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을 살다간 작은 예수들(9) 손양원

무엇을 감사하십니까?

신명기 16장 12-17절, 마르코 12장 41-44절

 

한가위 혹은 추석은 음력으로 8월 대보름을 맞아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바라보며 조상님께 감사를 돌리던 민족 고유의 축제일입니다. 요즘은 한가위 혹은 추석의 절기는 단순히 부모님을 비롯한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께 제사를 드리는 집안의 날로 축소가 되었습니다만, 예전 농촌에서는 하나의 성씨로 구성되어 있던 마을 공동체가 함께 하는 감사의 절기였습니다.

 

[종교 축제일은 모두 감사의 날]

 

마찬가지로 성서의 유대민족이 종교적으로 지키던 기념일들 또한 감사의 축제일입니다. 과월절 혹은 유월절이라 불리는 절기는 유대민족의 뿌리가 되는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절기이고, 이로부터 오십일 째가 되는 날에 지키는 오순절 혹은 추수절은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며 감사하는 절기이고, 초막절 혹은 장막절은 오곡백과의 열매들을 거두어 드리고나서 드리는 감사의 절기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일요일마다 교회나 성당에 나가 예배나 미사에 참여하는가 하는 겉모습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속마음에 감사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 혹은 알지 못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의 모든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이라 불릴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신앙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머리로는 하느님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끔 제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제대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매순간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가? 하루의 삶을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하고 가까운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며 때때로 감사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면 그는 분명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따르는 정의와 평화의 실천적 삶이 다른 사람보다 많다 하더라도 감사의 마음이 없다면 저는 그건 울리는 괭가리에 불과한 실천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저도 때때로 내가 목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나의 감사의 마음을 측정해봅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김태준집사님이 인도하시는 ‘신앙과 문학’ 평화나눔공동체의 첫모임을 가지면서 조선 말기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동기가 된 우리나라의 고유한 실학이란 실심 참 마음에서 시작하고 이는 실행 참 삶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마음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오늘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드린 동전 두 개는 오늘날로 말하면 백 원짜리 동전 두 개입니다. 이 동전은 그녀의 전 재산이었고, 오늘을 지탱할 수 있는 풀빵 한 개를 살 수 있었던 돈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여 이를 드렸던 것이고 예수님은 이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감사와 훈련]

 

제1성서 율법에 지키라고 명한 감사 절기들은 그냥 먹고 마시며 떠드는 흥겨운 축제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의 절제와 훈련이 함께 하는 축제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축제일들은 보통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8일간을 지켰는데, 이 안에는 무교절이라 하여 누룩이 들어가지 않아 부풀지 않은 딱딱한 빵을 한 주간에 걸쳐 먹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이 급하게 애굽을 떠날 때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수절이라 하여 그냥 기뻐하는 절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첫 곡식단을 하느님께 드리면서 자신들이 노예 출신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못먹고 못자고 못입었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냥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노예와 같이 땅이 없어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을 한 자리에 불러 함께 즐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에는 조상들이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여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빵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번에는 못자고 못입었던 시절 광야의 삶을 기억하여 자신의 집 마당에 얼기설기 초막을 지어 놓고 가족이 한주간을 그 안에서 생활하면서 절기를 지켰던 것입니다.

 

제가 젊어서는 이런 것들이 형식주의로 보여졌습니다만, 저는 우리 신앙인들 또한 이런 절제와 훈련의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실상 우리 신앙인들이 말로 믿습니다를 외치는 것 외에 비신앙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훈련이 없는 신앙은 곧 식기 마련입니다. 그래 곧 형식주의로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형식만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것만이 바리새 형식주의가 아니라, 절제와 훈련이 없는 신앙 또한 형식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점에서 우리 개신교회가 어떤 절제와 훈련을 스스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목회운영위원회 같은 곳에서 교회 운영만 논의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신앙 훈련 방식같은 것을 논의하여 전체 향린인들이 함께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 곧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하였지만, 이를 실행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어제 결혼 1주기를 맞이한 나혜영 변동구부부와 함께 점심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점심식사가 참으로 기쁜 식사였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제가 주례를 했던 부부이기만은 아닙니다. 제가 주례를 할 때는 항상 상담을 하고 그리고나서 몇 가지를 당부하는데, 그중 하나가 결혼기념일이 되면 두 사람이서만 축하하지 말고 주례를 섰던 나도 그 자리에 참여하게 해 달라 그래 1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듣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는데, 이 부탁을 잊지 않고 저를 초청하였기 때문이고 더 기쁜 것은 제가 매일 저녁 손을 잡고 하루를 돌아보며 기도할 것을 부탁했는데, 이를 지켜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잘 지키지 못하는 일인데, 이를 지켜오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변동구님은 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평 아닌 불평을 하셨는데, 자신은 짧막한 기도를 드리고 주로 나혜영님이 길게 기도를 하시는데, 처음에는 자신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더니 이제는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기에 기도가 길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한 어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분이 저희 교회에 인도한 선배님 부부가 함께 이 식사자리에 함께 하였는데, 이 부부는 아직 아이가 없고 40대 중반입니다만, 아내되시는 김소영교우님은 몇 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아 회복하던 중, 두달 전에는 엉치뼈로 전이가 되어 여러 시간에 걸친 힘든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하며 회복 중에 있는데, 이제는 그 암이 폐에까지 전이가 되었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고 약이 맞지가 않아 미래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에 있습니다. 약의 효험은 2,30%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의 얼굴은 매우 밝았고 두 시간 내내 생활주변의 이야기로부터 현 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고난에 찬 삶이지만, 진정 감사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두 부부의 삶과 신앙을 보면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을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달에 아기를 출산하게 될 나혜영교우님 가정과 이 투병 중에 계시는 김소영님 가정을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하늘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

 

사도 바울의 감사 또한 유명합니다. 학자들은 그가 간질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이 질병으로 인해 그의 전도는 많은 지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그는 기도합니다. ‘자신의 병이 낫기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전도에 바쳤으니 이 간구는 따지고 보면 바울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간구였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세 번은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에서의 세 번의 기도와 같이 이는 온전한 기도, 간절한 기도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데, 그 응답은 거절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늘의 말씀이 있기를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가운데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래 그는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하늘의 신비스런 세계를 보는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고후 12장) 자신의 고통스런 병을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하려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스런 질병, 수치스러운 질병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병은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병일수도 있고, 과거의 수치스런 실수일수도 있고, 자녀 혹은 배우자 가족 중의 누군가로 인한 아픔과 고통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는 바울선생이 깨달았던 모든 일에 감사하는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이 바로 그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고통이 없었더라면 나는 분명 교만해져 오늘 이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하느님 따위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목사님 중에는 어쩌면 사도바울보다 더 큰 감사의 고백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일명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목사님이십니다. 1902년에 태어나 아버님 손종일장로님의 기도에 의해 평양신학교를 나오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여수의 한센병 환자촌인 애양원의 목회자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1940년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간 옥에 갇혀 계시다가 해방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시어 다시금 애양원에서 목회를 하시던 중 625 때에 피난을 가자고 하던 여러 사람들의 청원을 뿌리치고 교인들과 계속 남아 있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 하신 분이십니다.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여기 손목사님께서 나환자촌 애양원을 목회하던 중 지은 기도노래를 통해 정말 그분이 품고 계시던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1.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자들이옵고 부모와 형제의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오 주여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2.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3.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의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 손동희 아가페 62-63쪽)

 

몸이 성한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거늘, 손가락 발가락이 빠지고 얼굴과 온 몸이 흉하게 뒤틀린 사람들, 고름이 줄줄 흐르며 독한 냄새를 품기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중환자실을 거침없이 드나들며 정상인들은 마스크와 장갑을 발에는 장화를 신어야 하는 규칙을 저들과 하나되는 마음으로 거부하고, 때로는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면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이분의 전기를 읽으면서 목회자로서 저의 자세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하는 일로 옥에 갇혔을 때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내가 항상 말하거니와 고난은 참으로 큰 복이외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부자나 학자나 모든 성인군자까지도 다 고난의 산물이 아닐까요? 고난은 성공의 어머니가 아닐까요? 고난은 복을 거두는 씨가 아닐까요? 고난 중에는 자기 과거의 죄를 다 깨닫게 되어 사죄의 은혜도 받고, 세상의 벗이 되어 죄 중에 빠진 자에게는 채찍이 되어 하느님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 주소서. 한 덩어리 주먹밥, 한잔의 소금국물의 맛이야말로 신선의 요리요, 천사의 떡 맛이외다. 당신은 엄동설한의 고생을 염려하나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느님,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일꾼이 나에게 밥을 먹이지 않겠습니까? 나의 식사량을 본래 적게 하셨으니 이 밥으로도 내게는 만족이요, 나의 키를 적게 하심으로 옷과 이불은 나의 발등을 덮으니 이만하면 만족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주께서는, 적게 믿는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꾸지람을 하십니다. 염려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을 탄식할 뿐이오니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외다. 안심하소서...”(103쪽)

 

[원수 사랑의 극치]

 

자유의 기쁨은 누린지 얼마 되지 않아 손목사님은 더 큰 불행을 겪게 되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비극의 하나인 여수순천 사건(주 1)을 통해서 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625라는 남북전쟁 보다 더 큰 비극의 사건입니다. 남북전쟁은 같은 민족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두 국가간의 민족전쟁이요 이후 외세가 개입한 국제 전쟁이었지만, 그보다 1년 8개월 전에 일어난 여수순천사건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던 한 마을사람들이 이념의 노예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학살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여수순천사건의 가장 권위자이신 이영일집사께서 평화소모임에서 발제를 하시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 외에 진상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주 2)

 

손양원목사님의 두 아들은 당시 각각 중학생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평소 미워하고 있던 좌익 폭도들이 집으로 몰려와 이 두 아들을 잡아다 죽인 것입니다.(주 3) 나흘이 지나 동신 동인 두 아들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손목사님은 너무나 비통해하셨고, 사모님은 몇 번이나 기절을 하셨습니다. 당시 부흥회 인도 차 오셨던 전도사님께서 손목사님에게 이런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손목사, 정신차리시오. 우리는 과거에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순교를 허락하지 않으셨소. 오늘 젊고 아름다운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이 그리도 아깝소? 슬퍼하기만 할 일이 아니오. 더 좋은 천국갔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요.” 이 말을 듣고 손목사님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10월 27일 마침내 그들을 땅에 묻어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때 손목사님은 이 식장에서 그 유명한 아홉 가지의 감사를 말합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주 4)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느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자녀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느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 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정이여,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이 답사를 통해 손목사님은 바로 오빠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으로 감싸 아들을 삼겠다는 결심을 하십니다.

 

당시 순천을 탈환한 군인들에 힘입어 우익학생들은 이제 반대로 미움의 휩싸여 원수를 갚기에 혈안이 되어 좌익 학생들을 처단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 순천시는 또 다시 자식들을 잃게 되는 부모님들의 통곡소리로 하늘을 찌르게 되는데, 그때 두 아들을 총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강철민학생이 붙잡힙니다. 그러자 손목사님은 그를 용서하고 아들을 삼고자 하는 마음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때 딸이 이렇게 항변합니다.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 삼겠다는 것은 또 뭡니까? 용서한 걸로 됐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삼으면 내겐 오빠가 될텐데 나더러 그 원수를 오빠라고 부르란 말입니까?” 이렇게 울부짖는 딸과 가족들을 손목사님은 간절하게 설득을 합니다. 그리고는 군인의 손에 붙잡혀 곧 총살을 당하게 될 그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물론 군인들과 학생들이 이를 받아드릴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눈물어린 노력과 기도로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어 아들을 삼게 되고 그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 한동안은 함께 살아갑니다.(주 5)

 

그리고 625의 참화 속에서 손양원목사님 또한 피신을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이때 피신하기를 간구했던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교회의 일부가 애양원(주 6) 교회요, 한국민족의 일부가 애양원 식구들이 아닙니까? 한 교회의 양떼들을 무시하고 한국 교회를 중요시할 수 없으며 소수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한국 민족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허위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본시 잘 살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 잘 죽기 위한 종교인 것입니다. 꼭 살아서만이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씨가 죽어야 싹이 나듯이 죽어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299-300쪽)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이요, 세계에 자랑스런 우리의 목사님이십니다.

 

[성찬의 감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이제 한가위라는 민족 고유의 절기를 기념하며 성찬의 예식을 행하고자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희생적인 죽음을 본받아 우리 또한 죽고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든지 앞으로 제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이든지 진정 감사를 알고 어떤 고난이 임하든지 기뻐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

 

(1) 1948년 10월 19일 저녁,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제주도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제14연대 하사관 그룹은 제주도로 파병되어 동족을 죽일 수는 없다며 총구를 이승만 정권으로 돌렸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14연대 하사관들이 주도한 봉기는 곧 바로 일반 장병들의 동의를 얻으며, 다음날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곧이어 전남 동부지역 수 개 군으로 번져 나갔다. 여수와 순천에서는 봉기군의 엄호 아래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었고 기초적인 '인민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진압군이 즉각 투입되어 23일은 순천이, 27일은 여수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여수와 순천이 진압되었다고 해서, 봉기군이 완전히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14연대 봉기군과 남조선노동당 등의 지방 좌익 세력 등은 부근의 산악지대인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투쟁을 계속했다.

여순사건은 1946년 미군정 하에서 일어났던 '대구 10월항쟁'이나 '제주 43 항쟁'보다 훨씬 더 큰 정치 사회적 영향을 남한 사회에 미쳤다. 특히 반이승만 정치세력에 대한 지배정권의 공세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강화되었고,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던 미군의 철군정책도 변화되었으며, 미군은 이 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이는 이어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다.

여순봉기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발표했던 桶口雄一는 여순봉기가 미군에 반대했던 봉기임을 상기시키며, 여순봉기가 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과 싸운 중국 인민의 투쟁 그리고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운 베트남 독립해방투쟁과 공통의 과제를 가진 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桶口雄一, 1967, ?麗水順天蜂起?,

 

(2) 손양원목사님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딸 손영희님이 펴낸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바 역사적 객관성이 미흡하다 할 수 밖에 없는데, 여수순천 사건을 조사 연구하시어 책(여순사건:논문집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을 주도적으로 내신바 있고 현재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 기록정보관으로 일하시는 이영일집사가 보낸 자료들을 참조하였다.

 

(3) 당시 사회는 미소로 인해 남북으로 갈렸거니와, 남한 사회는 친탁의 친미계열과 반탁의 친소계열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학교 또한 이념대결과 폭력이 공공연히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큰 아들 동신은 이러한 친탁 친미 반공을 대변하는 순천지역 학연(전국학생연맹)조직의 수장이었다. 그러니 동신의 죽음은 그가 기독교인이어서라기 보다는 이와 같은 정치 이념대결로 인한 이유가 주요 원인이었다. 그리고 동생은 현장을 따라갔다가 함께 변을 당했다.

 

(4) 당시 하루끼니도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도 고등학생 신분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손양원목사의 강한 친미성향 그리고 미국선교사와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하였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5) 구출운동을 할 때, 손양원목사님은 부흥회 인도로 현장에 없었고, 친구 목사님이 이 일을 대신하고 있었고, 따님의 회고에 따르면 형장에서의 본인의 간청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하지만, 당시 손가락을 드는 것만으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복수심으로 불타 올라 사리구별이 쉽지 않았던 학살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군인들이 단순히 양자 삼는다는 신앙에 감화를 받아 풀어주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내부 권력층과의 연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에서는 이를 기술하고 있다.

 

(6) 1928년 600여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설립된 애양원은 해방 이후 한센환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정형외과, 피부과 진료에 전국의 으뜸을 자랑하고 있었다. 의료시설, 의료진, 의약품 일체가 미국에서 직수입하여 운영하고 있는 터라 더불어 비교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60여년 전의 여순사건 당시의 열악한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의료계가 대단한 권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일제하에서의 전도사 시절부터 이곳에 있었기에 어떤 권력을 지향하였다고 볼 수는 없고, 자신의 친미성향 때문에 분명 죽음을 예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양떼를 떠날 수 없다는 목자로서의 절절한 신앙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