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신음과 예수

창 28장 10-13절 마가 5장 1-10절

 

[한일선교협의회의 의의]

 

오늘은 지난 주 동경에서 있었던 서울노회와 동경북지구 교회와의 한일선교협의회 보고를 겸한 하늘뜻펴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10년 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와 동경교구 북지구에 있는 교회가 한일간의 보다 깊은 이해와 동아시아의 평화 증진을 위해 2년마다 한 번씩 만나 모임을 갖기로 하여 올해 5번째 모임이 동경에서 있었습니다. 일본 기독교는 일제시대 때에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하나의 교단으로 통일된 이후 교파가 따로 없습니다. 물론 소수의 여러 교파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기독교는 하나의 교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와 같이 진보교단이니 보수교단이니 하는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은 지역별로 나누이는데, 일본 기독교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지역이 동경북지구입니다.

 

1975년 일본 교계는 대동아전쟁과 한반도 식민지 점령에 대한 죄책고백 문제로 심각한 내홍에 휩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죄책고백문은 기독교 전체 이름으로 내지 못하고 총회장의 이름으로 내었던 것인데, 이때 일본 기독교 전체의 이름으로 죄책고백문을 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던 곳이 동경북지구에 있는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동경북지구는 남한의 기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 있는 몇몇 교회들은 70년대 박정희군사독재정권하에서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남한교회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 땅을 팔아 이를 후원하기도 하였는데, 지금 그 교회는 건물이 기울어져 가고 있어 보수를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지금도 박형규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제일교회와 북지구의 한 교회는 자매 결연을 맺고 교인들이 서로 오고가며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도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애를 써왔던 교또의 기다시라가와 교회와 자매 결연을 맺으려 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교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신 사에끼목사님께서는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에는 저희 교회에 출석하셨고, 홍근수목사님과 홍창의장로님 그리고 저도 그 교회를 방문하여 하늘뜻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70년대 남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세계 교회들과 일본 교회들이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저는 평소 한국교회는 빚진 자로서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제3국 특히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힘써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빈민지역에 선교회관을 하나 지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울노회와 동경북지구 교회와의 만남은 단순히 교회간의 교류가 아닌 사회적 정의실현과 동아시아의 평화 실현이라는 큰 구도 안에서 진행되어온 특별한 만남입니다. 여기에는 한일 청소년 수련회와 여신도회간의 교류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현대사회의 신음에 답하는 교회 - 갈릴리의 예수를 생각하며”라는 주제 하에 모였습니다. 저의 오늘의 하늘뜻펴기는 이 주제에 맞춘 것입니다.

 

[일본교회의 현황]

 

현재 일본교회 또한 남한교회와 같이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 일본 목사는 말하기를 10년이 지나면 인구 1%에 지나지 않은 일본교회는 절반으로 줄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교인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반면 교회는 계속 노령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는 일본에 가면 대형교회에 속합니다. 이번에 제가 가서 말씀을 전한 하큐닌초 교회는 전체 교인이 약 40명 출석교인은 2,30 여명 정도입니다. 어린이나 중고등부 그리고 청년들의 모임은 없습니다. 4,50대는 서너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60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정도 교회면 큰 교회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남한에서의 향린교회와 같이 동경북지구 안에서도 매우 독특한 교회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 건물을 갖지 않는 선교 지향적인 교회이며 평신도목회를 지향하는 교회로 행정은 물론 하늘뜻펴기 또한 평신도들이 한 달에 두 번 전하고 있었고, 예배 또한 독특하여 모두가 동그랗게 앉아서 대화 형식으로 진행을 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모두 도시락을 들고 와서 하늘뜻이 끝나면 도시락을 먹으면서 약간의 담소를 나누고 바로 이어 하늘뜻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고 주기도를 드림으로 그날의 예배를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보통 예배 시간은 3시간 정도 걸리는데, 지난주는 물론 통역이 있어 그러긴 했지만, 4시간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끝날 때에 목사님이 4시간 예배는 기록이라고 하시기래 그래 저도 기록이라고 답했습니다. 오래 전에 러시아에 가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교인들이 박수를 계속 치면서 앵콜을 요청하여 연속하여 하늘 뜻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때도 4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었습니다.

 

올해는 기독교인이었던 안중근의사가 조선침략의 주역이었던 이또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중근의사는 당시 일제가 주창하던 군사침략에 의한 평화는 거짓된 평화이며 조선 중국 일본이 함께 걸어가야 할 동아시아의 평화론을 얘기하였습니다. 또한 내년은 국치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은 침략의 해요, 한국은 합병을 당한 해이기 때문에 아마 양국이 이를 공식적으로 기념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한국과 일본의 양심세력들이 힘을 합쳐 죄책고백과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여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려는 일본 보수주의자들의 힘을 꺾도록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안의 평화운동에도 더 큰 노력을 기울려야 할 것입니다.

 

[남한 사회의 신음]

 

그간 우리는 근 30년의 군부독재의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와 인권분야에서 세계에 자랑할만한 일들을 이룩하여왔는데, 이명박정권이 들어선 이래 계속 뒷걸음질을 치다가 급기야는 지난 주 우리는 두 건의 사법부 판결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슬픈 일을 목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관련 판결입니다. ‘절차는 잘못되었지만 법은 유효하다’는 매우 우스꽝스럽고 모순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절차가 잘못되었으면 그 결과도 잘못된 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인데, 이 헌법재판소의 판사들은 법리적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자신들의 자리에 연연하는 당리당략적인 정치적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 누리꾼들은 이런 모순을 패러디하여 말하기를, “오프사이드는 맞지만, 이미 들어간 골은 점수로 친다.” “대리시험은 위법이지만, 발표가 났으니 합격은 인정한다.” “도둑질은 불법이지만 장물은 합법이다.” “위조지폐임은 분명하지만, 이미 거래가 끝났다면 이는 합법이다.” 물론 예전에 삼성재벌의 불법 승계 판결에서도 경험했던 일이지만, 힘이 있는 자가 정의로 둔갑하는 이런 판결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이 남한 사회에서 신음소리가 가장 큰 용산참사의 희생자 가족들에게 모두 중형을 선고한 일입니다. 공소장을 3천쪽이나 내어 놓지 않는 불법을 검찰이 저지르고 있어, 판사는 얼마든지 검찰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음에도 판사는 검사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였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 특수경찰의 막무가내식의 진입이 6명의 죽음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판사는 모든 죄를 철거민들에게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8년형을 선고받은 아들은 철거민의 생존권을 위해 외치다가 아버지가 불에 타 죽은 것도 억울하고 서러운 일인데, 아버지의 죽음의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저들의 한의 신음소리가 지금 하늘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지금 사법부는 정권의 눈치를 보던 30년 전의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게라사와 광인]

 

오늘 본문 게라사 지방의 한 광인의 이야기는 4장 35절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야기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저어 가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갔다.”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라는 말씀은 단지 물리적인 건너편을 말하는 것이 아닌, 갈릴리 저편 곧 이방인의 땅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에 ‘강 건너 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강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강 건너의 일이 구경만 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우리의 일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강 건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그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는 더러운 악령이 들린 미치광이가 한명 살고 있었고 그는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무덤에서 살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얘기가 그냥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상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워낙이 폭력적인 사람이라 마을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쇠고랑으로 묶어두어도 바로 이를 끊어 버립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폭력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는 치유가 불가능한 당시의 절망적인 사회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밤이나 낮이나 묘지와 산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합니다. 이는 악과 폭력의 자기 파괴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자 곧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하고 명령하신 후에 그 이름을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레기온 군대라고 합니다. 레기온이란 이름은 당시 로마의 연대병력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게라사 지방에는 당시 로마의 엄청난 병력이 실제로 주둔한 군사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때 우리는 이 악령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악령 ‘레기온’의 정체]

 

어떻게 해서 이 남자가 레기온이라는 군대의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로마군인들에 의해 침략을 당하고 집은 불타 없어지고 처와 딸은 능욕을 당해 이 남자는 미쳐버린 것입니다. 일본군에 의한 ‘남경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증언자의 기록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제5회 한일선교협의회 자료집 11쪽. [남경 대학살 생존자 증언집] 카토 미노루목사 번역 1999) 77세 남성의 증언입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한꺼번에 몰려 와 미친개처럼 사람을 보면 죽였습니다. 그날 오전 10시경 일본군 한명이 우리 집 문을 발로 걷어차고 억지로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은화 20원을 찾아내 빼앗고, 안경을 집어 던져 발로 짓밟아 부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어머니도 끌어가 중국군이 숨어있는 집을 말하라고 강요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배에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내장이 전부 튀어나와 고통을 몸을 뒹굴며 돌아가셨습니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광경을 보시며 괴로워하며 결국은 정신이상이 생겨 중풍으로 쓰러지셨다고 얼마 후 돌아가셨습니다. 64세 여성의 증언입니다. “당시 저는 19살로 결혼한 몸이었습니다. 땔나무를 주우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남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내 옷을 벗기고 몸을 범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는 음독자살을 하려 했지만, 응급조치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물론 이는 일본군에 의한 중국 사람들의 경우의 증언이지만, 이런 예는 우리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저 베트남에서는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의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택의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평생을 일구어온 농토를 군사기지로 빼앗기고 나서 그저 창문에 놓아둔 조그마한 화분만을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사신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지난 3주전 파주 무건리 훈련장 확장 반대활동을 했던 오현리의 주민 남 모(46) 씨가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남 씨가 작년 9월, 파주경찰서 앞에서 토지감정평가단의 토지감정에 항의하는 촛불문화제에서 경찰에 연행된 이후에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고, 집에서 칩거하는 날이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고인의 동생또한 말하기를 "지난 9월 파주에서 연행되고 나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며 "판사한테 이의신청을 보냈는데, 형이 촛불문화제의 주동자로 몰려 벌금 200만 원이 나오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형은 평소에 무건리 훈련장 확장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어항에 있는 물고기는 어항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합니다.

 

레기온의 악령에 사로잡힌 희생자는 저 2천년 전 팔레스타인 게라사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들 주변에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매년 미군 주둔비로 지출하는 비용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5조 5천억원입니다. 그런데 이 금액은 남한 4년제 대학 등록금을 대체할 수 있는 돈입니다. 지금 남한 사회는 사교육비 지출로 인해 온 국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명박씨가 대통령후보 시절 대학생 등록금 절반으로 줄여 주겠다고 거짓 공약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남한은 수치상으로 볼 때에는 세계 십 몇 위에 해당하는 경제 대국입니다. 그러나 교육 의료 복지 주택 수준을 보면 세계 3, 40위권의 중위권 국가정도입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군사비 지출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돈은 버는 데, 이 돈이 어디로 가는가 하니 먹고 입는 곳으로 가지 않고, 전쟁을 준비하고 사람을 죽이는 무기 구입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무기가 다 필요한가? 지금 몇 개의 군사대국은 지구 전체를 폭파하고도 남을 핵폭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폭탄이 이렇게 필요한가요? 군사무기를 매년 신무기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인가요? 이는 마치 TV의 신상품 광고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상품을 소유하면 마치 화면에 나오는 그 사람과 같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물건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치 F15니 F16 전투기라고 하는 신상품이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의 상술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35년째 내전 중인 나라에서 미군이 계속 희생해야 할 가치를 찾지 못하겠다.” “저항의 본질을 모른 채 이 나라 정부를 계속 밀어주는 것을 보니 남베트남을 지원했던 미국의 과거가 연상된다.” “알카에다 세력을 막고 현지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라면 파키스탄과 소말리아, 수단과 예멘도 모두 침공해서 점령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는 반전 평화운동가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전에 참가해서 전투와 재건 작업, 외교 업무까지 수행했던 미 해병대 전직 장교인 매튜 호가 최근 미국방부에 제출한 사직서에 적은 ‘아프칸전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들’에 실린 얘기입니다.(경향신문 2009년 10월 29일 8면)

 

[신음소리의 정체]

 

이번 한일선교협의회에서 왜 개교회의 성장이나 교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가지 않는 이런 모임을 계속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는 어떤 회원의 질문에 한 일본 목사님께서 일어나시더니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양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평화를 위해 함께 손을 잡고 이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궁극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고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나라가 군대를 해산하고 군사무기를 해체하는 일을 위해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실현 불가능한 하나의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더 나아가서 남북한 전 국민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전 주민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꾼다면 이는 분명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전혀 가보지 못한 곳으로 도망하는 가운데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 꿈 이야기는 단순한 꿈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아 이곳이야 말로 광야 땅 루스가 아닌 하느님의 집 벧엘이로구나.’ 그가 잠을 자기 전이나 잠에서 깨어난 후에나 그곳이 물리적으로 외양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다만 꿈을 꾸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이 하느님의 집이라 여기고 돌을 쌓아 이를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신음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자연이 신음 중에 있습니다. 이제 이명박정권이 건설붐을 일으켜보려는 흑심을 품고 강바닥을 파헤치고 댐을 만드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해 한반도의 자연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며, 몇 해전 뉴올린즈의 댐이 무너져 엄청난 인명피해가 생겨났듯이 인간이 억지로 비틀어놓은 자연은 언젠가는 본연으로 회복하면서 인간세계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 손실을 끼칠 것입니다. 기계기술문명은 항상 인간에게 편리와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쟁무기와 핵무기라는 가공할만한 폭력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러한 군사무기와 경쟁과 탐욕의 물질문명의 희생자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미쳐가고 있습니다.

 

10년 전 고교생 두 명이 12명을 살해했던 미국 콜롬바인 고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2년 전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사건을 일으켜 32명의 대학생과 교수를 죽인 23세의 조승희사건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동경 아키아바라 거리에서 25세의 가토라는 청년이 차를 몰고 인도로 진입하여 17명을 치고 차에서 내려 괴성을 지르며 닥치는대로 칼을 휘둘러 7명을 죽인 사건은 일본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승희나 가또 그들은 둘 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들이지만, 그 마음속에는 깊은 어둠과 신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조승희는 대학교의 희곡 수업에서, 의붓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소년이 해머나 전동 톱을 들고 나오는 등의 잔학한 작품을 썼고, 기숙사의 자기 방에는「부자 놈들」과 같은 유복한 학생들에 대한 증오를 메모에 남기기도 했으며, 가토는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활달한 우등생이었지만, 고교 진학 후 점차 주위와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후 2년제 대학을 다닌 후 파견 사원으로 공장에서 일하며 정리해고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다 소외감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입니다.

 

“언뜻 보면 보통 아이지만, 고독감과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대우가 불공평하다고 느껴 우울해지면서 판단력이 왜곡되고,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자살보다 오히려 타인 살해를 결심한다.” 범죄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가끔 이유 없는 연쇄살인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이지만, 일본은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이 집안의 자기 방에만 처박혀서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 사회의 불안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의 ‘호수 저편’]

 

이러한 신음 속에서 교회는 과연 어떻게 답을 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질문하여 봅니다. 우선 우리는 마르코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그러한 신음의 자리에 직접 찾아가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곳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이웃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호수 저편은 이편과는 전혀 삶의 상황이 다른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미워하는 로마의 군대가 거주하고 유대인이 불결한 동물로 여기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지역이요, 기피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곳으로 가지가고 하시고, 거기서 군대 악령 곧 전쟁으로 인해 온 가족이 쑥대밭이 되어 무덤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 미치광이를 만나 그를 고쳐줍니다. 단지 한 개인을 고쳐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나온 군대귀신을 모두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물속으로 수장시키고 맙니다. 이는 모세 일행을 죽이려고 쫓아온 애굽 군대가 홍해바다에서 수장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로마군대가 지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이 얘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평화현장예배’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함께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미군기지 확장으로 쫒겨 날 위기에 있는 평택의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과 파주의 무건리 농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분명 강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 악령들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 악령들을 그곳에서 쫓아내지는 아니했습니다. 몸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왔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여전히 호수 이편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3주전 자살을 한 파주의 한 농민의 얘기를 들으면서 과연 우리는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일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아파하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깊이 들어주는 일까지는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깊이 들었습니다. 용산의 희생자 5가정을 한 명 한 명 저들의 가족을 만나고 깊은 신음의 소리를 듣지는 못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평화나눔공동체가 되었든, 신도회가 되었든, 부서가 되었든 이 소그룹들이 한 가정씩을 맡아 이들의 신음소리를 깊이 듣는 기회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마르코복음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배를 타고 함께 건너 온 12 제자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은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왔지만, 아마 배에서 내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마르코 복음 저자는 그들은 이방인이 거하는 더러운 장소에 발을 내리기를 꺼려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음의 현장에 가긴 하였지만, 그 신음소리를 내는 그 사람들과 직접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얘기하는 일은 피한 우리를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침 받은 광인을 본받아]

 

그 대신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고침을 받은 이 남자는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을 고쳐주었다는 얘기를 전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일어난 일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에게 떠나가 달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을 고쳐주었는데, 왜 예수에게 거기를 떠나달라고 얘기했을까요? 단지 그들이 돼지 떼를 기르는 목장주인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들은 아마도 로마군대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기지촌 주민들이었기에 로마 군대가 없어지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고침을 받은 그 남자를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라고 말하자, 그는 이 일들을 데카폴리스 지방 곧 로마가 세운 열 개의 도시마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예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 열 도시에는 모두 레기온의 악령에 붙잡힌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는 예수께로부터 받은 치유 능력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 사람들은 놀랐다는 얘기로 복음서는 그 끝을 마감합니다.

 

이 얘기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선은 강건너 편으로 가는 결단을 해야 하고 그리고 배에서 내려 그 신음의 현장 무덤가로 찾아 들어가 거기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고쳐줄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한 개인의 치유만으로 그치지 말고 그 병의 근원이 된 악령 곧 군대귀신 레기온을 추방하는 일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다 크고 작은 각자의 신음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다 각자의 고민거리가 있었을 것이고 저들 가정마다 문제거리가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서 머물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 정의와 평화 생명의 하느님 나라 건설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문제를 포기하거나 방기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문제의 근원을 보았을 때, 그건 자신들의 혼자 힘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았던 것이지요. 자신들의 신음소리 그 끝을 파고들었더니 거기에는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권력과 욕망의 폭력 구조가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이 폭력의 구조를 끊지 않는다면 여전히 개인은 아무리 용을 쓴다하더라도, 소위 말해 천 명에 하나, 만 명에 하나 성공을 한다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그 악의 구조 속에 매몰되어 신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레기온이라는 군대귀신의 악령은 저 대추리나 무건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남한 땅에만도 2만 2천마리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 악령은 지금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을뿐더러 오끼나와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그곳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는 이 악령들로 인해 살상과 폭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선 서울노회와 동경북지구는 가까운 시일 안에 오끼나와의 미군기지 현장을 함께 찾아가 레기온의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찾아가자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오끼나와의 현장을 찾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가 오끼나와를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떠서 돌아보면 우리들 주위에는 이런 신음소리들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되어 신음의 현장을 찾아가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혼자서는 힘이 들어 포기하기가 쉬우니까 예수님은 향린 교회라는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서로서로 격려하고 기도하고 힘을 내어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에 동참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의 결단입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함께 배를 탈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그리고 함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할지라도 그 배에서 내릴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 배에 남아 한 명의 구경꾼으로 남을 것인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마르코가 전한 오늘의 성서 얘기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는 물러 가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두루 알렸다. 이 말을 듣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