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과 교육

창세기 2, 7 - 9 ; 요한복음 1, 9 - 14


조헌정 목사/민경인 교우/장동현 전도사

  


        오늘은 여름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맞이하면서 맞이하는 교회학교 교육주일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함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흔히 성장하면 겉으로 보이는 양적인 것만을 생각하지만, 성장은 겉과 속의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가장 쉬운 예로 나무를 본다면 우리는 흔히 흙 위에 드러나 있는 나무에만 관심하지만, 흙 위의 줄기가 자라는 만큼 땅 밑에 뿌리 또한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 줄기만 자라고 뿌리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장 또한 겉과 속이 함께 균형 있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 참 교육입니다.


        보통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영역이 균형 있게 잘 자라나야 정상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대사회 특히 남한의 지식 사회에 있어서는 교육의 목표가 정신의 영역에만 집중되어 있고, 정신영역에 있어서도 정보와 지식이라는 한 부분에만 너무 치중되어 있습니다. 요즘 학교교육에서 체육이나 음악 미술과 같은 과목들은 소수의 학생들만 공부하고 대부분은 모두 영어와 수학과 같은 과목에 치중합니다. 그래 현재 남한의 교육은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서를 보면 성취도에 있어서는 늘 수위를 다투지만 자신감이라든가 배움의 즐거움이라는 항목에 있어서는 매우 낮게 나옵니다. 이는 결국 사람의 일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교육은 자기 스스로 배움의 즐거움을 갖고 죽을 때까지 성장하도록 이끄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기 세계를 갖도록 하는 일입니다. 자기 소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교육의 목표를 참 인간 성장에 두지 않고 일류대학 입학이라든가 고시합격 혹은 일류회사 취직이라는 일에 그 목표를 세우게 되면 교육의 질은 저하되고 결국 인간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미국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률에 가장 높은 민족이 Korean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퇴 혹은 퇴학률이 가장 높은 민족 또한 Korean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는 타율적인 교육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과외에 익숙해져 있어 누군가가 옆에 붙어서 지시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못합니다. 대학에서는 스스로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전체는 아니겠지만, 한국학생들은 학과목 선택까지 부모들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교육의 목표가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오히려 남에게 의존하도록 가르칩니다. 그 다음으로는 부모님들의 지나친 교육의 열정이 자녀들로 하여금 저들의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도록 하지 않고 부모의 욕심에 의한 공부를 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입니다만, 한때 미국사회를 소란스럽게 했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LA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한인학생 서너명이 밤중에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 성적표를 조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반에서도 열 손가락에 안에 꼽히는 우수한 학생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부정을 저질렀습니까? 그건 부모님들이 너는 꼭 하바드를 가야한다고 어려서부터 주입을 시켜났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평생 이 수치스런 과거가 좇아다니기에 미국 안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했던 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는 이런 부정과 탈법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저는 한 사회가 바르게 성장하는 기초는 인문학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건 지식의 참을 판단하게 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모든 대학에서 인문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과에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가끔 지방을 가보면 누구네 집안의 아이가 서울에 있는 어떤 대학을 입학했다고, 혹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했다고 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일을 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아이들의 교육을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천박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우리 또한 따라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분명 우리는 예수를 따르고 성서를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는 기독인으로 다른 기준과 가치관을 갖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 또한 그 물결에 함께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부모님들은 부모님들 스스로 청년들은 청년 스스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의 가치와 이에 걸맞는 교육방식은 어떠한 것일까를 한번 물어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은 해보아야 합니다. 끝없는 경쟁 속으로 자녀들을 몰아넣어 고액 연봉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과연 삶의 목표가 되고 교육의 방식이 되어야 하는지, 과외위주, 성적위주, 성과위주의 오늘의 교육 현실 속에서 과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교육일까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영혼의 교육을 통해 인간의 삶의 질을 보다 풍성하게 이끌어내기 위에 애쓰고 있습니다. 본래 동양이나 서양 모두 공교육의 시작은 종교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종교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형편입니다. 영혼이 메말라 있는 사람,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 삶의 깊이에 고민하지 않고, 자연과 타인 그리고 신과의 관계를 질문하지 않는 사람들의 끝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 가져도 가져도 우리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계속 목말라하며 불평과 불안 그리고 초조 속에서 사는 것인가? 자신이 당하는 불이익에는 곧장 항거하지만, 이웃이 당하는 불이익에는 전혀 관심하지 않는 사회 정의의 부재는 결국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가 그제 인도에서 돌아왔습니다만, 그들의 삶의 질은 너무나 비참하여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학회가 끝나고 나서 성공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신부님의 인도를 따라 빈민촌을 갔는데, 길에다 내다버린 쓰레기와 시궁창 냄새로 그냥 지나가는 일조차 힘듭니다. 그들은 하루 2천원만 벌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비해 수 십 배에 달하는 돈을 벌고 있지만, 과연 삶의 행복이나 만족도 또한 이에 비례하는 것인가?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반비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학교교육도 문제이지만, 학교교육에 떠밀려 있는 교회교육의 현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는 열심이지만,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에 대해서는 무심한 교인들 또한 문제입니다.


        테니스 클럽의 한 젊은 친구가 큰 교회 집사인데, 갑자기 최근 새벽기도회를 다닌다고 해요? 그래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했더니 딸이 고3이어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 제가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이라도 직접 아이의 손을 잡고 짧게나마 기도를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더 좋기는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이고 고3이라 하더라도 교회 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민족을 꼽으라면 세계  인구의 0.5%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의 3분지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민족을 예로 꼽습니다. 그래 서점에 가면 이에 관련한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성공의 근본인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강조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자녀들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를 했지만, 교육은 평생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다날(다시 날자) 모임’을 통해 어르신들이 배움에 열심이지만, 70이 넘어서도 성서배움마당에 열심하는 교우님들도 계시고 수십 년 교회생활을 하였지만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다잡기 위해 공부에 참여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저는 이런 배움의 열정이 향린교회의 성장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교우님들 모두가 평화나눔공동체 활동에 참여하시어 배움과 나눔 그리고 신앙 실천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주보에 실려 있는 기존의 활동 외에 ‘경제와 삶’이라는 새로운 모임도 시작했고, 그리고 김태준집사님이 인도하시는 ‘국문학과 신앙,’ 최무영집사님이 인도하는 ‘과학과 신앙’을 주제로 한 모임도 곧 시작할 것입니다. 꼭 교회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깨우쳐가는 배움에 열심 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배움이 없다면 성장이 멈춘 것이고 성장이 멈추었다면 그건 죽음에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청신 회원으로 약사로 일하시면서 2년에 걸쳐 들녘교회 농활에 참여하신 민경인님과 중고등부를 담당하는 장동현전도사님이 교육에 관련하여 생각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교회학교의 여름 들살이뿐만 아니라 여러 부서에서 진행된 행사 사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시는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향린교회 교육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경인 교우의 하늘 뜻 펴기


        지난 7월 초, 새청/청신/희청 30여명이 2주에 걸쳐서 들녘교회로 농활을 다녀왔습니다. 사회부/선교부의 지원과 교우님들의 든든한 후원으로 씩씩하게 들녘으로 향했던 때가 벌써 두 달 전입니다. 오늘은 농활을 통해 느꼈던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려 합니다.


        주말을 이용해서 떠난 농활이라 하루정도의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논에서 피를 뽑고, 녹슨 컨테이너의 페인트를 칠하고, 공부방 건물 외벽에 벽화 그리는 일을 조를 나누어 진행 했습니다. 다들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정을 모두 마친 주일날 이세우 목사님께서 설교말씀에서 향린교회 사람들이 오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세심하게 마음을 써주어서 정말 고맙고, 앞으로는 더 긴 일정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우리의 마음이 일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진 것 같아서 기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농활을 다녀온 후 얼마동안은 문득문득 그곳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생각하면 따뜻하고, 들녘농산물 판매 포스터를 봐도 예전과 다르게 시선이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땅과 사람 그리고 내 몸이 직접 연결되는 일을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서, 그것도 도시에서 ‘일’을 하면서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던 깊은 갈증이 조금은 해소되었던 것 같습니다. 농사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땅을 일구는 일에서 느껴지는 단순한 기쁨이 나를 더 낮아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함께 농활을 간 친구들과도 밥을 지어먹고, 몸을 맞대고 일하면서 교회에서, 혹은 술자리에서 마주할 때와는 다른 친밀감이 느껴졌습니다.


        들녘교회 교인분들의 농사일을 도와드리면서도 어떤 ‘관계’가 생겨난 듯했습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도시와 농촌과의 교류에 대한 생각을 작지만 행동에 옮겼을 때, 행동한 바로 그 만큼 생겨나는 경험과 신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서로 사랑하는 것과, 땀 흘려 일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몸을 움직여 일하는 삶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년 농활은 어떤 방식으로 꾸려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은 욕심일까요. 움직인 만큼 만들어지는 관계의 힘을 기대해봅니다.


장동현 전도사의 하늘뜻펴기


        안녕하세요. 향린교회 청소년부 아이들과 함께 4층에서 예배드리는 장동현 전도사입니다. 이제 10월이면 향린교회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됩니다. 2007년 가을 목회실습을 향린교회로 왔다가 인연이 되어 2년 가까이 사역을 하고 오늘 이 자리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향린의 여러 교우님들 앞에서 하늘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7년 가을 향린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국악찬양과 향린교회만의 독특한 예전을 통해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있으셨는지 청소년부 전도사가 되어 향린 청소년부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청소년부 아이들과 조금씩 어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서부터인지, 푸른이들(청소년부 아이들을 푸른이라고 칭합니다)의 삶을 알아가면서 그동안 잊고 지내던 입시의 압박과 고통을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고3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입시의 중압감이 시작됩니다. 고1 부터는 학원과 과외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대학입시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중학생들도 입시의 스트레스를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1,2,3학년 푸른이들과 분반시간에 생활나눔을 하다가 고등학교 입시이야기가 나오면 분반이 끝 날 때까지 고등학교 입시에 대한 정보들, 걱정들, 희망들을 나누다가 마무리되곤 합니다. 


        당연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앞둔 2주 3주간은 예배참석률이 뚝 떨어집니다. 몇 번의 시험기간을 지내며, 입시와 내신 앞에서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우습지 않은 질문도 해봅니다.


        향린교회 청소년부에서 푸른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10년도 넘은 학창시절의 악몽과 고통스러웠던 현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자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독교 신앙교육을 할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입시의 중압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적인 초월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다른 종교적 진리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삶속에 파고드는 카이로스의 순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교육할까? 카이로스는 헬라적 시간개념 중 한가지입니다. 이런 고민들이 깊어가면서 한신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의 공부도 어느덧 네 학기를 마쳤습니다.


        한신의 기독교교육학은 다른 교단의 기독교교육학과와는 좀 다른 성향이 있습니다. 기독교교육이라는 학문 자체가 좀 생소하실 것 같은데요. 이중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두가지 학문에 토대를 갖고 있다는 뜻에서입니다.


        한 가지는 신학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반 교육학입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지금도 기독교교육학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해 논쟁이 많습니다. 기독교 교육이 교회의 교리교육인가? 아니면 윤리 도덕을 강조하는 종교성의 교육인가? 이런 극단적인 논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각 교단마다 큰 스펙트럼, 편차를 보입니다. 물론 한신의 신학풍토가 그렇듯, 한신의 기독교교육학은 스펙트럼, 편차 중 가장 왼쪽의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즉 가장 진보적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종교교육을 공부하고 돌아오신 문동환 교수님에 의해서 인간해방을 위한 의식화 교육이 한신 기독교교육에 큰 중심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민중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민중해방교육론에 영향을 받아, 70 80년대의 억압받는 민중을 깨우고 이 땅에 하느님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려던 정신은 한신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화 교육과정은 한국의 형식적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한신에서도 약화 되었습니다. 요즘 같이 삽질만하는 MB정부아래에서는 7080년대 민중을 일깨우고 광화문으로 뛰쳐나가 투쟁하게 하던 민중교육론을 향수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교육과정에서 사라졌고 인권교육, 평화교육 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최근에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교육철학과 교육과정 방법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신대 기독교교육학과를 정년퇴임하신 이준모 교수님은 자연과 인간, 그것을 매개하는 노동문제 천착하여 생태논리를 정립했습니다. 이러한 생태논리는 생태적 기독교 교육학으로 한신 기독교교육학의 새로운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를 주도하고 있는 학문적 담론은 생태론입니다. 그것은 첨예화된 이성의 지배주의적 성격과 그것이 야기한 ‘하느님’과 ‘세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극한적 대립과 소외 현실에 대한 비판적 반성으로부터 야기된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창조법칙으로서의 생태논리와 기독교교육의 관계는 오늘의 하늘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하늘말씀 중 제일성서의 말씀은 창조설화 중에서도 타락이전의 하느님 나라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의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서로서로가 하나인 나라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렇듯이 '하느님', '인간', '자연'의 관계는 극도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구조를 큰 틀에서 본다면 크게 ‘에덴동산으로 표상되어 있는 하느님 나라’와 타락이후 즉, '죄'와 '악'이 존재하는 ‘오늘 우리의 세계’ 그리고 ‘인간 해방을 위한 구원의 활동’으로 도식화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하늘말씀, 요한의 복음서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삶 속의 구원사 논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몸소 생명을 내어준 사건입니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 흐르는 예수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은 생명의 길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섬김, 희생을 우리의 삶속에 실천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교육이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지금까지 한신의 학문 장에서 논의되는 생태적 기독교교육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향린교회 푸른이들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생태적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의 실마리를 한 가지 말씀드리는 것으로 하늘 뜻 펴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지난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향린어린이부와 청소년부가 함께 여름들살이를 다녀왔습니다. 여름 들살이의 주제를 정할 때, 2009년 기장의 여름성경학교 주제인 ‘생명의 그리스도 온 생명을 살리소서’에서 착안했습니다.


        ‘하느님’, ‘인간’, ‘자연’이 어떻게 생태논리대로 화해할 수 있는지 실천해 본 좋은 들살이였습니다. 우선 하느님과 우리가 다시 만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배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주일마다 드리지만, 이번 여름들살이에서는 좀 특별하게 프랑스의 개신교 수동공동체인 떼제 공동체 예배 형식에 따라 드렸습니다. 어린이부 최병조 전도사님이 특별히 떼제공동체를 방문한 경험을 살려 오랫동안 준비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3들까지 모두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온몸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였습니다. 1시간 반이 넘는 긴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어리기만 하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놀랍기만 했습니다.


        다음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생명의 길을 따라'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강화도 산마을 고등학교의 자연친화적 환경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기농 먹거리로 우리생명의 토대가 되는 친환경적 밥과 간식들로만 들살이를 살았습니다.


        화장실도 대부분이 퍼새식,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에 아이들 중에는 화장실 거주하는 거미들, 곤충들과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인간, 우리들의 관계를 회복하기위해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함께 뒤섞여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청소년부 아이들이 또래끼리가 아니 여서 불평도 했지만, 향린공동체의 동생들을 챙기고 보살피는 모습은 이번 들살이의 좋은 결실이었습니다.  


        이번 여름 강화도 산마을 고등학교에서 진행된 향린 어린이청소년 여름들살이는 딱딱한 생태논리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자연스럽게 느끼고 체화하는 시간 이였습니다. 비록 영상이지만, 바로 이어지는 영상을 통해 함께 생태적 종교적 감수성을 느끼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