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살다간 작은 예수들(5) 김교신(2)

조선에 필요한 기독교

잠언 14장 27-34절, 요한 2장 13-22절

 

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는 순환원리입니다. 인간으로 말한다면, 그 생명의 씨앗이 모태 속에서 열 달 정도 머물며 자라다가 세상에 태어나 유아 소년 청년시절을 거치면서 신체가 발달하며 세상을 경험하고, 지식을 배워가며 성장하다가 중년에 이르면 외부 성장보다는 내면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일종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자녀를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로 길러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노년에 이르면 성장은 멈추게 되고 이윽고 주어진 삶을 마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과정이며 모든 생명체의 자연 순환원리입니다. 하루에 밤낮이 있고 한해에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있듯이 인생 또한 그러한 것은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의 순환원리는 단순히 인생에만 해당하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조직 더 나아가 민족 더 나아가 인류 역사에도 적용되는 생명의 순환원리입니다. 이를 일컬어 역사의 흥망성쇠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신을 대변한다고 하는 교회만 보더라도 이런 흥망성쇠의 순환원리는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루에만도 3천명의 교인이 늘었다는 예루살렘 교회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고,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파송했던 안티오키아 교회는 물론이고 사도들이 세웠던 수많은 교회들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또한 한때는 지금은 단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그들이 뿌린 씨앗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계속 성장하여 왔지만, 개체 교회들에 하나의 생명 주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어떤 교회들은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교인수를 자랑하지만, 그 자랑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나라와 민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 바빌론, 로마, 몽고제국과 같이 세계를 지배했던 수많은 제국들은 마치 달의 차고 기움과 같이 떴다 사라졌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관]

 

그리하여 1919년 독일의 역사철학자 오스발드 슈펭글러는 여러 문명권을 연구하고 나서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는 자연순환적인 역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칸트와 헤겔의 불변의 관념론적 역사철학과 인간의 무한 역량을 믿으며 낙관적인 역사관을 주창하던 19세기의 자유주의 운동에 대응하는 의미가 컸고 출판 당시에는 그 충격이 상당하였습니다. 그 후 슈펭글러의 역사관에 대응하는 관점에서 영국의 문화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 26개의 문명권을 연구한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책을 통해 한 문명의 존폐는 인간과 사회의 자유의지와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자연의 순환과 같이 죽음으로 운명지워진 것은 아니다라는 반론을 펼쳤습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은 그의 문명 역사관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토인비는 한 문명의 존폐를 결정하는 도전에 대한 바른 응전은 창조적 소수에 의해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이 창조적 소수들이 바른 응전을 하고, 대중은 이들을 따라 갈 때 하나의 문명은 계속 존속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도전에 성공한 소수가 그 성공에 만족하고 자기 도취에 빠질 때에는 거기서 인간의 교만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결국은 문명은 쇠퇴 몰락한다고 보았습니다. 과거의 성공사례에만 머물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이를 고집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무리들을 무력과 폭력으로 누르고 우상화를 강요할 때, 이 창조적 소수는 지배적 소수가 되어 결국은 문명의 쇠퇴와 해체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과 북의 위정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계속 존속하려면 과거의 성공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비판의 소리를 눌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적 소수에 의한 역사 주도에 대해 우리의 민족역사가인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정리하며 민중주체론을 설파합니다. 창조적 소수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그의 민족주의 역사 인식은 조선의 고대는 중국의 영향 아래 시작했다는 이전의 유교적 사관이나 삼국시대 이전의 것은 모두 외세에 의한 식민지 역사로 보려는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체적 사관이었습니다. 개인주의화되고 사대주의적인 생각이 우리의 시대정신을 지배하는 오늘에 신채호선생의 민중주체적 민족역사관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전공도 아닌 역사와 문명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신채호선생의 민중주체적인 민족주의 역사관은 차치하고, 토인비의 역사관 곧 소수의 창조적 리더쉽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과연 오늘의 이명박정권의 통치 행태는 우리 민족 미래 역사에 바람직한가? 세계는 급변하며 도전의 패러다임은 나날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나라가 발전하고 사회가 성장하려면 과거의 업적에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길 곧 달라진 패러다임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나도 과거에 다 해보았다.’라는 식의 답변만 계속하고 60년대의 건설 패러다임에 매어달려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비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력으로 국민과 야당의 정당한 소리를 짓누르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편 가르는 MB 정부]

 

서울대 법학과의 조국교수가 쓴 ‘마르크스주의 테제를 입증하려는 MB'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시사 In 21, 2009.8.1 80쪽)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언급하는 것은 이명박정권의 행태 때문이다. 근래 이명박정권은 ‘실용’을 내세우지만, 실제 행동을 보면 정치 사회 세력을 ‘적군’과 ‘아군’으로 선명히 나누고 적군에게는 축출과 진압이라는 몽둥이를, 아군에게는 자리와 혜택이라는 꿀단지를 안기고 있다.

멀리는 KBS 정연주사장의 해임과 기소, 가까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전격 감사와 황지우 총장의 교수직 박탈, 안경환 국가위원장장의 임기 전 사퇴 등의 일이 있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누리꾼, 촛불 시민과 언론인은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속에서 표현의 자유 증 정치권 기본권, 노동 보호와 사회복지 등 사회 경제적 기본권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대표 시민단체가 정권에 비판적이라고 기존의 보조금도 끊으면서, 정권 옹위에 앞장선 정체불명의 단체들에게는 다액의 보조금을 주고 프로젝트도 발주한다.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해 어묵은 사먹어도 재래시장을 고사화시키는 기업형 슈퍼마켓의 확장을 막을 계획은 없다. 종부세 법인세 소득세 등 경제적 강자의 세금은 대폭 줄이면서, 간접세는 인상해 서민의 조세 부담을 높이고 있다. 거대 건설업체가 환호하는 4대강 개발 사업은 이미 착수되었다. 지난주에는 집권당이 ‘날치기’라는 무리수를 써서 신문 방송 관련 법률을 통과시켜 정권 창출의 공신이 조선 중앙 동아 보수 언론사의 숙원을 해결해 주었다.

대립하는 계급 이익을 조정하거나 절충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이명박정권은 이제 자기 길을 분명히 선택했다. 강자와 지지자를 위해서 철두철미 봉사하고, 반대자는 강경하게 억누르며, 약자에게는 립 서비스 수준의 위로와 빵 부스러기 수준의 배려를 베풀기로. 그러나 이 순간 기세등등, 환호작약하는 집권 세력에 당 태종의 명신 위징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계속되는 승리는 멸망의 시작이다.” ‘역풍’의 기운은 벌써 느껴지고 있다. 행정부와 국회를 모두 장악해 오만방자해진 이명박 정권의 일방통행은 필연적으로 ‘거리의 정치’를 불러올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국민들의 저항운동인 419의거와 부마,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전국적인 6월 항쟁이 있었고, 거기에는 수많은 민초들의 죽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극단적인 투쟁과 갈등 없이 국민들의 정당한 의사 표현과 토론 과정을 통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상생하는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 당연한데, 현 정권은 국가통치를 경제성장으로만 이해하고 이 성장 또한 국민 모두 골고루 잘 사는 평등이 아닌 재벌 위주의 숫자 통치만 하고 있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쌍용자동차의 죽음을 담보로한 노사대결에 대해서도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이명박정권이 주장하는 부자성장논리에 매몰되어 성서의 야훼 하느님의 가치관을 바알의 맘몬적인 가치관으로 둔갑시키는 일에 완전히 한패가 되어 버렸으니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성장위주의 맘몬적 가치관에 매몰되면,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는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성공의 구멍은 제한되어 있고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으니 결국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인생의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주어진 기회이고 모두가 이 기회를 가능하면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건만, 오늘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맘몬적인 가치관은 결코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기독교인은 세상의 규칙을 바꾸는 사람들]

 

우리가 읽은 잠언의 말씀에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고 했습니다. 야훼를 두려워하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성전에 와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 두려운 마음입니까? 잠언의 말씀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31절에 “가난한 사람을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이를 모욕함이요, 없는 사람 동정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높임이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에 관심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 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요 바로 그런 사회가 생명의 샘을 이루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어 34절에서는 ‘어느 민족이나 정의를 받들면 높아지고 어느 나라나 죄를 지으면 수치를 당한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우리 사회에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습니다. 도대체가 정의로운 사회란 단어조차도 듣기 힘듭니다. 부강한 나라 모두가 부자되는 사회라는 말은 넘쳐나지만,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라는 말은 거의 듣기가 힘듭니다.

 

정의와 평화는 정당한 법집행을 통해 이루어지고 법 집행에 가장 모범을 서야하는 집단은 검찰입니다. 이점에서 검찰총장이 가장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번 검찰총장 천성관후보는 위장전입과 수입 고가물품 구입 그리고 20억 가까운 고급아파트 구입으로 부패 의혹만 잔뜩 남겨놓은 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최소 40억 이상은 지불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타로 나온 김준규후보 또한 위장전입과 재산형성에 따른 의혹과 승마와 요트 취미생활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번 탈락의 경험이 있어 재산 형성에 있어 가장 깨끗한 후보자를 내세웠을 것인데, 이번에도 여전히 검사 월급 한 푼도 쓰지 않고 평생을 모아도 도저히 구입할 수 없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검찰집단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되고 윤리적으로 부패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명은 그 또한 삼성을 비롯한 여러 재벌 그룹들이 관리했던 장학생 중의 한명일 것이라는 추측밖에는 없습니다. 정의를 가장 먼저 실행해야 할 검찰 집단이 이러하다면 그 사회는 이미 여러 역사가들이 예견한대로 몰락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MB 대통령은 이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으니 이걸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런 사회가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우리 또한 기회만 되면 여기에 편승하려고 하니 이걸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모두가 대박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 결국은 쪽박을 차고 마는 것은 정해진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99%가 그러해도 자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꿈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까? 비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미친 개소리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까?

 

그제 다날의 어르신들과 함께 수원의 백남준아트기념관을 갔습니다. 세계적인 전위예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 또한 매우 혁명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아주 좋은 말이 있더군요.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게임을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기려면 자본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본이 있다면 세상의 규칙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없다면 규칙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를 대안적 가치라고 말합니다. 제가 오늘도 이렇게 하늘뜻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성서와 예수께서 전하는 진리와 지혜의 말씀에 의지하여 대안적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세상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자리를 잘못 찾았다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걸어가는 세상적 가치를 확인하고 축복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이를 대신할 성서적 가치관을 제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환으로 그러한 삶을 살았던 이 땅의 신앙의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있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김교신선생의 얘기를 이어갑니다.

 

[조선지리 소고]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신채호선생이나 함석헌선생이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에서 민족정신을 찾아내었다면 김교신 선생은 지리선생으로서 조선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했습니다. 그래 <성서조선 명논설집>(한국신학연구소 2003)을 펴낸 김정환님은 가장 첫머리에 <조선지리 소고>라는 그의 글을 놓고 있습니다. 당시 일제식민학자들이 퍼뜨린 지정학적 숙명론에 대항하여 조선반도를 하느님이 내린 천혜의 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나라 산촌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를 통계와 자료에 근거하여 비교한다는 점에서 매우 객관적이고 독창적인 논문입니다. 단원, 면적, 인구, 산악과 평야, 해안선, 기후, 위치에 따른 비교분석 논문으로 짧지도 길지 않습니다. 외국이라곤 일본과 만주 지역밖에 가보지 못한 분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학문적 노력과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제가 아직은 중동과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지역은 가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강의 큰 나라들은 짧게나마 여행을 해본 사람으로서 우리 땅에 대한 자랑으로는 산수가 좋다는 것과 사계가 뚜렷하다는 점 외에 별반의 자랑거리는 없고 오히려 우리 땅은 왜 이리 좁은가?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교신선생의 <조선지리 소고>를 읽으면서 우리 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첫 장인 <단원>에서 <지리적 단원이 또렷할수록 한 국가는 생활면에서나 행정구역 면으로나 그 임우를 완전하게 운행할 수 있는 것이다. 폴란드의 국경이 시세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무상한 것은 한눈에 끝도 없이 바라보이는 평원 가운데 인위적 국경을 설정한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영국과 일본의 섬나라 제국이 각각 그 모 대륙의 성쇠를 초월하여 오래 독립을 자랑할 수 있음이라든지, 노쇠하였어도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었기에 능히 특이한 역사를 기록하여 온 스페인이라든지, 알프스의 하늘같은 성에 둘러싸여 3천년 노대국을 이룩한 이탈리아 반도 같은 것은 모두 지리적 단원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지리적 단원은 어떠한가. 동서남 세 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륙에 접한 북면도 백두산과 그곳에서 발원한 압록, 두만 두 강으로 천연적 경계가 매우 확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단 조선이라는 범위가 역사의 변천에 따라 신축이 있었으므로 옛 조선의 경계를 대략 요하의 원줄기 및 그 연장선으로 추정한다면 산해관으로부터 오늘의 만주국 국경선이 하나의 큰 지리적 단원을 형성한다.>

 

사실 저는 그간 우리나라가 중국에 하나로 합병되지 아니한 점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강했던 과거의 여러 나라들, 발해니 말갈이니 만주국이니 심지어는 티베트까지도 오늘에 있어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하나로 편입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 공식적으로 인정된 소수민족만도 50여개가 넘습니다. 다시 말하면 50개 국가를 다 무력으로 통일한 나라가 오늘의 중국입니다. 그러니까 조선 또한 쉽게 중국에 편입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지금까지 비록 둘로 나누어지긴 하였지만,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지리적 단원에 근거하고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면적에 대해서도 김교신선생은 덴마크, 스위스, 네델란드, 벨기에의 예를 들어 “(이들 나라들은) 대략 조선반도의 5분지 1 혹은 6분지 1에 불과하면서도 타인에게 신세스럽지 않은 살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열강의 선망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국토의 적음이 우리 민족의 약점이 될 수 없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논문 결론에서 <지리적 단원으로 보나 그 면적과 인구로 보나 산악과 해안선의 지세로 보나 그 위에 하늘이 베풀어주신 기후로 보나 한 국면 혹은 한 무대의 중심적 위치로 놓은 그 맞다음으로 보나 조선의 지리적 요소에 관하는 한, 우리가 불평을 토하기보다 만족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넉넉히 한 살림살이를 부지할만한 강산이요 넉넉히 인류사 위에 큰 공헌을 기여할 만한 활동 무대다.....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굴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다. 다만 문제는 그곳에 사는 백성의 소질, 담력 여하가 중요한 원인인가 한다.>

 

[고난의 엑기스가 담긴 한반도]

 

김교신선생은 이렇게 조선반도의 중요성을 역설한 다음 성서로 눈을 돌려 이스라엘 민족 또한 외세의 침입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이들을 통해 인류 구원의 복음이 들려졌듯이 바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민족의 영광이 다가오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온갖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할 바 모든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큰 용광로에 달려낸 엑기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성서조선 1934년 3월 62호, 김정환 엮음 26쪽)

 

김교신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잘 살려면 대국의 힘을 빌려야한다는 사대주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대입니다. 중국에 러시아에 일본에 서구 열강에 저마다 강대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때입니다. 이때 김교신선생은 조선이 스스로 잘 살 수 있음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애국이라는 단순한 민족주의적인 정열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결과물을 내어 놓은 다음에 그 결론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저는 그분의 자주적 노선에 깊이 공감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위정자들은 거의 다 한미 FTA를 지지하고 한 EU FTA를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FTA라는 자유무역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세계 평화를 이루려면 세계가 하나 되는 그날이 속히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군대가 없어지고 전쟁무기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국가끼리 경제단위를 하나로 묶는 FTA의 정신 자체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서민들의 삶을 우선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고, 이를 추진하는 위정자들의 정신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국가간 자유무역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비단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뿐만이 아니라, 우리 보다 못사는 나라들과도 함께 진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잘사는 나라들만 대상으로 하고 그것도 저쪽은 별 생각이 없는데, 우리 쪽에서만 안달이 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유럽순방을 다녀온 대통령께서 한 EU FTA 협상이 끝나 서명만이 남았다고 자랑을 했는데, 저쪽에서는 아직 협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미FTA도 마찬가지이구요. 정신이 썩어 있어요. 잘사는 나라에 기대고자 하는 사대주의 정신인데 그런 정신을 갖고 잘산 예가 없습니다. 그런 개인도 없고 그런 나라도 없습니다. 돼지가 살이 쪘다고 해서 잘 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점은 자주와 독립의 정신에 있습니다.

 

[무교회와 에큐메니칼]

 

두 번째로 김교신선생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그의 무교회 사상입니다. 제가 기성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교회 성장을 얘기해도 모자라는 판에 무교회 사상을 피력함이 일견 모순되는 것과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자유와 해방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깨끗케 하신 다음 세 복음서와는 달리 매우 혁명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 대신에 보이지 않는 예수의 몸 곧 그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성도들의 모임이 진정한 성전임을 설파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교인들이 김교신선생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씨의 무교회주의는 그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일시적 필요로 생겨난 것이지 결코 영원히 있을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하루바삐 우리 교회에 참가하라.” 이에 대해 김교신선생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첫째로 우리를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무교회주의를 전공한 사람인 줄로 아는 이도 있으나 이는 대단한 오해다. 근래에 공산당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은 청년들이 공산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국경을 넘고 들어오고 있다. 또 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이 침입하여 어떠한 운동에 헌신한다는 보도에 놀란 경험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의 무교회도 곧 그렇게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10년에 걸쳐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다. ‘성경’ 이었다. ‘복음’ 이었다. 설령 우치무라 선생의 내심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고 고취하려는 심산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다.>

 

<다음에 무교회주의는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본연의 사명이라고 하나, 나의 무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요즈음 조선 기독교계의 쌍벽이라고 할 만한 장로교와 감리교는 적극단(積極團) 문제가 생긴 이래로 자멸을 목표로 분쟁 또 분쟁이다. 성결교는 성결치 못한 문제로 탈퇴 성명과 법정고발이 이어지니 이 역시 자멸할 때까지 서로 치고 받을 것이다. 무슨 독한 마음으로 이 싸움에 끼어들겠는가. 교회 안에 경애할 만한 성도가 있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교회 전체로 볼 때에는 희망을 두지 못하겠다. 오직 성서의 진리를 배우며 스스로 채찍질 하여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래도 무교회주의라고 부르고 싶거든 부르라.>

 

사실 향린교회가 처음 출발할 때 어떤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고 평신도교회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교단내의 다툼으로 인한 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골육상쟁으로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하루의 끼니를 채우지 못해 죽어가는 때에 교권에 매이고 선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파와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생활공동체로 시작한 것은 보이는 교회가 아닌 보이지 않는 예수의 부활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중시하였기 때문이고 이는 김교신선생이나 함석헌선생이 추구했던 무교회적인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하여 기장 교단에 가입을 하였지만, 향린교회는 여전히 ‘성전을 깨끗케 하고 성전을 허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향린교회가 하나의 개체교회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장교단이나 한국교회협의회 더 나아가서 세계교회와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신앙운동이 매우 중요한 신앙운동임을 자각하고 있고 그래서 교회들과의 연대활동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교권에 관련된 일이라면 우리는 추호도 거기에 관여하지 않고 예언자적인 예수 입장 곧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보이는 성전을 허물고 보이지 않는 성전인 고난당하는 민중에게로 나아가고자 하는 신앙을 견지하여 오고 있습니다.

 

김교신선생의 무교회 신앙도 바로 이러한 열린 입장이었습니다. 결코 교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요청하는 교회에 가서 하늘뜻펴기도 했고 건축비의 일부분도 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건물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신도들과의 교제가 중요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남한교회의 교회지상주의적 신앙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성장이 곧 하느님 나라의 확장으로 이해하는 초보적인 신앙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건물이 아닌 예수의 부활의 몸이 중요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나누는 성도의 교제가 곧 부활의 몸이요 성전입니다. 이 예수 부활의 몸은 예수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해골이 여기저기 나 뒹구는 골고다 언덕 곧 고난당하는 민중들의 현장으로부터 예수 부활의 몸이 시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 예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은 당시의 사제들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인물이 달라져도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일관되고 변하지 않는 슬로건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바른 도덕생활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바른 도덕이 무엇인가에 대해 김교신선생은 말하기를 “개인의 한두 가지의 과오나 실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의 근본 방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태도, 곧 신앙이 바로 도덕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도덕의 시작이며 신앙의 완결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도덕의 총화이다.” 잠언서의 말씀, “어느 민족이나 정의를 받들면 높아지고 어느 나라나 죄를 지으면 수치를 당한다.”에 일치합니다.

 

[기독교와 민족정신]

 

<김교신> 평전을 쓴 김정환은 당시의 독립운동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서재필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외교적 방식이요, 둘째는 안창호로 대표되는 자아혁명을 통한 인격혁명방식이요, 셋째는 김성수로 대표되는 산업방식이요, 넷째는 김구로 대표되는 무력항쟁방식이요, 다섯째는 이승훈으로 대표되는 교육방식이다. 여기에 김교신의 방식은 이런 세속사적인 독립방식을 뛰어넘는 종교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기여해야 할 고유 독특한 사명을 자각 정립하고 이러한 민족의 섭리사적 존재 이유에서 민족의 세속사적 독립을 꾀하려 한 것이다. 이는 바로 저 히브리인들이 품었던 세계사적 구원의 꿈이다. 저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았다.(26-7쪽)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조상이 되었다라는 말을 예수시대에 가면 단순히 혈통의 의미로 제한합니다만, 본래 창세기가 전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자손이 하늘의 별보다 바다의 모래보다 많아질 것이다라는 꿈입니다. 이는 단지 자신의 자손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정치군사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의 세계사적 구원이 자신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자기인식, 곧 깨어있는 민족자각인식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정신입니다. 비록 국토는 허리 잘리고 외세의 꼬임에 넘어가 동족 간에 총칼을 겨누는 반인륜적인 비극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통해 세계 평화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확신에 찬 믿음이 필요합니다. 토인비가 말한바 “한 민족과 한 국가가 성숙하기까지는 숱한 시련과 반성, 그리고 성찰(省察)의 교훈이 퇴적(堆積)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김교신선생이 외친 <조선에 필요한 기독교>라는 글을 읽어드림으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감하고자 합니다.

 

<조선에는 부도 필요하다. 힘도 필요하다. 학문도 필요하다. 위대한 작품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독교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히 기독교 청년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제도의 기독교가 아니다. 의식의 기독교가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체험한 기독교다. 바울의 기독교요 요한의 기독교다. 성서의 기독교다. 영적 기독교다. 산 기독교다. 즉 그리스도다. 그렇다. 현재의 조선에 절실한 것은 기독교요. 그 기독교는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청년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제도와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그를 얻으면 우리는 전부를 얻은바 되며, 그를 잃으면 우리는 전부를 잃게 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