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살다간 작은 예수들(10) 머슴 목사, 백정 장로

출 18장 13-23절 에페소 4장 11-13절

 

2주전 한가위감사주일 하늘뜻펴기로 감사의 주제에 맞추어 손양원목사님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 아들 둘이 살해당한 후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는 목사님의 용서를 중심으로 전했는데, 이러한 사건이 생겨나게 된 일련의 사회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평화 소모임에서 이영일집사님의 여순사건에 대한 역사 세미나가 있었고, 이 세미나에서 얘기되었던 손양원목사님과 관련된 얘기를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글로 펴낸 하늘뜻펴기에는 이런 내용들을 주로 달아 설명하였습니다.

 

[지난 하늘뜻펴기 사회비평적 후기]

 

당시의 남한 사회는 5년간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남쪽 이승만정권의 친미 세력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김일성정권의 친소 세력으로 양분되어 나누어져 대낮에도 폭력 테러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났던 때였습니다. 당시 남과 북은 625전쟁 전이었기에 오늘날과 같이 그렇게 철천지원수로 여기지는 않았었고, 통일정부는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해결될 것으로 보았던 시절입니다. 그래 김구 김규식같은 민족주의 세력은 신탁통치 이후의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이승만정권의 남쪽 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정책은 어떻게든지 38분단선을 유지시켜 남하하려는 소련의 세력을 막아야 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러한 적대정책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6자회담을 한다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세계정치경제체제가 유지되는 한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바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런 충돌과 혼란의 와중에 미국의 조정을 받은 이승만정권이 남쪽만의 분단정부를 세우게 되자, 제주도에서 이를 반대하는 43항쟁이 일어나고 이 항쟁을 분쇄하기 위해 순천에 있던 부대를 파견하려 하자 같은 국민을 향해 총을 들 수 없다 하여 군인들이 반기를 들게 된 사건이 여순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 모두를 단순히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중 일부분은 분명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으나, 당시는 어찌되었던 외세의 신탁통치를 통해서라도, 남북분단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세력이 더 강했던 시절입니다.

 

이런 혼란과 대립의 시절에 손양원목사님의 큰 아들 동신은 외세의 신탁통치를 인정하고 남쪽만의 반쪽 정부 수립을 원했던 친미 친탁 세력의 대변 역할을 했던 전국학생조직인 학연의 순천지구 리더였습니다. 그래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첫 번째 타도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그의 죽음은 단지 그가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활동으로 인한 결과였고, 동생 동인은 형의 처형 자리에 함께 했다가 우발적으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손양원목사님이 두 아들의 영결식장에서 읽은 아홉 가지의 감사 가운데, 두 아들이 ‘미국 유학대신 더 좋은 천국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당시 손양원목사님의 사회적 지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미국 원조로 나라 경제가 운영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끼니를 제때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중고등학생 신분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 중에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손양원목사님이 일제를 대신한 또 다른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미국사람들과의 각별했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달리 손양원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감옥생활 그리고 한센병 환자촌인 애양원교회의 헌신적인 목회와 순교로 말미암아 그분의 실수나 약점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분에 관한 책은 따님이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와 평소 가장 가까이 지냈던 나덕환목사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안용준목사가 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 밖에 없어 어떤 역사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손양원목사가 속해 있던 일부 보수장로교단이 엄청난 재원을 드려 순교기념관을 짓는 등 지나치게 성인화하여 친미반공의 이념적 우상으로 만들어 놓아 버렸습니다. 이는 손양원목사님 자신도 원치 않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바라기는 보다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발굴을 통해 민족화해와 통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제 3의 책이 나왔으면 합니다.

 

[복제 사회, 붕어빵 신앙]

 

경향신문은 63주년 창간특집으로 남한의 사회상을 비평하였는데, 그 제목이 “한국인, 복제인간 붕어빵 인생”입니다. 한 10년 전 몇 년 만에 찾은 고국방문 중 점심시간에 강남을 걸어가는데, 그때 점심을 먹으러 쏟아져 나온 회사원들의 반팔 하얀 와이샤츠에 푸른 색 계통의 넥타이 검정바지 엇비슷한 머리모양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가끔 그런 모습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지난 봄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면서 한 유럽인을 만났는데,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그러는 겁니다. 그가 만난 한국인들은 모두 위아래 검은 등산복 차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왜 그랬는지 여성들은 모두 매우 짙은 붉은 색 루즈를 발랐습니다. 기사는 남한이 성형공화국이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어, 쌍꺼풀은 입학기념 코수술은 졸업기념 주름살 제거는 이직기념, 보톡스는 어버이날 효도선물이라는 유행을 말하더군요. 미모의 평준화 시대일 뿐만 아니라 주거환경 또한 거기서 거기인 복제 아파트의 시대입니다. 외국인의 눈에는 슬럼가로 보이는 남한 인구의 반이 거주하는 아파트. 서울은 땅은 좁고 인구는 많아 고층 아파트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왜 땅값 싼 저 산촌에까지 아파트가 세워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저는 모릅니다. 겉의 모습만 획일화된 시대가 아닙니다. 내면의 가치까지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가장은 돈 걱정 속에 아침부터 밤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삶을 살며 일에 매달리고 있고, 엄마는 직장을 다니든 안다니든 자녀 교육에 올인하고 있고, 중고생들은 365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기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의 표준 취미는 등산이구요. 이러한 획일화는 단순히 군사문화의 소산일까요? 아니면 튀면 빨갱이로 몰리는 남북이념갈등의 소산물일까요? 문화비평가 김규항씨는 “지금의 복제사회는 좇으면 좇을수록, 경쟁에서 탈락하는 누군가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정글사회”라며 “새롭고 다양한 가치 지향으로 복제사회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어떠한가요? 복제 신앙 아닌가요? 어느 교회를 가나 천편일률적인 예배 순서, 탁상종 소리와 함께 묵상을 하고 사도신경 암송하고 축복을 비는 기도와 의미없이 반복되는 ‘믿습니까?’와 ‘아멘!’의 이중창, 사회적 공의 실천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만 성수주일과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강조하는 교회성장주의, 거기에 미국교회에서 베껴온 예화들로 가득 찬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서에 질문이 생기고 신앙에 의심이 일어도 이를 드러내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이런 군대식 획일화된 복제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장로교단만도 100개에 가깝고 이런 교단이 생기는 것은 보통은 교리 차이에서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교리가 다르면 예배를 드리는 형식, 하늘뜻펴기의 내용 또한 달라져야 하는 법인데, 예배 형식, 하늘뜻펴기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면 남한교회의 수많은 교단은 교리나 신학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방과 학연 그리고 지도자들의 사사로운 명예욕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말해줍니다.

 

[역사 인식이 있는 하늘뜻펴기]

 

제가 ‘이 땅을 살다간 예수들’이라는 인물 편 하늘뜻펴기를 하는 이유 또한 목회자 입장에서 보면 남한교회의 일률적인 설교형태를 깨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지만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여러분 스스로에게 맞는 인물들을 찾아내고 스스로 더 공부하여 나름의 주체적인 신앙을 세워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서가 4권입니까? 더구나 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공관복음서라고 하여 비슷한 시각에 내용 또한 엇비슷하지 않나요? 그래도 이 모두를 정경으로 채택한 이유는 그 안의 담긴 고유성을 다양함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 만나 얘기한 내용과 사마리아 여인 만나 얘기한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는 구원의 길을 얘기했다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자신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생수를 찾는 해방의 길을 얘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루 세끼 먹는 일은 똑같아도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길을 찾는 것이 참 성공의 길이듯이 신앙 또한 자신만의 고유한 믿음의 길을 찾는 것이 참 구원의 길입니다.

 

역사학자 Edward Hallet Carr는 1962년에 펴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만,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되려면 역사가 바르게 정의됨은 물론, 역사에서 현재에 적용될 가치를 찾아내 그것을 지켜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는,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살아온 인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모두 이 땅을 살아온 예수들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온 몸으로 자신이 역사의 주체임을 증명하려 애쓴 사람들, 자신이 천명한 절대가치를 일관되게 지켜오며, 이런 절대 거시적 목표 속에서도 미시적인 자신의 일상적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실행해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은 열 번째 시간으로 조선의 초대교회 역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선 최초 소래교회의 자주성과 서양 선교사]

 

가톨릭을 포함하면 교회의 역사는 훨씬 더 길어지지만, 흔히 개신교는 1885년 4월 4일 부활주일에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을 밟았던 때를 시작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견해는 아닙니다. 그 이전 백령도를 다녀가고 대동강에서 죽은 토마스 선교사와 로스선교사의 영향으로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조선 땅에는 이미 개신교인들이 있었고, 고종 황실의 시의이며 미국의 공사관 공의의 직함을 갖고 있던 알렌 또한 실상은 선교사로서 그들보다 약 7개월 전에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 땅에 가장 먼저 세워진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의 역사가 이를 확실하게 반증합니다. 소래교회는 이 두선교사가 들어오기 2년 전인 1883년 5월 16일에 첫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자료에는 1885년 6월 29일에 세워졌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이는 교회 개축 기념에 맞춘 조직교회의 출발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작은 이러합니다. 인삼장수였던 서상륜이 만주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영국인 선교사 맥킨타이어의 간호로 회복하게 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번역작업에 참여하여 처음 만들어진 우리말 쪽 복음서를 품에 안고 고향 의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국경에서 관헌에 적발되어 전도에 어려움을 느끼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당시 당숙이 살고 있던 장연 송천리로 옮겨와 복음을 전하며 소래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1년 만에 20여명의 교인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고 조선 땅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소래교회 얘기를 들었고 방문을 합니다. 그때 교회는 교인들이 많아져 기와집으로 개축하고자 했을 때입니다. 그래 건축헌금과 교역자 사례비를 지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교인들은 이 예배당은 조선의 첫 예배당이니 외국인의 재물은 들이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여 극구 사양하고 자립적으로 헌금을 모금했다고 하니 이 자주자립정신이 우리에게는 귀감이 됩니다. 그래 소래교회는 8칸의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개축했고, 그 이듬해 출석교인이 200여명이 되어 또 8칸을 증축했습니다. 전체 58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50 가구가 교회에 출석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후 소래교회는 선교사들의 한글교육장으로, 전도훈련장으로 때로는 동학군들의 피신처 등으로 활용됩니다.

 

왜 장연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예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하는 사회정치적인 배경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성호 이익에 의하면 조선 3대 도적 혹은 의적으로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을 얘기하는데, 이 세 사람이 모두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합니다. 장연은 해주와 더불어 바로 이 구월산의 끝자락 동네에 있으면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이국 문화에 개방적이고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팔레스타인 땅의 끝자락에 놓여 있는 갈릴리와 같이 끊임없이 민중해방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후에 김구선생 또한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의 뿌리로 삼은 것을 보면 여기가 바로 가난한 민중들의 한이 맺혀 있는 조선의 갈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신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나는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니 너희도 그리 오라.’고 하셨던 그 장소가 바로 1900여년이 흐른 조선 땅에서는 황해도 장연 땅의 송천이 되었고 그 첫 공동체가 소래교회가 된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최초의 세례 교인]

 

조선에서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도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고종의 시의였던 알렌의 집을 찾아갔다가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발견하고는 이를 몰래 집으로 가져와 읽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진리에 접하게 되었고,이후 언더우드선교사로부터 성서와 교리서를 계속 빌려 읽으면서 선교사들만이 모였던 주일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후 스스로 기독교신앙을 갖기로 결정하여 1886년 7월18일 세례를 받습니다. 이때 세례식은 언더우드가 집례하고 아펜젤러가 보좌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의 첫 세례자가 선교사에 의한 전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한 전도였다는 사실과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집례를 하였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최근 세계교회협의회 9차 총회가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되게 되어 남한의 에큐메니칼 교회들이 기뻐하고 있는데, 일부 보수교단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약간의 교리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민족구원을 위해 함께 손 맞추어 나가야 할 교회이니 대국적 견지에서 축하해야 마땅하거늘... 언제부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옹졸하고 유치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최초의 목사와 최초의 장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 교회와 최초의 세례 교인을 알아보았는데, 이제는 최초의 목사와 최초의 장로는 누구였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보통 최초의 목사는 아까 얘기했던 서상륜과 서경조씨 그리고 길선주를 포함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인 7명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는 장로교목사로서 처음인 사람이고 조선 최초의 목사는 감리교의 김창식목사로서 이들보다 6년이나 앞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김창식씨가 어떻게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형제보다 더 먼저 목사가 될 수 있었는가?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목사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목사안수에 대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서로 다른 체제에서 기인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에, 저는 미국에서는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3년제 신학석사를 졸업해야만 목사가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2학년 때인데, 같이 입학했던 한 미국인 친구가 자기가 지난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에요. 나는 아무리 빨라도 2년이 더 있어야 되는데, 너무 놀랐지요. 무슨 이상한 교단에서 받았는가 하여 물어보았더니 미국감리교 연회에서 정식으로 받은 것입니다. 장로교와 달리 감리교는 본래 집사 장로라는 칭호를 평신도에게 주는 게 아니라, 목사에게 줍니다. 그래 처음 목사안수를 받으면 집사목사(deacon pastor), 이후 7년이 지나면 장로목사(elder pastor)라 하여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목사로서의 큰 차이는 없는데, 연회 안에서의 활동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흑인 동료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자기는 목사 안수 받은 지가 몇 년 되었다는 겁니다. 신학교 졸업장이 없는데 목사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백인들이 신학교 입학을 허용하지 않아 흑인목사들끼리 합력하여 목회 훈련을 시키고 안수를 주던 그런 관례가 계속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 침례교는 지금도 이렇게 목사 안수를 주는 예가 많고,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1901년 5월 14일, 선교사가 들어온지 6년만에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 감리교 한국선교회 연례회에서 김창식과 김기범 두 사람이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중 먼저 안수를 받은 김창식(1857∼1929)은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은 한국 개신교 개척 시대의 전설적인 전도인이며 그에게 머슴 목사란 별명이 붙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사 만행 잡으러]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열다섯 되던 해에 무작정 가출을 합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머슴살이를 비롯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15년 동안 전국 팔도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떠돌아 다닙니다. 스물 아홉이 되어 비로소 늦장가 들어 남대문 안에 정착했을 때 그는 서울 장안에 떠돌던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 “예쁜 애들은 밤에 끼고 자고, 싫증나면 자기 나라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더라.”는 소문입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시기한 수구파가 선교를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래 흥분한 시민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난입해 난동을 부려 한때 학교와 병원은 문을 닫았고, 종교 집회도 모일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역사에서는 ‘영아 소동’(baby riot)이라 부릅니다.

 

이에 김창식은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는’ 현장을 잡겠다고 결심을 하는데, 이때 마침 한국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가 사람을 구하고 있어 그 집에 ‘행랑 아범’이라고 부르는 하인으로 출발을 합니다. 김창식은 예리한 눈길로 선교사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합니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만행은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선교사 가족들은 그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합니다. 올링거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 선교사들은 나라님(고종)과 자주 만난다는데, 하인에 불과한 그에게 보내는 눈길과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하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조선 양반들과 질적으로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 ‘인간 대접’을 해 주는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먹게 되자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때 올링거 선교사는 마태복음 5장을 읽어보라고 쪽복음을 건네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올링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위장 취업한 지 2년 만이었습니다.

 

[조선의 바울로]

 

그 후 김창식은 열성적으로 전도에 나섭니다. 1893년 의료 선교사 홀(W. J. Hall)과 짝이 되어 평양에 내려가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보수적인 평양에서 선교사가 전면에 나설 수 없어 그가 나서 서문 밖에 선교사 사택과 병원, 학교와 교회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 일로 그는 평양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평안 관찰사로 내려 와 있던 민병석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아주 싫어한 수구파 인사로 평양에 기독교 확산을 막기 위해 1894년 여름 기독교인 체포령을 내립니다. 그때 김창식을 비롯해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인 10여 명이 투옥되는 ‘평양 기독교도 박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미국 공사는 조선 정부에 강력 항의하였고, 이들은 1주일 만에 풀려납니다. 그런데 그때 배교를 거부한 김창식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반 시체가 되어’ 실려 나옵니다. 당시 평양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홀 부인의 회고입니다.

 

“홀 박사가 서울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보를 치자, 평양 관찰사에게 모든 기독교인들을 석방하고 또 선교사들을 보호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관찰사는 교인들을 사형수 감방에 가두고 마치 다음날 사형을 시킬 것처럼 겁을 주고는 교인들을 끌어내어 배교를 강요하였답니다. 그때 우리 용감한 김창식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응답하였고, 그로 인해 아주 심한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 무렵 평양 거리는 돌 투성이였는데, 석방 후에도 돌 세례를 받으며 가까스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실한 증인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를 부끄럽게 만든 김창식의 신앙 투쟁은 평양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며칠 후 그를 매질한 관찰사는 선교사를 찾아와 사과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얼마 후 그는 좌천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평양 주민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양 관찰사의 위세도 선교사와 교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독교는 ‘치외법권’ 종교가 됩니다. 이 사건 직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평양은 청군과 일본군의 주전장(主戰場)이었고 이에 평양 주민들은 대부분 성 밖으로 피난 갔지만 김창식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청전쟁 때의 일이다. 이 때 평양은 일·청 두 나라 군인의 전쟁터가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후에 들은즉 중국 군사는 패하고 일병이 성중으로 들어온다 하여, 이 말을 들은 성중은 인심이 물끓듯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피난하는 자가 무수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피난할 생각을 버리고 성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의 문으로 인도함이 나의 의무임을 깨달았다. 나는 또 성중의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위로까지 줄 기회가 있었음으로 그때부터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교회도 몇 곳에 새로 설립되었다.” <김창식, 나의 교역생활. (조선기독교창문사, 1927), 3쪽.>

 

그가 말한 ‘육신의 위로’란 전쟁 중에 교회로 피신한 사람들 혹은 성밖으로 피신하면서 교회에 맡긴 피난민들의 짐을 안전하게 보호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전쟁 중 청나라나 일본 군대는 ‘십자기’(十字旗)를 내건 예배당을 공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사들을 보내 보호 조치를 취하였던 것인데, 이는 교회를 공격함으로써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과 영국 등 서구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까 우려한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중 십자기가 달린 교회는 양쪽 군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이었습니다. 피난 갔다 돌아와 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평양 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또 전쟁 후에 평양에도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이때 홀 선교사와 김창식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고, 이때 홀선교사는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이 선교의 밑거름이 되어 훗날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개신교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이후 김창식은 목회자 수업을 받고 1901년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아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마치 사도 바울로와 같이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며 125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48개 예배당을 건축합니다. 김창식은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 목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당시의 시대적 차별의 벽을 깨뜨리고 민중을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최초의 최치량장로와 백정 출신의 박성춘장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였던 최치량 장로님(1854-1930)은 40여세 때에 여관을 운영하다 자기 집에서 있은 마펫선교사 집회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 평양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를 세우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고 후에 오촌리로 이사하여 오촌리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에서 58세의 나이에 장로로 임직을 받습니다. 그는 이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길 뿐 아니라 사재를 털어 경신학교를 세워 기독교전파와 민족교육에도 전력을 바쳤습니다. 당시 장로는 단지 교회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함께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 최치량장로가 계셨다면, 서울에는 그보다 1년 후에 장로로 임직을 받은 박성춘씨가 유명합니다. 박성춘은 1862년 서울 관자골(오늘날 종로구 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한번 백정은 영원한 백정이기 때문에 박성춘은 백정 마을에서 백정의 딸과 결혼해서 백정 아들을 낳습니다. 조선시대 때 최 하류 계층은 칠천반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포졸, 광대, 고리장(나무껍질을 벗겨 장을 만드는 사람), 무당, 기생, 갓바치(동물 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사람), 백정이 그들입니다. 백정은 칠천반중에서도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입니다. 백정은 무적자였기 때문에 인구조사에서 제외되었고, 절대로 상투를 올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망건이나 갓을 써서도 안 됩니다. 조선시대에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의 표시였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 많은 백정일지라도 어린아이 취급을 당했습니다. 백정들의 가슴에 얼마나 큰 한이 있겠습니까?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만은 백정 신세를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 당시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곤당골(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있는 예수교 학당에 아들을 보냅니다.

 

당시 곤당골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893년 6월에) 교회 안에 학당을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박성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일요일의 예배 참석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894년에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염병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게 됩니다. 그때 전염병이 얼마나 심했는지 하루에 3백명이 죽어서 서울 밖으로 실려 나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려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해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차에 하루는 아들 봉출이가 낯선 외국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곤당골 교회의 사무엘 무어 목사와 제중원 담당 의사였던 에비슨이었습니다.

 

당시 에비슨은 고종황제의 주치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백정마을의 자기 집까지 들어와 그의 몸에 손을 대면서 치료를 해주는 일에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 박성춘은 아들 봉출이가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자신의 두 딸도 에비슨이 시작한 여학교로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도 곤당골 교회에 나가면서 1895년 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복음의 힘: 500년 신분 차별의 벽을 허물다.]

 

그런데 이때부터 곤당골 교회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의 교인이 20명이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정부의 관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더욱 교회에 발을 끊었습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는 양반위주의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인은커녕 상놈도 아닌, 천민 중에 천민이었던 백정이 교회에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니 당시 양반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박성춘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무어목사에게 압력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무어 목사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면서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뽀쪽한 수가 없게 되자, 양반자리, 백정자리를 따로 구분하자는 제의를 합니다. 무어 목사는 깊이 생각하다가 교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없는 일이라고 또 거절합니다. 결국 곤당골 교회의 양반들이 따로 교회를 세우는데 그게 ‘홍문수골 교회’입니다.

 

자연히 ‘홍문수골 교회’는 양반교회가 되었고, 곤당골 교회는 백정과 상민만 남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때 박성춘은 천한 백정을 위해서 애쓰는 무어 목사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 그때부터 열성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곤당골 교회를 백정들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후 3년간 곤당골 교회는 계속 부흥하게 되고, 반면에 ‘홍문수골 교회’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분리한지 3년 만에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져서 지금의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해 박성춘은 독립협회가 주관한 관민공동회에서 연사로 나서 "양반사족만이 아니라 사농공상의 모든 신분을 초월하여 국가의 기둥으로 삼아야 국가의 힘이 더욱 공고해 질 수 있다"는 발언을 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장로는 세례 받은 지 1년이 지나고 만 30세 이상으로 교인의 3분지 2 찬성이 필요했는데,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초대장로로 뽑힙니다. 이후 그는 노회 임원직도 맡게 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국에 수십 개의 백정 교회가 세워지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럴 뿐더러 당시 내각총서로 있던 유길준에게 장문의 탄원서로 보내서 ‘백정 차별 금지법’을 공포하게 하고 백정들이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갓과 망건’은 인간됨의 상징이었습니다. 결국 박성춘의 요구가 관철이 되고 박성춘은 지난 500년간 못 쓰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썼던 백정이 되었습니다. 처음 갓을 쓰는 날 얼마나 기뻤던지 잠을 잘 때도 갓을 벗지 않고 잤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는 이렇게 사회의 차별을 깨는 진보와 해방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교회가 민중 속으로 파고들고 성장하게 된 배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박성춘이 승동교회에서 장로가 된지 3년이 지나 흥선대원군의 친척으로 왕손이었던 이재형이 또한 장로가 됩니다. 조선 역사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백정과 왕손이 동등한 입장의 당회원이 된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복음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하나라고 했는데,” 바로 이 말씀을 실현한 것입니다.

 

[장로의 본]

 

또한 박성춘의 아들이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1907년 조선 최초의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데 그가 의사 박서양입니다. 박서양은 개화기의 상징적 인물로서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 유일의 서양의사로 활동하면서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는 후일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와 맞서다 일시 폐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후 그는 간도 지역에 세워진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펼쳐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일하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장로로 교회 또한 열심히 섬겼습니다.

 

박서양을 연구해 온 연세대 의사학과 박형우 교수는 “전통 사회에서 억압받던 신분 출신이면서 성공한 의사였던 박서양이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문명을 수용한다는 명분하에 일제의 침략을 용인해온 것과 대조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박성춘과 박서양장로는 복음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었지만 개인의 영달에 머물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의술과 교육을 통해 이 사회를 진보와 해방의 길로 인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3명의 장로를 뽑는 2차 임시공동의회를 갖습니다. 우리나라 초대장로님들의 삶과 신앙을 보면서 우리 향린교회의 장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투표에 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참되게 살며 욕심이 없고 유능한 사람, 그들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 결정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에페소서의 말씀과 같이 여러분의 신앙의 길을 지도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자라게 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한명의 성숙한 신앙인으로 이기적인 이유나 세속적인 판단을 따라 뽑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을 확신합니다. 분명 하느님이 선택의 이유를 물을 때에 분명하고 소신 있게 답할 수 있는 후보자를 선택하여 주시기 바라며 여러분의 한 표가 향린교회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