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건 (2)

이게 무엇이냐?

출애굽기 16, 11 - 15 ; 마태오 복음 6, 25 - 34


한문덕 목사

  

[이게 무엇이냐?]

        성서를 백두대간과 같은 큰 산맥으로 비유하여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봉우리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는 어떤 봉우리일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연속으로 하늘뜻펴기를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야말로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 동시에 제1성서에도 이 예수 사건에 버금가는 높은 봉우리가 있으니 출애굽 사건입니다. 성서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서라고 할 때, 출애굽 사건과 예수 사건이야말로 하느님의 구원을 맛보고, 하느님을 만난 가장 확실한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은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의 한 장면입니다. 몇몇 생물을 제외하고는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광야에서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실컷 먹고 마시는 체험을 하게 된 떠돌이 노예들의 한 일화입니다. 대제국 에집트 람세스 2세의 통치 아래에서 비돔과 라암셋이라는 나라의 창고를 건설하는데 강제 동원되어 고된 노동과 억압과 착취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노예들에게 불현듯 찾아온 해방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뿐, 황량한 광야에 이르게 되자, 이들 모두는 불평과 불만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립니다. “차라리 에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16:3)  

        이 불평의 소리를 들은 야훼 하느님께서 곧 바로 구원의 손길을 펴십니다. 저녁에는 어디선가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을 뒤덮고, 아침에는 고수씨처럼 희고 벌꿀과자 같이(16:31) 달콤한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가는 싸라기처럼 내려앉은 만나를 보고 사람들은 서로 묻습니다. “이게 무엇이냐?” 사실 만나라는 낱말은 여기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물었던 문장 “이게 무엇이냐?” 히브리어로는 “만 후: man hu”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 질문은 만나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던진 단순한 질문일 수 있겠지만 오늘 저는 이 질문을 좀 다르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250년경 일어난 역사적인 탈출 사건이겠지만 이 사건은 과거의 한 사실을 넘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종교적 진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은 에집트의 고기 가마 옆에서 빵을 배불리 먹던 것처럼 단순히 배를 불리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에집트의 노예가 되도 좋고, 야훼 하느님의 종이 되어도 좋다고 한다면 오늘 제1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본 뜻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이 체험은 참 자유를 얻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이들이 겪은 실존적 불안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불안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고, 고통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절절히 말하는 종교입니다. 창세기의 타락이야기에서 유래한 원죄의 교리는 인간 개인이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지어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구조악에 대한 문제를 짚고 있고, 바울이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중략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서 7:15, 24)라고 고백하듯이 인간의 의식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무의식의 차원을 고민합니다. 이렇듯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참된 자유를 갈망하지만 참 자유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또 다른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지겹고 부모의 독재 밑에서는 자유가 없다고 가출한 청소년이 하룻밤도 지나지 못해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막상 자유인이 되었지만 정작 의식주 문제 앞에서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한 데에서 절망하게 되고, 다시 예전의 노예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불평하고 맙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은 인간이 오히려 자유를 누리기보다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자유와 불안은 다른 것이 아니고 자유의 다른 이름이 불안입니다. 남이 시키는 것, 제도가 요구하는 것, 정해진 것을 따르면 자유가 없겠지만 동시에 불안도 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누군가 시키는 것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처벌이 두려워서 불안이 발생하지만 이제 자신이 주인이 되어 모든 가능성 앞에 섰을 때는 이전의 불안과는 차원이 다른 불안이 자신을 엄습하게 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세상에 첫발을 디딘 젊은이는 아마도 세상에 홀로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주체가 되기에 실존적 불안을 겪게 됩니다. 동반자로 공동의 인생의 첫걸음을 걷는 신혼부부, 첫 아기를 막 낳아 키워야 하는 초짜 부모, 다시 새 삶으로 거듭나 인생역전을 꿈꾸는 중년, 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늘 느끼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 노년 모두 이 실존적 불안을 피해가긴 어렵습니다.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2000년 전 예수를 따르던 대다수의 무리들도 이러한 실존적 불안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서도 보이지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삶의 터전을 잃고 헤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산상설교의 첫 마디를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을 하심으로 이들을 위로합니다. 물론 마태오복음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지만 마태가 참조했던 예수 말씀 모음(Q자료)에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산상설교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하신 말씀 치고는 너무 가혹한듯한 그리고 도저히 따를 수 없을 것 같은 말씀에 봉착하게 되는데 바로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 중략 ~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출애굽 사건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먹을 거리와 입을 거리에 대한 문제가 고민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출애굽에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이것이 해결되는데 비해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제가 청소년부 전도사로 있을 때 향린교우들을 청소년부에 초청해서 특강도 부탁하고 설교도 하시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지금의 선교부장이신 김지수 집사님을 모셨는데 그 때 김지수 집사님께서 오늘 제2성서의 본문을 가지고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청소년들에게 설교를 하셨지요. 김지수 집사님의 해결책은 “걱정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걱정의 종류를 바꿀 수는 있다.”였지요. “먹고 사는 걱정에서 하느님 나라와 뜻에 관한 걱정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양식을 어디에서 찾을까요? 어떻게 걱정을 없앨까요? 나를 종살이 시키며 부려먹는 그 곳 애굽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에게서 찾을 것인가? 나를 휘감는 실존적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종살이 하던 그곳으로 되돌아 갈 것인가? 아니면 불안을 견디며 끝까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만약 우리가 성서를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존재를 뒤흔드는 실존의 문제들 속에서 걱정도 되고 근심도 되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분은 마침내 우리에게 이전에 전혀 맛보지 못한 참으로 새로운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근심 걱정의 실체]


        그렇다면 끝까지 하느님을 믿는 그러한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마르코복음서에 보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 심히 번민하시지만, 예수의 말씀만 모아놓은 자료(Q자료)에 보면 전혀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역사적 예수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하였고, 또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수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이렇게 걱정 없이 사는 믿음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렇게 많은 근심걱정을 안고 살아갈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가 가졌던 신앙, 하느님 안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희망에 부풀고, 걱정 없이 살았던 그 믿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의 믿음에 이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가진 근심과 걱정들의 실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2005년 8월 31일 ‘무사 알 카딤’ 사원으로 약 100만명의 순례자들이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8시15분 눈 앞에 보이는 사원 주변에 4발의 박격포탄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사원으로 가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행진은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11시 30분경 순례자들의 행렬로 가득한 ‘아이마’ 다리 위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이 다리 위에 자살특공대가 숨어 있다” 이 소문이 순식간에 100만 여명에게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서로 밀고 밀치고 달리고 넘어지고 밟고 밟힙니다. 심지어 다리 아래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고, 다리 위는 순식간 지옥으로 변합니다. 965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최악의 테러사건은, 처음부터 자살특공대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누군가가 퍼뜨린 소문과 사람들의 불안감이 만나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1)

        혹시 우리가 가진 근심 걱정 또한 이 사건의 경우처럼 헛소문에 근거한 것은 아닐지요? “비정규직법을 계속 시행하면 백만명의 대량해고자가 발생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보험 한두 개는 들어놔야 안심하며 살 수 있다.” “군대 다녀 오면 어른 된다.” “아파트 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등등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많은 이 세계의 잘못된 신화에 속아서 우리는 불안에 떨고 근심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닌지요?

        인간은 누구나 불안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두려움을 계속 견디느니 차라리 부정적인 소문이라도 믿어버림으로써 잠재적인 긴장감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계속해서 불안한 사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닐지요?

        지난 어린이/청소년부 수련회에서 제가 고등학생 분반을 맡아 3회에 걸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 청소년들의 걱정거리 가운데 큰 것 하나가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해서 생기는 불안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원인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빈곤했던 전쟁 직후에는 너나 나나 함께 가난했기에 힘들어도 견디었는데 지금은 실제적으로는 가난하지 않아도 상대적 빈곤감이 들 때는 엄청난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파트 평수,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의 종류와 같은 것에 따라서 부의 척도가 드러나고 남과 비교됨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능력이 평가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요. 값나가는 명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와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같은 문제뿐만 아니라 어떤 제품의 아기 기저귀를 쓰느냐, 이유식은 무얼 먹이느냐와 같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현대인들은 자존감에 상당한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젊은 부부가 아기 기저귀와 이유식 얘기를 어른들에게 말씀드리면 우리 때는 일회용 기저귀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고 하시고, 젖 먹이다가 밥 먹으면 바로 밥 먹였지 무슨 이유식이냐고 하시며 너희들은 호강하면서 애를 키우는 거라고 말씀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 한국에 사는 젊은 부모들은 바로 이런 것 하나 가지고도 속이 상하고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고통과 상처들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존의 욕구에서도 비롯되지만 또한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도 발생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이를 위해 꾸민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는 말도 있듯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공동체 내에서 소속감을 느낄 때,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되지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어떤 단체든지 잘 소속되기 위해 돈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돈 앞에서는 사람의 노동도 상품이 되고 땅도 사고 파는 물건이 되기에 결국 자연과 인간이 상품처럼 취급받게 됩니다. 삶의 의미를 묻고, 예술을 즐기고, 사랑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인간이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받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스트레스가 늘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함 또한 불안과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누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몸이 늙어가고 병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우리입니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달리 이성적 동물인 인간은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또한 무력감에 빠지고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겹치고 얽히고 설켜서 우리네 삶은 내내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여러 근심과 걱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믿음]


        위에서 말한 이런 갖가지 원인들을 우리가 해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 자유에 이를 수 있을 것이고, 매일의 삶을 기쁨으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이런 모든 걱정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해 주었듯이 예수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존과 번식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라면(食色, 性也.) 인간 또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적 빈곤으로 기아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된 걱정과 근심에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 농부로써 농사를 지으면서 하느님께서 자연을 통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을 내리시는지 경험합니다. 농사를 지어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단순히 먹는 문제만 신경 쓴다면 자연은 우리가 먹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줍니다. 세상의 모든 식물은 제때에만 쓴다면 음식이요 약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한자말을 풀면 “스스로 그러하다”입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스스로 계신 분이신 하느님과 가장 닮아 있어 인간에게 무한히 자신을 내어 줍니다. 예수는 이런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 의식주의 문제는 오히려 의식주 자체의 부족에서 오는 문제라기보다 상대방과의 비교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욕망의 문제입니다. 공평하게 나눈다면 지구의 모든 소산은 지구생명체가 충분히 살 수 있도록 넘쳐납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많이 가진 것으로 삶의 가치와 자신의 정체성을 삼지 말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다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순간 먹고사는 문제의 고민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 믿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가족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유아기 이야기를 제외하고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유년기 시절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을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친밀도와 인간에 대한 높은 애정과 신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엄청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현대 종교심리학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하느님 이해는 초기 유아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아마도 예수는 어머니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높은 신뢰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이 마리아를 성모로 존중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의 궁극적 원천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랑을 넘겨 줄 수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는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넘겨받았고, 자연을 통해서 놀랍고 큰 하느님의 은총을 각인하였습니다.

        감성적으로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은 예수는 유대 회당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충분한 기도와 구전되어 내려오는 제1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지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비록 당대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상에 녹아드는 모든 것들에게서 삶의 지혜와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예수는 이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례요한의 뒤를 이어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모험과 도전의 길에 나섭니다. 다행히 초반부터 자신을 믿고 의지해 준 갈릴래아 친구들이 있었고, 자신을 따라 말없이 남모르게 그러나 극진한 봉사를 했던 여인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믿어준 가족들, 그리고 민족을 넘어 동지의 뜻을 보여 주었던 시리아-페니키아 여인과 로마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알게 모르게 힘을 주었던 수많은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삶의 경험을 통해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 또한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용기와 삶의 초연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말로 표현되는 욕망의 투사나 타인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모험에 자신을 던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참 인간되신 예수를 따라]


        향린교우 여러분, 저는 지금 참 인간이신 예수를 뚫어지게 파고 있는 중입니다.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이신 분이라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따라 그의 참 인간됨을 묻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 자신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모든 기적과 행동과 가르침이 그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저는 예수를 따를 이유도 없고 따를 수도 없습니다만 그는 참 인간이셨기에 우리 또한 참 인간의 길을 묻는 여정에서 그를 본받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盡人事, 待天命.)의 말이나 성실함 자체는 하느님의 길이요,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길이라는 말(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처럼 저는 인간으로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인간이 최선을 다한 후에 그 인간이 멈춘 그 지점, 즉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그 지점에서 하느님은 활동하시고 인간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이게 무엇이냐?”라는 질문과 감탄은 바로 이런 경지에서 나오는 한 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우리 이제부터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모아봅시다. 간디 선생이 자신의 자서전을 쓰면서 “나의 진리 실험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았듯이 여러분도 마음의 자서전을 쓰면서 “나의 사랑 실험이야기”, 또는 “참 인간으로 살아보기” 등의 부제를 달고 오늘부터 작은 실천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처럼 농부가 되시긴 어렵겠지만 가끔씩이라도 자연으로 나아가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세계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질 들꽃이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등산로 한 구석 조용히 바람을 기다리는 민들레의 홀씨에서 약동하는 생명과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김태준 집사님께서는 하루 종일 나무만 보셔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다고 하시는데, 여러분도 풀 한 포기에서도 온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런 영적 감수성, 생태적 민감성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체험을 종교학자들은 우주적 종교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훌륭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셨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변에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바로 지금 자신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도 없다고 하시는 분은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책들을 사서 읽으셔도 좋습니다. 맹자는, 독서란 옛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尙友). 평생 사랑을 넘겨주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넘겨받아서 다시 넘겨주면서 점점 커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만드시고 관리하시는 이규성 집사님에게는 교회를 떠나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전화해 주시는 도기순 장로님이 계셨고, 저에게는 아마 오늘 새벽에도 저를 위해 기도하셨을 고향교회의 권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런 여러분의 멘토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자연과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으셔서 풍부한 감성이 싹트셨다면 타인에게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이 퍼 쓰면 없어지는 고인 물이 아니라 계속 샘솟는 옹달샘이 되기 위해 홀로 하느님과 대면하는 많은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무릎을 꿇으시고 두 손을 모으십시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칭 진보적이라고 하는 신앙인들은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함조차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의 주님께서도 이른 새벽 기도했고, 중요한 순간마다 홀로 하느님을 찾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성서를 읽으며 성서의 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십시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자 우리 주님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우리들의 스승인 첫 제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그 말씀 자체를 깊이 되새기는 연습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소리 나는 꽹과리로 멈추기 쉽고, 사랑을 빌미로 자신을 내세우는 위선자의 길을 걷기 쉽습니다.

        이제 생각이 깊어지고 마음도 뜨거워졌다면 손과 발이 나설 때입니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움직일 것입니다. 우리 집사님 중에 한분은 등록한 새 교우가 자신의 집 근처이심을 알고 전화를 해서 밥 한 끼 먹으며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서로 여러 모양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동수 장로님은 교우들 중에 “수”라는 글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분들과의 모임을 기획하고 계시고, 김우신 권사님은 한 고개 넘어가시면서 살아 있을 때 나누는 삶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신앙의 동지들을 집으로 초청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충분히 받으셨고, 이웃에게 나눌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돈은 문제가 아닙니다. 매월 첫 주 나간이 모임을 가시는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홀로 사는 어르신들과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을 드리게 되는 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다 보면 오히려 사랑을 베푼다는 시혜의식보다 자신이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되는 노동보다 돈이 되지 않더라도 참으로 중요한 노동들이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을 중심에 세워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시고 거기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그분의 은총을 누리십시오.


[매 순간 누리는 은총]


        제가 가끔 저 자신을 보면서, 또 동료 목사들이나 자칭 진보적이고 깨어있다고 나름 자부하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늘 하느님께로 가 있는가를 묻곤 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신앙인으로서 삶의 여러 상황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묻고 계신지요? 하느님의 뜻은 높고 큰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족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 생태위기에서 지구생명체를 구하는 일에만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인들처럼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이웃을 위해 살아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 가운데서라도 조금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충실히 해보고 하느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릴 때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위로와 주님의 평화를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친구와 친척에게 전화하여 안부 묻기, 환한 얼굴로 사람들 대하기, 제 마음 돌아보며 묵은 감정의 때를 벗겨내기, 신나게 노래 부르면서 쌓은 스트레스 풀기, 직장 동료들에게 자판기 커피 돌리기, 공부에 지친 자녀에게 사랑의 메시지 보내기. 향린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각 종 봉사활동 한번 씩은 참여하기, 힘들게 매번 고생하는 봉사부장, 관리부장, 성가대/예향/교회학교 교사들을 격려해 주기, 각 종 배움 마당에 참석하여 깨우침 얻기, 가끔씩이라도 관리집사님/사무집사님/교육부 담당 목사후보생들 밥 사주기 등등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여러분이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자신을 차분히 성찰하는 시간이 왔을 때, 여러분은 스스로 이렇게 외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자신이 생각지도 꿈꾸지도 못했던 놀라운 삶이 자신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간디 선생께서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사회악’으로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富),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합니다. 간디 선생은 희생 없는 종교에 대한 질책을 하셨지만 저는 희생을 사랑이라 바꿔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희생과 사랑은 상대에 대한 헌신이라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그 동기나 결과는 자못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기쁨에 충만할 수 있다면 이제 여러분은 예수의 믿음에 가까운 것입니다.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길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인 불안을 싸안는 용기와 모험과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게 무엇이냐?”라는 한 마디에는 불안을 싸안고 자유를 향해 돌진하는 신앙과 그 신앙 속에서 체험한 참된 해방의 기쁨이 녹아 있습니다. “이게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물음으로 보지 말고 오히려 감탄으로 본다면, 이 소리는 불안을 감내하고서라도 얻고자 했던 자유를 통해서 맛본 놀라운 은총의 순간에 터져 나온 함성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통하지 않는 광야! 생존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곳에 자신을 내 던졌을 때 다가온 하느님의 은총! 그리하여 이스라엘 전통에서 광야는 절망과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멈춤 속에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되는 곳, 곧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황량함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참 자유를 만끽하고 계십니까?

        마지막으로 정경에는 들어오진 못했지만 깨달음의 복음서로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는 도마복음서의 두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귀가 있는 분들에게는 들릴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언제 죽은 사람들의 쉼이 있겠으며, 언제 새 세상이 이르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것이 이미 와 있지만, 여러분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51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77절)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불안을 겁내지 마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매 순간 베푸시는

그 분의 무한한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