으로 인해 예수 제자들이 외국어를 말했다고 하는 의미는 소통의 역사를 말합니다. 민족끼리 화해하는 평화의 역사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저주 심판이 그치고 새로운 창조 곧 인류 평화의 구원 역사가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교회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은 모두 개인의 영역 그것도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고 말았지만, 처음 예수공동체가 받은 구원의 사명은 민족들 간의 화해와 세계 평화였습니다. 그래 성령으로 하나 된 그들은 자신들의 가진 것을 나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이 두려워 숨어 있던 그들이 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해외선교나 노방전도가 아닙니다. 세상 권력자들과 부딪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로 대변되는 베드로와 바울은 계속 핍박과 투옥을 당하면서 세속의 권력에 대항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은 바울로가 로마 권력에 의한 영어의 몸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아주 담대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31절)는 구절로 마쳐집니다.

 

여기에 우리가 1년에 한두 번 평화의 현장예배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예배는 매주 두 번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말씀과 기도가 중심이 된 예배요 다른 한번은 거리의 아픔의 현장에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는 예배입니다.

 

테레사수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지식 평화 진리 정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 집뿐만 아니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 모두 가난한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악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입니다.” 예수살기가 중심이 되어 매주 목요일 저녁 거리에서 현장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어 세상 안으로 아픔의 현장인 거리로 나아가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길]

 

지난 주 수요일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모임이 이 성전에서 있었습니다. 2009년 교회의 날 출범예배가 있었습니다. 5백 년 전 서구에서 시작한 교회개혁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교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래, 오늘날처럼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거대 교회들이 곳곳에 즐비하고, 새벽기도로 교통체증이 일어날 정도로 기도에 헌신하며, 수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있으며, 대통령을 위시하여 사회의 정관계의 주요 요직을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과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한 것인가?

잠잠히 눈을 감고 우리 안의 성령께 여쭈어라. 우릴 위해 몸이 찢기시고 피 흘려 죽으신 우리 주께서는, 제발 너희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달으라고 문을 두드리시며 울고 서 계신다.

오늘 한국 교회는 세상을 욕하면서도 가장 세속적이며, 기득권의 옹호자요 대변자요, 출세를 위한 유행이요, 기득권 자체가 되었다. 교회는 배고프고 없는 사람, 고통받고 핍박받는 사람, 아픈 사람, 슬픈 사람의 편이 아니며, 2000여 년 전 당신께서 함께 하셨던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다.(중략)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길을 찾는 일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죄인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피와 살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리스도, 불을 이 땅에 던지러 오신 그리스도, 그 날 것의 복음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피 묻은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희미하게라도 그 분 기도하겠습니다.의 얼굴을 더듬어 만지고, 그분의 거칠고 구멍 뚫린 손을 잡고 한걸음씩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렇게 그 분과 함께 성육신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가장 천하고 낮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조금 후에 진행할 성찬의 예식을 통해 피 묻은 예수의 얼굴을 만나고 거칠고 구멍 뚫린 손과 발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이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여러분 위에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 하늘의 명령을 듣고 세상 광야로 나아가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