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살다간 작은 예수들(4) 김교신(1)

조와(弔蛙)

열상 19:9-18; 요한 16:25-33

 

고려대학의 서양사학 교수였던 고 김성식교수는 30년 전 당시의 정치인들을 향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유행가가 있다. 이것을 본따서 다음과 같은 가사도 지을 만하다. ‘생각이 같아야 친구지 얼굴만 안다고 친구냐?’ ‘연구를 해야 교수지 감투만 썼다고 교수냐?’ ‘사시가 있어야 신문이지 보도만 한다고 신문이냐?’ ‘정신이 있어야 법이지 조문만 있다고 법이냐?’ ‘대화가 있어야 국회지 날치기 처리가 국회냐?’ ‘존경을 받아야 대통령이지 당선만 되었다고 대통령이냐?’ 한이 없다. 이런 식의 말을 만들자면 말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한 마디만 더 말해 보겠다. ‘자세가 발라야 정치가지 권력만 잡았다고 정치가냐?’

그렇다. 미인은 마음씨가 고와야 되고 친구는 생각이 서로 같아야 되는 것같이 정치가는 우선 자세가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자세라는 말은 비단 정치가에 있어서만 아니라 학생, 교수, 경제인, 종교인 할 것이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심지어 역사에서 소외되어 있는 농부도 그 하는 일에 자세가 발라야 되는 법이다.

오로지 여기서 정치가의 자세가 문제로 되어 있는 이유는 정치가의 자세가 바르고 그릇됨에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중이 정치를 못하는 독재자의 세상에 있어서 말이다. ‘자세가 발라야 정치가지, 권력만 잡았다고 정치가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가사를 음미해 보자. 정치가는 우선 자세가 발라야 한다. 자세가 바르다는 것은 정치적 식견이나 역량에만 관계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의 마음씨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씨만 바르다면 자세가 그릇될 수 없고 자세가 바르다면 나쁜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설사 인간이기에 그릇된 정치도 있을 수 있을 것이나 그때는 국민의 동정어린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에만 치중한 나머지 어떠한 수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정치가로서의 귀중한 자세를 망쳐 버리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와 민족도 타락하게 마련이다. 한때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할 수 있는 눈에 띄는 건설만 하다가 학생들의 혁명에 쫓겨나고 최후의 비극을 당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국민을 위하는 마음씨보다는 자기의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쇼를 피웠기 때문이었다. 정치가로의 자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중략) <갇혀있던 양심 묶여있던 진실> 제3기획 1987. 251쪽

 

좋은 글이란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인간의 양심을 흔들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데, 박정희독재에 몸으로 글로 항거하신 고 김성식교수의 글은 그런 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읽어드린 글이 30년 전 여당 정치인들의 부정, 탈법, 불법, 독재를 지적한 글이었는데, 오늘도 여전히 단어 하나 바꿀 필요 없다는 점에서 제 마음은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 심지어는 밥솥도 나날이 변하여가건만, 왜 국민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국회의 정치는 3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변함이 없는가?

 

[역사의 반복 희극인가? 비극인가?]

 

40년 전에도 여당은 모두가 단잠을 자는 새벽 2시 30분에 야당 몰래 별관에 가서 3선 개헌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고 뒷문으로 도망치듯이 나올 때에 사진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자 마치 현장에서 들킨 도둑놈처럼 모두가 하나같이 얼굴을 가렸던 적이 있습니다. 엊그제 한나라당이 통과시킨 법은 말이 좋아 언론법이요 미디어법이지 실은 MB 정권이 보수 재벌언론과 한패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장악함으로 정권을 영구화하려는 독재악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 정치나 역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문화나 경제수준이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너무나 지엽적이고 편파적이고 집단 이기적이고 사대주의적인데다, 반공 이념에 철저하게 포로가 되어 있어 유아적 틀에 머물러 있거늘, 이제는 더욱 한심해질 것을 생각하니 참담한 심정뿐입니다. 이번 일을 저지르고 찬성한 부류들은 흔히 북한 정권을 공격할 때에 일당 독재와 통제언론을 들먹거리는데, 바로 그 일을 따라가겠다는 것이지요. 그런 악법을 무력으로 통과시킨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법의 기본인 일사부재의 원칙도 무시하고 대리투표를 하는 등 불법 탈법 부정으로 이루어졌으니 만약 정부가 이를 법으로 시행하고 강행한다면 나라의 질서와 법을 바로 세우고 국민의 언론자유권 사수를 위해 정권타도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맑스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하지요. ‘역사상 중요한 사실은 두 번 일어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그래 국회에서 벌어진 난투극을 두고 외신들이 남한의 국회가 레슬링 경기장으로 변한 모습을 방영하며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국무장관인 힐러리가 북한을 두고 도대체가 초등학교라도 제대로 나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저질스런 표현을 하고 있는데도 이에 전혀 분노할 줄 모르는 남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 몸에 머리가 둘 달린 기형아가 있어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도 다른 쪽 머리가 전혀 반응하지 않는 죽음의 몸이 되었는데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으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고,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남한 사회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말기 암 증상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납니다. 6개월이 넘어 장례도 치루지 못하는 용산참사가 그러하고 쌍용차노사 대결이 그러합니다. 상생의 길이 있건만, 친 재벌인 정부는 노조를 끝까지 힘으로 굴복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물론 최루액투하와 살수로 국민들의 저항의 힘을 잠시 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위에 기초한 독재 권력은 결코 오래가는 법이 없습니다. 히틀러도 루이16세도 쇼와천왕도 박정희도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들의 말로는 모두 처참한 죽음과 불명예로 끝났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MB 정권 지금은 전투경찰을 앞세운 명박산성으로 버티지만, 결코 오래갈 수는 없습니다.

 

[역사 인물 하늘뜻펴기]

 

저는 이러한 사회 부조리와 민족분열의 위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을 안고 올 1월초 이 땅을 살다간 선배들의 믿음과 삶을 되새겨 보는 하늘뜻펴기를 시작했습니다. 500년을 이어 내려온 조선의 역사를 총칼로 중단시키고 조선반도의 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엽전으로 비하하고 전 국민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넣어가는 일제의 불행한 역사를 살아가면서 성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선반도와 같이 외세에 끊임없이 휘둘렸던 피식민지 유대 땅에서 갈릴리 민중의 한사람으로 태어나 서른 살 남짓의 피 끓는 젊음의 정열로 로마제국의 힘의 논리에 대항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한 인물이 이제는 도리어 제국들을 떠받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여 다시금 식민지 조선의 땅에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고 구원의 메시야로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서구 특히 미국 일변도로 변해버린 남한 교회의 자기 뿌리를 찾는 토착화 운동이자 자본과 물질 그리고 욕망이 지배하는 오늘의 성공주의 시대에서 자유케 하는 진리를 찾아가는 역사적 예수신앙의 회복운동이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로 조롱당하기 시작한지 어언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러한 남한 교회 비판은 이제는 단지 네티즌 젊은이들의 단순한 욕지거리로 그치지 않고 사회 저변 밑바닥을 흐르는 도도한 흐름으로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MB정권과 대형교회의 일체화는 정치의 종교화인지 종교의 정치화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어 MB 정권의 부정과 타락은 곧 개신교회의 부정과 타락으로 받아들여지고, 교회의 부패는 곧 MB 정권의 부패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 저는 최근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한국인 신학도가 독일의 교회사 교수를 만나 ‘중세 교회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하자,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이 ‘중세 교회사를 공부하려면 지금 남한의 대형교회들을 연구하면 되지 꼭 이곳에서 와서 독일어로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이 말 한마디 속에 오늘 남한 사회와 교회의 타락의 현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 세속 정치권력과 부자와 재벌을 선호하다 못해 스스로 재벌의 자리에 까지 올라간 대형교회 목사들은 1년 반 전에는 MB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제하여 버리겠다는 악담을 하더니 이번에는 MB 미디어법을 하느님의 법으로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제는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 정신으로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자부하는 미국인들이 실은 전 세계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여 약소민족끼리의 전쟁을 도모하는 악마와 같은 제국에 살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듯이, 우리 또한 장로대통령과 대형교회 목사들이 저지르는 반 하느님, 반 예수, 반 성령의 작태를 행하고 있음을 스스로는 알아챌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이념이라는 덫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교회=신의 무덤?]

 

제가 공부하던 7, 80년대에는 기독교 선교사의 유래가 없는 성공 사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남한교회가 이제는 신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미 통계로 보더라도 남한 교회의 감소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고, 이를 눈치 챈 여러 교회들-여기에는 향린공동체 교회들도 포함-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지만, 그건 바로 코앞에 다가온 태풍의 거센 바람 앞에서 이를 피해보려는 잠자리의 어설픈 몸짓에 불과합니다. 배가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그건 시간문제일 따름이지, 다시 되돌릴 수 없듯이 남한 교회의 몰락과 침체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30년 이내에 지금의 절반 아니 어쩌면 3분지 1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단순히 수적인 몰락으로 그치질 않고,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새로움을 꿈꾸는 젊은이들로부터 마치 불결한 곤충을 보듯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물론 남한 기독교의 문제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몰지각한 행동과 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신자들의 문제이지 기독교 전체의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무익한 변명일 따름입니다. 이미 키엘케고르와 니체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유럽 교회의 몰락을 예언하고 이를 비판하였지만, 결국 유럽 교회는 몰락의 시간을 보내왔고, 지금도 침체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당시에도 소수의 깨어있는 교회들은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구멍 난 여객선을 고무보트 몇 개로 지탱해내지 못할 따름입니다.

 

기원 전 600년 전 다윗왕국의 영광을 꿈꾸며 살아가던 유다 왕국에 신흥 제국 바빌론의 침공이 분명함에도 당시의 제사장들은 그럴 일은 없다. 야훼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거짓을 말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였지만, 그러나 그건 객관성과 역사성을 상실한 자기 몰입에 의한 환상적 판단이었을 따름입니다. 근본주의 신앙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의 종교적 의를 주장하는 것과 역사의 진행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이때 예레미야 예언자는 장밋빛 미래를 말하며 희망의 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을 거짓 예언자라 비판하며 하느님의 징벌과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이미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렘 1:13) 그래 그는 제사장은 물론이요 왕과 백성들로부터도 미움을 받아 수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몰락과 민족의 유배만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몰락 이후에 오는 회복을 예언했고 그래 참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믿기로 지금은 예레미야가 보는 바와 같은 남한 개신교의 몰락을 알아채고 이를 순순하게 받는 혜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다음 세대로 하여금 그 이후를 준비하도록 하는 신앙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를 비롯한 여러 어르신네들 다수는 몰락과 침체를 경험해야 할 유배의 제일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잘라진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아날 것입니다. 복역의 기간이 끝나면 회복의 세대가 올 것입니다. 이는 운명(運命)에 대한 단순한 순응(順應)이 아닌 이를 넘어서서 새로움을 준비하고 도전하는 역명(逆命)과 혁명(革命)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향린교회의 부름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제가 오늘 남한 교회의 어쩔 수 없는 몰락을 예견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늘도 예수 신앙을 노래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명령으로 무덤 속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아오는 신앙의 역설과 반전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무덤 속에 들어가는 죽음이 먼저 있다고 하는 이치를 얘기할 따름입니다.

 

金敎臣(1901-1945)과 孫基禎 (1912∼2002)

 

1936년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을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만, 그를 길러내신 분이 김교신선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금메달을 딸 당시 손기정님은 양정고보 학생이었고 김교신선생은 지리교사로 그의 담임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자전거를 타며 손기정선수를 훈련시켰고, 동경 예선까지 쫓아가서 그를 코치했었습니다. 동경 예선 마지막 코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기력을 잃고 쓰러질듯 하였을 때에 김교신선생이 “기정아, 기정아 힘을 내라. 조선을 생각하라”고 외쳐 힘을 북돋웠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올림픽의 꽃은 행사 마지막에 진행되는 마라톤입니다. 유럽 지배를 꿈꾸고 있던 히틀러는 독일의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내고자 마라톤에서만은 반드시 1등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1등은 게르만인은커녕 백인도 아닌 동양인 손기정선수가 차지했고 그것도 세계 기록을 5분이나 단축했을 뿐더러 게다가 3위까지 또 한명의 조선인 남승룡선수가 차지하였으니 이는 게르만족은 물론이고 서양인의 콧대를 꽉 꺾었던 엄청난 쾌거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손기정선수와 남승룡선수의 가슴팍에는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 그들은 월계관이 씌어지는 순간에도 환하게 웃지 못하고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승 후 손기정님이 친구에게 보낸 국제엽서에는 그냥 ‘슬푸다!!?’라는 세 글자만 썼던 것입니다. 손기정님은 다른 외국선수들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하면 항상 코리아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아일보의 한 체육부 기자 이길용님에 의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손기정님은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승의 성공은 작전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그 정신이란 바로 김교신선생으로부터 배운 민족정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김교신선생은 지리 선생으로 학과의 절반은 학문에 절반은 민족정신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신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으로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당시는 담임을 맡으면 중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계속하여 담임을 하였기에 그 영향력은 상당하였습니다. 그래 손기정님은 스승을 추모하며 “나는 지금까지 선생님만큼 크시고 참다우신 교육자 그리고 애국을 여러 면에서 스스로 실천하신 분은 본 일이 없다. 참으로 선생님은 크신 분이었다.”(<김교신> 김정환저 21쪽) 물론, 손기정님 외에도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김교신선생은 20세기가 문을 여는 1901년 4월 18일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농업학교와 동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하던 중 20세가 되던 해인 1920년 4월 동경의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반년정도 하던 중, 교회 분규가 일어 목사 축출소동이 일어나자 교회출석을 단념하고, 그때부터 일본의 무교회 기독교인인 우찌무라 간조오의 문하에 들어가 7년 동안 성서강의에 참여합니다. 이때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중 우찌무라 문하의 조선 유학생 6인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동인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게 됩니다. 이때 6인 가운데 한분이 함석헌선생이었습니다.

 

여기서 무교회란 말은 교회를 무시한다든가 혹은 교회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신도들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정신을 참 교회로 보는 그래서 교회나 혹은 교단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서조선(聖書朝鮮)>은 40쪽 전후의 월간지로 1927년 7월부터 시작하여 약 3년간은 동인지로 발간되었지만, 1930년 5월호부터는 사정에 의해 김교신이 주필로서 책임 편집하는 개인잡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12년간 이 잡지는 일제의 혹독한 검열을 견디며 계속 발간되다가, 1942년 3월 158호의 권두언인 弔蛙(조와-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가 문제가 되어 폐간이 되었습니다. 이 때를 노려 일경은 전국 수백 명의 독자와 동지들을 검거하였고, 그중 김교신과 함석헌 유달영 송두영 등 13명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서조선사건>이며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한글학회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은 본질상 같은 언론탄압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성서조선의 창간호와 폐간호의 머리말 일부분을 현대어 번역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조선 창간사, 1927年 7月]

과연 학문적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으로는 온 세상이 가슴 속에 있었다. 이상을 실현해 보자는 나의 앞길은 양양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들리는 한 소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 말이 또 있으랴? 이 뜻을 깨우치니 모든 것이 헛되었다. 또한 이 헛됨을 이해하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드디어 눈빛은 빛났고 그 초점은 하나로 명확해졌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그 어떤 무엇’ 을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꾀할까? 오직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요즈음 우리 동포들 사이에 평소의 사상과 취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자기를 굽히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우리가 함께 기뻐할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효성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우리 같은 불효자들이야 두말해서 무엇 하랴? 상황이 기적을 행하는가 보다.

다만 아무리 같은 사랑이라도 그 표현의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에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구약 성서’ 한 권이라고.

그리하여 같이 모여 걱정하고 같은 소망을 가진 어리석은 친구 대여섯 명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마을(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마다 모여서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 온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 누군가가 그 동안 스스로 연구했던 것의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할 것을 제의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좋은지 나쁜지, 그 시기가 적절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소원하기는 이를 통해서 뜨거운 사랑의 순정을 전하려는 것이며, 정성을 다한 선물을 그녀에게 드리려는 것이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를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기성 신도를 위한 교회 잡지가 아닌, 조선혼을 가진 조선사람을 위해, 산골의 한 나무꾼을 위해 발행한다는 숭고한 정신 속에서 창간된 것이 <성서조선>이었고, 이는 후에 함석헌선생에 의한 <씨알의 소리>, 김재준목사에 의한 <제3일> 그리고 안병무선생에 의한 <야성>과 <현존>이라는 잡지에 그 정신이 이어지게 됩니다. (씨알의 소리에서 '알'은 아래 아로 표기되어야 합니다.) 

 

평소 김교신선생은 새벽 4시면 일어나 북한산 뒷산에 올라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조와(弔蛙) - 1942년 3월 폐간호]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다. 층층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연못 속에서 솟아나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마련해 준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다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연못 속에서 바위의 색깔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 속에 큰일이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새로 온 손님에게 접근하는 친구 개구리들. 때로는 5,6 마리, 때로는 7,8마리.

늦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더니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날로 날로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연못의 투명함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소식이 막힌 지 무릇 수개월 남짓!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 찾아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세 마리가 연못 꼬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연못의 적은 물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현대어 번역 www.biblekorea.net)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이 문구 한마디가 일경의 신경을 건드린 것입니다.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선지자는 이세벨 왕후가 자객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자 야훼의 산 호렙산으로 도망을 가서 죽기를 자청하며 이런 넋두리를 합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이때 야훼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바위를 쪼개는 큰 바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였고,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과도 함께 하지 않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한 소리로 함께 했습니다. 귀 기울지 아니하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여린 소리로 들려졌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 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한 명도 없다는 엘리야의 호소에 대해 7천명이나 있다고 하는 이 선언은 독재자가 총칼을 아무리 휘두른다 해도 여전히 하느님의 역사는 도도히 흘러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곧 민중이 주인이 되는 해방과 구원의 역사는 기어코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고 하는 하늘의 선언이었습니다.

 

15년간 지속되던 <성서조선>이 폐간되던 1942년 4월은 일본군국주의 침략 전쟁이 가장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이보다 6개월 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 가미가제 편대는 미국 하와이의 주력 해군을 선제공격합니다. 물론 아직도 수백 대의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수 시간에 걸쳐서 날아온 그 전시 상황을 어떻게 몰랐는지 왜 그날 일요일 아침 레이다 기지의 책임자는 미상의 비행기 수백 대가 날아온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지만, 하여간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조선반도의 힘께 나 쓰는 남자는 모조리 징병과 징용으로 얼굴께나 빠진 여자는 공장으로 정신대로 몰아가던 암흑의 시대였으니 성서조선의 독자들을 족치는 일쯤이야 그게 무슨 대수였겠습니까? 독립의 씨앗이란 씨앗은 모조리 찾아내어 이를 뿌리에서부터 박멸하던 식민지 탄압의 절정 기였던 것입니다. 일경은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라는 희망의 단초를 자르고자 김교신 함석헌선생을 비롯한 <성서조선>에 관련했던 주요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교신선생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년간의 옥살이를 하고 나서도 전국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에까지 다니며 신앙동지들을 규합하고 전도생활을 하면서 그날 곧 일본 패방의 날이 다가왔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징용으로 끌려간 5천명의 노무자들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복지와 교육을 위해 그곳에서 노무자로 함께 일하다가 1년이 못되어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해방을 넉 달 앞두고 말입니다.

 

[평신도 김교신]

 

그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사요 평신도였습니다. 저는 김교신선생과 향린교회 창립 선배님들과의 개인적인 교분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성서조선을 통한 김교신선생의 신앙이 분명 깊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분이 평신도로서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기독교적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평전을 쓴 김정환님은 <민족적, 민중적, 토착적> 세 단어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과 실천방안의 모색입니다. 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우선 과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서구신학과 목회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과제입니다. 둘째는 민족 교육의 실천입니다. 국적이 분명하지 못하고 민중의 가슴에 체화되지 못하는 기독교는 우리의 기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MB 정권에 이르러 역사 교과서를 개편하고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민족교육을 모두 내팽겨 치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얼이 빠진 인간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민족이 있고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셋째는 높은 차원의 애국의 길을 기독교의 높은 이상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몸소 행하여 보이고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서를 통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앞날의 진정한 독립의 정신적 기틀을 만들고 세계 평화와 인류복지에 기여하는 기독교 정신을 찾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위의 책 32쪽)

 

김교신선생이 살았던 일제시대와 오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일제의 대동아평화를 대신하여 오늘날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자본과 시장 그리고 토건개발이 우리의 시대 얼과 민족정신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남한이 다른 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지국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국토가 허리 잘린 상황에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통일을 시도할 수 없는 외세에 눌려 있고, 문화적으로는 한글 대신 영어가 우선시 되고 쌀과 김치 대신 햄버거와 피자의 비율이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전시작전통수권이 우리의 대통령이 아닌 코가 높고 눈이 푸르고 우리말로 얘기해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미군사령관에게 있고 그의 손짓에 따라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우리 또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나라는 둘로 나뉘어 반목하며 고통으로 신음하는가? 대한민국 이 조선은 과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수천 년 역사에 수천만 명의 단군의 후예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세계사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가야만 하는 것인가? 여기에 기독교와 성서가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건 거짓 종교요 한갓 불쏘시개로 던져질 종이 나부랭이일 따름이다. 김교신선생의 삶은 이에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배운 신앙의 한 깨달음은 개인사이든 민족사이든, 고통은 하느님이 아니 계시다는 증표가 아니라 오히려 계시다는 역설입니다. 지리교사였던 김교신선생은 조선반도가 위치한 지리적 상황에서 그리고 역사교사였던 함석헌선생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성서적인 고난의 의미와 기독교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고통을 통해 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석공은 돌을 깨서 조각을 만들고, 목수는 나무를 깎아 작품을 만들고 옹기장이는 진흙을 짓이겨 그릇을 만듭니다. 고통과 고난은 창조적인 미래를 향한 하나의 과정일 따름입니다. 이를 깨닫고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껴안을 때, 우리에게는 오늘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이 오는 것입니다.

 

그냥 참고 견디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민초들의 고통의 소리 곧 용산에서의 한의 소리와 평택에서의 신음소리를 듣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가야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십자가 위에서 외쳐지는 예수의 절규를 들을 때에 우리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속에서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 역사의 반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처럼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것이 제가 믿는 바이며 김교신선생이 우리에게 실천적인 삶으로 말씀해주신 가르침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