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이사야 53, 1 - 9 ; 요한복음 19, 28 - 30


한 문 덕 목사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인 ‘케노시스(kenosis)’라는 말은 ‘비우다’ ‘힘을 박탈하다’라는 헬라어 ‘케노우(κενοω)’에서 나온 말로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신성 포기’, ‘자기 비움’을 나타냅니다.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은 필립비서 2장 6-7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신을 만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교 역사는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교리를 만들어내면서 예수를 로마제국의 태양신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갈수록 예수의 인성에 대한 강조는 약화되었고, 신성이 높여졌으며, 특히 “신의 수난불가능성” 즉 ‘신은 고난을 당할 수 없다’는 신학을 굳게 잡음으로써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부활과 영광의 신학 뒷켠으로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온 생명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던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승인받은 이후 그리스도교는 국가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도 이미 국가와 이렇게 저렇게 얽혀 있는 그리스도교였습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처음 전해진 구한말, 선교하는 쪽이나 새로운 종교를 접하는 쪽은 모두 자기 나름의 국가적 의식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선교사들은 국제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계획을 방해하지 않는 ‘정치적 중립’을 택했고, 수많은 조선 개화주의자들은 ‘최강의 문명국’인 구미열강에 대한 흠모를 배경에 깔고 개신교를 받아들입니다.

        자칭 문명인들이라고 하는 서구제국주의는 힘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화 해갔으며, 이렇게 힘과 결탁한 그리스도교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한국의 개신교는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부터 반공이라고 하는 국가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고속 성장을 하고 많은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했던 1960-80년대에 한국 개신교는 60년에 70만 정도이던 신도수가 80년에 600만, 1990년에는 약 800만에 이르는 성장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해체된 농촌 공동체를 대체해 이농 인구를 통합하면서 국가가 제공해 주지 못했던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여, 열악한 생활을 하는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만성적인 불안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던 것은 나름 긍정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비롯해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대다수의 교회들이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그 귀에 속삭였던 것은 교인들을 보수적인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면서 유신독재를 지지하고, 반공 담론을 대중화하는데 앞장섰던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나 조용기 목사, 또 감리교의 김홍도 목사와 같은 이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친미반공 성향을 가지게 된 대형교회 교인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기 보다는 교회에 잘 출석하는 것이 신실한 신앙의 증거라고 여기면서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정기적으로 헌금을 내고, 각종 대형행사에 동원되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교회로부터 배우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적인 이성의 발전을 가로막는 설교와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며 벌이는 목사의 횡포 속에서 많은 교인들은 한국사회의 보수화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1)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리던 서양의 중세가 예수를 신격화하면서 실제로는 교회가 제 마음대로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을 쥐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명박 정권 안에서의 교회들은 한국사회의 보수화의 한 측면을 담당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득권을 놓지 않는 그리스도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사법이 바로 부활과 영광의 하느님을 찬양하고 높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를 개혁하고 나온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을 다시 새롭게 주장하였고 오늘 저는 그 동안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가장 크게 왜곡되었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는 장 깔뱅의 말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인류의 종교적 욕망으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굴절되어서 읽혀 왔습니다. 사도신경만 해도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시자마자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우리의 죄를 없애는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지옥에 갈 것인데, 예수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었기에 우리는 예수만 믿으면 황금보화로 치장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고 또 맹목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나면 감사 찬양이 나올 만도 합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어서 지옥으로 갈 내가 천당에 가게 되었다니 이것을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논리는 허점투성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천국은 죽어야만 가는 곳인가요? 예수를 믿어서 천국 간다는 소리는 또 무엇인가요? 우리가 천국가기 위해서는 꼭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그것도 꼭 십자가 처형이어야 하는가? 다른 이를 살린다면서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내어 모는 아버지를 사랑의 신이라고 부를 수 있나? 내가 잘못했는데 왜 남이 죽나? 저의 아버지는 아직도 비그리스도인입니다만 언제인가 제1성서와 제2성서를 다 읽으시고 제게 두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공평한 하느님이 왜 야곱같이 비열한 인간을 축복하시는가? 그리고 교인들이 말하기를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고 하는데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어떻게 지금의 나의 죄를 씻어 줄 수 있는가? 태어나서 처음 우리 교회에 방문한 새교우가 이 같은 질문들을 여러분에게 한다면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스럽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죄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손목과 발에 못이 박히고 수직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죄수는 팔근육이 늘어나고 어깨는 탈골되며 계속 피와 물이 흘러 탈진됩니다. 숨이 가빠지고, 천천히 질식해서 짧게는 3일 길게는 한 달이 넘게 십자가에 달려 있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을 줄여주기 위해 창으로 찔러 죽음을 빨리 맞도록 해주는 것은 그나마 편의를 봐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죽고 난 뒤에도 까마귀와 들개들이 몰려와 시신을 먹기 때문에 장례조차 온전히 치루지 못하는 참으로 잔인하고도 치욕스런 형벌이었습니다.2) 그렇기 때문에 이 형벌은 강도, 살인, 방화, 탈영, 반역, 반란선동, 불경죄 등을 저지른 경우에 해당되었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로마시민이 아닌 노예에게만 한정되어서 집행된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죽음으로 그의 생애를 마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겠지만 죽음에 직면해서야 삶을 깨닫는 우리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는 당시의 최고 기득권을 지닌 성전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두개파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 자치기구와 로마 제국간의 정치적 협력 장소였습니다. 또한 성전은 로마의 감시체제 하에 있었고, 로마 황제와 로마인들을 위해 매일 희생 제사를 드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성전에 대한 비판적 행위는 사두개파인들이 이 범법자를 체포하여 그를 로마 총독에게 고발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예수의 공공연한 성전 비판에 직면하여 대제사장을 위시한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전에 근거한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질서가 예수에 의해 도전받고 있음을 느꼈고,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활동에서 그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예수는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저 화려한 천국을 떠올리고, 나 대신 죽은 예수를 찬양하기 전에, 죄 없는 이를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없애는 폭력이 특히 국가적 폭력이 왜 발생하는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였고, 그 폭력에 대듦으로써 희생을 자처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고한 이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폭력이 있다면 그 폭력의 진원지는 어디인지, 또 누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지 밝혀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구조라면 바꿔야 하고 또 사람이 그러하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가장 큰 충격에 빠진 이들은 그를 따르던 민중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예수와 똑같은 죽음의 위협 앞에 있었기에 혼비백산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졌지만 부활의 체험을 통해 예수의 죽음이 단순히 절망과 실패의 경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 자신들을 구원해주는 메시아라고 믿었던 예수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제일성서를 펴서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니다. 그 때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슬픈 마음을 수습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예수의 죽음을 되돌아보며 새롭게 발견한 구절은 바로 이사야 예언자의 고난당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였습니다.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고대 근동의 인신제의를 하느님 앞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겼고, 죄인 한 사람을 벌주기 위해 가족이나 후손까지 잡아 들여 처벌하는 연좌제를 죄악시했던 유대 종교전통에서 누군가를 대신해서 고통당하고 죽는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사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구조적 연결망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곧 예수의 죽음이 바로 자신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심지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일상에 스며든 잘못된 삶의 방식이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을 형성한 구조적 죄악이 아무런 잘못 없는 이의 희생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 사회의 밑바탕에는 폭력이 깔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폭력이 인간의 모방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데, 모방욕망이란 남이 하는 대로 자기도 따라하고 남이 가진 만큼 자신도 갖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하는 대로 하고 남이 갖고자 하는 대로 자신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따라서 자신은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없는 것 같은데 타인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대상을 향하는 두 욕망은 서로에게 방해물이 되기에 두 욕망은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면서 갈등을 야기시킵니다. 이러한 갈등이 결국 폭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 현장에 있는 학생과 학부모, 지금 취업준비에 몰두해 있는 88만원 세대들이 가진 불안의 심리구조를 살펴보면 지라르의 이런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자기는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합니다. 죽어라고 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무한경쟁의 소굴로 바뀌어 갑니다. 모든 폭력은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 발생하기에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 바로 그 집단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체포와 수난, 죽음 이야기를 쓰는 이들은 예수에게 환호했던 자들이 도리어 그를 죽이라고 소리쳤고,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던 이들이 그 나라를 만들려고 애썼던 장본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선동자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을 기억했고, 바로 자신들이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향린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이 사회에 대하여 예언자적 소명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불의를 행하고 있는 정부와 기득권자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일이고, 기득권자들에게 빌붙어 침묵으로 그들의 악에 동조하는 이들보다, 또 바쁜 자기의 삶을 핑계대면서 이웃의 고통을 회피하는 이들보다, 또한 “정치하는 것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이들보다는 훨씬 잘하는 일입니다.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옆에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단 것이 예수를 축복의 통로라고 선전하면서 목걸이 장식품으로나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이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보면서 제자들은 폭력의 진원지가 자신들이었음을, 바로 우리가 죄 없는 예수를 못 박았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정치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다른 차원에서 정확하게 짚어야겠지만 참으로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던, 박노자 교수의 말로 하자면 ‘폼을 잡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을 보내면서 우리 또한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말 ‘상부’의 명령을 받아 저인망수사를 벌인 검찰만의 잘못인가? 민주공화국을 내세우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극소수의 재벌기업과 부동산 부자 등 기껏해야 5퍼센트가 될까 말까하는 특권층의 사익을 보장해 주는 폭력기구에 지나지 않게 된 것에 우리들의 잘못은 정말 없는가?

        단국대 김평호 교수는 “대한민국은 공부 중, MB가 고맙고 또 고맙구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조문을 표했다면, 또 지금도 그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 중의 절반, 아니 절반의 절반에 해당하는 우리들이 조·중·동을 끊어버리고 좋은 신문을 읽는다면, 삼성제품과 서비스 대신에 다른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작든 크든 힘닿는 대로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의 건강한 시민·사회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후원한다면, 에버랜드에 놀러가는 대신에 올 여름에는 아이들과 함께 역사 체험으로 봉하마을에 간다면, 공정무역, 공정거래와 같이 착한 기업과 윤리적 생산자들의 물건을 찾아 착한 소비를 한다면, 단체들은 또 단체들대로 서로서로의 연대를 넓혀간다면, 또 이외에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생활정치의 항목을 실천한다면, 그리고 혼자보다는 여럿이 한다면, 거대한 장벽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고 2009년의 정치 학습은 이미 긍정적인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김평호 교수의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또는 잘 몰라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6월 25일 기독교 사회 포럼에 강사로 나오신 김수행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현재의 세계공황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면서 이 공황을 극복하고 모두가 살기 좋은 복지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서민적인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발 투표 좀 하라”고 경제학자가 정치 이야기를 한참 하셨습니다. 당장 투표해서 정권을 바꿀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 투표를 하려고 해도 누구하나 믿고 찍어줄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박노자 교수는 “이명박만 없어지면 우리가 과연 행복해질까”라는 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물러난다고 하여도 도둑은 풀어주고 정직한 사람은 잡아들이는 양식 없는 사법부, 학벌을 내세워 새로운 계급사회를 조장하는 대학업자들, 종교를 팔아 주류 권력에 편입한 종교기득권자들,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아주지 않는 썩은 노조 간부들이 남아 있다면 이 사회는 여전히 희망이 없는 사회로 남아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3)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자신의 문제들을 성찰하게 된 제자들처럼 이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우리들의 일상과 연관되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김평호 교수가 일상적 삶의 정치를 말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생명과 평화의 나라를 이루도록 먼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우리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 지 깨닫고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향린교회의 교인처럼 교양이 있고, 주체적 의식이 있는 사람들도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금방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민주적 소통에 미숙한지 드러나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책임지는 모습이 민주시민이 갖춰야할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지만 향린교회의 다양한 선교와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보면 장로님들과 몇 분을 제외하고 스스로 나서는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의 한 단면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양보하는 일에서는 더더욱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매년 각부 부장이나 교사나 성가대원 등을 모집할 때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어떤 길이 있는지 찾고 도전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향린교회가 선교에 상당한 힘을 쏟는 만큼 그런 선교 역량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교육방송의 다큐프라임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아이의 사생활 Ⅱ’라는 제목으로 청소년들의 민감한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주제들은 사춘기의 아이들과 어떻게 성에 관한 대화를 할 것인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일상의 삶으로 돌릴 것인가? 형제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어떻게 풀 것인가? 등이었습니다.

        현대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고 기성세대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그러니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세대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지만 또 그들에게 배울 필요도 있기에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향린교회 교우들 중에서 자신의 자녀와 손자 손녀와 성에 관한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계시는지요? 한참 사춘기인 중학교 딸이 남자친구와 깊이 사귀고 있다면 그 딸을 불러서 무슨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저의 어머니는 고등학생인 제게 지나가는 말로 ‘허리 위는 괜찮지만 허리 아래는 안 된다.’라는 단 한번으로 모든 성교육을 끝내셨고, 저의 할머니는 가끔 저를 불러서 남자는 입과 주먹과 거시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보다 더 잘 하실 수 있는지요? 또는 컴퓨터만 보이면 앉아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평범한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자신을 절제하면서 생활하는 아이들로 만들 수 있는 부모님들은 계신지요? 저희 이전 세대는 성 문제라든지 인터넷 게임 문화와 같은 것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로 해 줄게 없기도 하지요. 그럼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혹시 자녀들과 진정한 삶에 대해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삶의 의미와 복음의 정신에 대해서, 향린교회가 가진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분들이 계시는지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부모님들이 많이 계실 때 우리의 대사회적 선교활동이 안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고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어린이/청소년들이 함께 여름수련회를 떠납니다. 매번 수련회 때마다 노심초사하는 교육부 교역자들과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일주일에 몇 십 만원하는 영어캠프에는 보내도 몇 만원 내지 않는 교회 수련회는 보내기를 주저하는 부모님들과 학생들의 모습이 다른 교회와 다르지 않게 우리교회에서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눈치를 보면서 신앙교육은 뒷전으로 보내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명과 평화를 가르치는 수련회에는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느님마저 침묵하셨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랑 때문에 자신을 죽음의 형틀에 내어놓는 새로운 신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신, 자발적으로 치욕을 당하는 고난의 메시아,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오히려 지배체제를 뒤흔드는 변화의 바람으로 다가오는 이를 기억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꿉니다. 즉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된 예수처럼 이들도 자신을 비워 하느님 나라 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작은 예수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예수의 제자들로서 어떤 행동으로 일상의 변화를 가져오시는지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여러분이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에 순종하신다면 물질을 덜어 더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입니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는 말씀을 굳게 믿으신다면 세상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은 세상 사람들이 갖도록 다 주고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내게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신다면 오늘 시대에 소외되고 무력한 이들을 품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옳게 여기신다면 비록 그 길이 험하고 찾는 사람이 적더라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새 시대의 술을 담기 위해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헌 부대는 버리셔야 합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이 향린교회에 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각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생명에 관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먹고 먹히는 것으로써 유지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했다면 나 또한 누군가의 먹이가 될 때 온 생명은 조화롭고 건강하게 됩니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나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암처럼 결국 온몸을 망치고 자기 또한 죽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향린교회에서 여러분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 시간 되짚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적당한 인간관계 속에서 위로와 평안을 누리고 향린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서 자기만족에만 머물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자기만족은 어렵더라도 자신을 드려 새로운 생명을 낳으려는 것인지.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그리스도교의 신처럼 우리 또한 우리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끔은 손해 볼 줄도 알게 하고, 생명의 길이라면 좁은 길을 택하도록 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내어 놓는 마음도 길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두 마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목마르다”이고 하나는 “이제 다 이루었다”입니다. “목마르다”는 죽기 직전의 말씀이며, 또 하나는 죽는 순간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도 여전히 “목마르다”라고 외치신 것은 아직 남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 그것 하나가 남아 있기에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목말라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기까지는 목마름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그 순간 목마름은 그치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그리스도인됨을 이루십니까? 또 무엇으로 향린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하십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양하겠지만 그 모두는 아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케노시스로 완성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늘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으로

세상의 모든 찌든 때를 날려 버리십시오.

평화의 사도가 되어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