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공동체 주일 강단교류

제 물

창세기 22, 6 - 12 ; 로마서 12, 1 - 2


김 경 호 목사

 
       
오늘 본문은 “너희 몸을 산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라고 한다. 여기서 예배라고 번역된 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제사’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것은 번제물로 짐승이나 곡식을 드리는 거룩한 의식을 말한다. 엄격하게 구별된 장소, 구별된 시간에 드리는 것이 제사이다.

        그러나 바울은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여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그 거룩한 곳을 일상의 거리, 저잣거리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거룩한 장소를 해체해 버리지만 우리에게 오히려 힘들다. 제물을 한 번 드리고 내 의무를 다했다고 하면 좋겠다. 아니 우리 몸을 한 번에 제물로 드리는 것도 그것이 비록 자기 목숨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드려라.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드리라는 말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이라고 한다. 바울은 사도들을 기둥들이라고 한다. 보이는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로 그 기둥(갈라 2:9)이고 성전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신 말씀(요한 2:19)을 그대로 계승한다.

        바울은 보이는 건물을 보이는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참 교회는 무엇인가? 참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바로 교회이다. 여기에 바로 놀라운 반전이 있다. 성과 속을 뒤집는 반전이 있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바로 교회이고 거룩이고 예배라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대우 학술총서 59, 1993, 민음사 간)에서 인간이 가진 폭력성은 직접 표현되지 않고 언제나 희생물을 찾는다고 했다. 인간의 복수가 복수를 낳고 서로 보복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겉잡을 수 없게 되어 서로 공멸의 위기를 느끼게 될 때, 인간을 희생제물을 찾는 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폭력이 가장 승화된 형태, 집단이 가진 폭력을 외적으로 돌리는 것이 제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 제물에게는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찬사를 돌린다. 지라르는 모든 성스러움 가운데는 폭력이 있다고 했다. 자기들에게 다가 오는 폭력을 외부의 희생양에게 돌리는 것이 성스러움이다. 제물 외에는 모두가 찬성하는 만장일치의 폭력성이 제물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예수도 그렇게 희생된 제물이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 죽음의 억울함을 밝히고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한 것이다.   

        오늘이 바로 용산 참사 300일을 맞이하는 날이다. 우리시대의 제물은 용산에서 희생되신 분들이다. 그들은 분명 정권의 희생양이었다. 건설 정권은 초기에 반드시 철거민들을 길들여야 했다. 앞으로도 다가올 많은 재개발 사건, 건설 현장에 걸림돌(?)이 되는 세입자, 철거민, 점유자들의 기를 꺾어 놓고  길들이기 위한 표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화하자고 올라간 사람들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죽음에 몰아 넣었다. 불과 40명의 사람을 진압하기 위해 1만 2천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그리고 경찰특공대 등이 투입되어 인명을 희생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경찰로서 지켜야할 안전수칙이나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이 옥탑에 신나가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무리한 진압을 시도했다. 그런데도 수사는 오로지 ‘발화의 원인 화염병’이라는 전제 아래서 진행되었다. 불이 어디서 붙었는가하는 물리적 문제가 아니라 그런 위험한 상황을 누가 만들었나, 시민이 다섯씩이나 죽은 상황을 누가 밀어 붙였는가가 당연한 문제의 초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화염병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처음에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원인이라”고 증언한 경찰이 재판정에서는 말을 바꿨다. ‘자신이 흥분해서 미운 마음에 그렇게 말한 것이고 사실은 화염병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증언을 뒤집었다.

        그러나 부장판사 한양석은 용산 재판에서 정당하지 못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숨겨진 3천쪽 없이 판결했다. 판사가 자료를 제출하라고 검사에게 요구했으나 검사가 묵살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검사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검찰이 제시하는 자료만으로 판결했다. 적어도 그가 그 재판기록을 받았어야지 형식상 정당한 판결이 되는 것이다. 검찰을 압수수색하거나, 그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우면 자료를 제출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면 된다. 피의자들은 무작정 구속할 수 없으니 당연히 모두 보석으로 석방하면 된다. 그래도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공소시효 이후까지 재판을 연기해야 판사로서 정당하게 할 일을 다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양석의 판결은 “아들이 아버지를 희생시켰다”는 말이 안되는 살인죄를 뒤집어 씌웠다. 무리하게 판결을 하더라도 적어도 살인죄만은 뺐어야 했다. 한양석은 자기의 욕망을 위해 그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인 것이다.

        우리가 용산의 희생자들을 열사라고 부르고 그들을 거룩한 희생양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일 수 있다. 가족 들은 사실 ‘열사’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정부가 용산의 희생자들을 모든 세입자, 철거민을 길들이기 위한 희생물로 삼았다면, 거기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단지 돌아가신 분들이 인간적으로 불쌍해서 300일이 되도록 투쟁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희생이 모든 서민들과 철거민들의 권리를 위한 죽음이 되기 위한 싸움이다. 이들의 희생이 정부가 몰고 가는 대로 도심의 테러리스트들의 마땅한 죽음이냐? 그냥 실수로 인한 해프닝성의 죽음이냐? 아니면 이 땅의 모든 철거민, 서민들을 위한 죽음이냐를 판가름하기 위한 싸움이다. 이것은 거룩함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종교적이며, 우리 사회에서 성스러움을 지켜가기 위한 투쟁이다.

        르네 지라르가 거룩함, 성스러움은 살아남은 자들이 자기 안전을 위한 폭력이라고 했는데 아마 그가 한국과 같은 상황, 용산과 같은 현장에서 사유했다면 또 다른 거룩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번 재판으로 용산에서 희생되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뜻을 두고 계시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판사의 판결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되었다면 이들의 희생은 철거민을 위한 희생이 되었겠지만 이제 용산 참사는 한양석 판사의 판결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용산 참사는 정부, 지방자치 단체, 건설사, 경찰, 용역, 검찰, 판사 등 거대한 부정의 연결고리의 산물이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서 인권을 무시하고, 협박하고, 강제철거하고, 그들을 삶의 벼랑으로 내몰고 죽이는 그러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는 파렴치한 권력의 마수를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다. 이제 용산 참사를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 역사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도구로 삼으시고, 보다 큰 역사의 몫으로 쓰시려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서 분명 용산의 희생자들을 보다 거룩한 제물로 삼으시려나 보다.  만약 그 연결고리 중에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면 이 거대한 부정의 고리가 줄줄이 밝혀 질 텐데...... 의인 10명이 없어 망하고 만 도성 소돔과 고모라가 생각이 난다.  

        필자가 송파에서 빈민 운동을 할 때, 마침 비닐하우스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거리로 내 앉게 되자 급한 대로 종교, 사회 각 계층에 호소해서 이들을 위한 구제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빈민들이 아마 저 목사가 이런 저런 것을 얻어 오면서 구전이 많이 생기나 보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일체 필자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주민들 대표에게 물자가 건네지는 것을 보고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다. 그러더니 어느 날 이들이 내게 말했다. “목사님, 이 지역에 출마하실 때, 우리 2천명 주민들이 백방으로 뛰겠습니다. 출마만 하십시오.” 아마 출마를 목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여겼나 보다. 그래서 “저는 목사입니다. 정치할 의사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무언가 주고받는 것이 명백해야 편안하다. 그런 계산이 나오지 않으면, ‘왜 저 사람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가?’가 계속 불안하다.

        안병무 선생님께서는 이성의 세계는 주고 받기(give and take)가 명확한 ‘선물’의 세계이지만 신앙의 세계는 그것을 넘어서는 ‘제물’의 세계라고 하셨다. 신앙은 그 빤 한 계산의 세계를 넘어설 때부터 시작된다. 제물은 그것을 통한 어떤 대가나 결과를 전제하지 않는다(안병무, ‘제물-십자가의 의미’, 『구걸하는 초월자』75). 그것은 그 자체로 새창조의 사건이며 행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만약 그가 보다 큰 축복을 전제로 바쳤다면 벌써 제물이 되지 않는다. 그냥 아무 전제 없이 바칠 뿐이다. 히 11장에  “아브라함은 죽여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금방 하나님께서 살리실 줄 알고 쉽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그런 역사는 없다. 하나님이 살리시지만 언제 살리실 줄 모른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죽음이다. 언제 살리실지 모르는 그 불확실한 진실에 몸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멀리보고, 아니 어떤 댓가도 계산하지 않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몫으로 돌리고, 지금 손해나는 그 길로 가는 것, 하나뿐이 남지 않은 그 제물을 드리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길이다. 제물은 꼭 하나 뿐이 남지 않은 것을 바칠 때, 제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사렙다 과부의 모자가 굶주리다가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엘리야가 나타나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그것을 드리는 믿음이야 말로 제물을 드리는 믿음이다. 미리 다 안전망을 확보하고, 계산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하나를 기꺼이 드릴 수 있는 행위가 제물을 바치는 행위이다. 믿음이 아니고는 어찌 그런 길로 갈 수 있겠는가?

        이것은 기존의 질서가 아닌 오직 새로운 현실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히브 11:1). 내가 하나님께 계산하고 나가면 나 보다 훨씬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나의 얕은 속셈을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시겠는가? 아무 전제 없이 그분께 나아가는 것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라는 것을 현실로 사는 것,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새 현실이다. 내가 나를 드려야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도 자신을 드러내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 이후에 이미 아브라함은 이전의 아브라함이 아니고, 이삭도 옛날 이삭이 아니다. 물론 그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도 이전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과 상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안에 불 같이 단련한 새사람이 된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도 예수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예수가 되는 것이다. 희생물이 나의 안전, 집단의 안전을 위해서 남을 희생 시키는 제물을 찾는 것이라면, 르네 지라르의 말대로 그 희생이 집단의 폭력이라면, 예수의 십자가는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지고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희생의 또 다른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그것은 참다운 제물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새 역사를 일으키시는 뜻이 있는 것이다. 제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해서 되었든지, 타인의 폭력에 의해서든지 마찬가지이다. 한 제물에 가해진 폭력의 구조를 폭로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야 말로 거룩함을 찾는 것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거룩함을 만들고,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산제사를 드리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