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살다간 작은 예수들(13) 길선주(1)

다마스커스의 경험

여호수아 7, 7 - 12 ; 사도행전 9, 1 - 8


조 헌 정 목사


        향린교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3년 6월 당시 조선신학교 학장으로 계시던 김재준목사님을 중심으로 하여 태동한 교단입니다. 김재준목사님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시고 돌아와 서양선교사들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민족 신학교 운영을 꿈꾸며 김대현장로님의 재산 헌납을 받아 1939년에 서울 승동교회에 조선신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김재준목사님의 신학은 ‘자유혼’이라는 한마디로 정리가 되듯이 그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축자영감설과 성서절대무오설을 비판하고 고등비판을 받아들이는 신앙과 학문의 자유야말로 예수가 추구한 진리의 길임을 주장합니다. 그러자 이에 위협을 느낀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전통 교권주의자들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목사 파면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기장이라는 진보교단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1952년도 대구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에서 김재준목사님을 파면하는 표결이 6표차로 통과되었는데, 당시 김재준목사님을 반대하는 미국선교사들이 13명이었다는 사실은 기장과 예장이라는 교단 분열을 가져온 것은 실은 한국목사들이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1회 총회장으로 서양선교사 마포삼열목사가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교회는 그 출발부터 미국선교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 모인 기장 총회는 1953년의 분립을 기점으로 56회 총회를 열어야 할 터인데, 94회 총회라는 이름 아래 모였습니다. 이는 곧 기장이야말로 처음 출발한 조선예수교의 정통 교단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의 50개 이상에 가까운 모든 장로교단들이 하나같이 94회 총회라는 현수막을 걸고 있는데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사 올해 출발한 교단이라 하더라도 94회 총회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는 것은 마치 방금 시작한 가게가 원조라는 간판을 내어 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음식의 맛과 질에 있어 진짜 원조에 밀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기장을 비롯한 수십 개의 장로교단이 모두 원조임을 주장하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지만, 정작 문제는 그 모든 교단들이 조선기독교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교단임을 선포하지만, 실은 100년 후의 남한 사회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을 수립하는 역사의식이 있는 교단은 별로 없고 자기 교단의 입장만 생각하는 편협한 시각이 지배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장 교단은 김재준목사님의 신학과 사상에는 열중하지만, 그보다 앞선 여러 신학자들이나 타 교단의 신학자들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하지 않습니다. 분명 김재준목사님이 새로운 교단을 시작한 것은 맞지만, 김재준목사님 또한 그보다 앞선 많은 선각자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김재준목사님 또한 깡패 출신이요 병치유 이적을 많이 한다고 알려진 김익두목사님의 설교에 감화를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길선주목사님 또한 다른 교단에서는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라고 칭하지만 기장에서는 별반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서해석과 신학의 방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1950년대의 얘기이고 1900년대의 초기 교회 역사에 관해서는 따로 그 공과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반대로 다른 교단 또한 마찬가지로 분명 김재준목사님이 남한의 신학계나 교계에 미친 영향이 막대할진대, 이에 대해 바르게 판단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신신학자로 매도합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김재준목사님의 신학적 주장은 보수 교단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고 그를 이단으로 내어 몰았던 통합측 교단의 신학과는 하나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래 현재 남한의 신학은 대체로 교단을 옹호하는 일종의 교단신학이지 기독교신학이라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신학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교회의 시녀는 아니기에 때로는 학문의 자유를 지켜내고 교회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따가운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했다간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철퇴를 맞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감리교 교단은 신학교 학장까지 지낸 세계적인 학자를 학교에서 쫓아내고 목사 면직까지 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길선주의 삶]


        따라서 제가 오늘 향린교회 목사로서 길선주목사님을 주제로 삼아 얘기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선주목사는(1869-1935)는 장로교 최초의 7명의 목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당시 이천 오백명이나 모였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새벽기도를 시작하신 분이고 1907년 대부흥운동의 집단적인 회개와 거듭남의 영적 체험을 전국적으로 파급하여 기독교를 조선 땅에 뿌리내리게 한 분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교회사적/민족사적인 비판은 다음 시간에 할 예정입니다만, 그는 장로, 조사, 목사로 사역하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생활과 교회행정 체계를 토착적으로 정립한 사람입니다. 안수집사 외에 서리집사를 시작하셨고, 당시 남녀간의 칸막이가 처져 있던 것을 없앰으로 여성해방에 기여하시기도 하셨고, 여전도회를 창설하여 여성들의 교회활동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또한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직과 전도국장이라는 공직을 맡을뿐더러, 기미년 독립선언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분도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죄 판결을 받아 독립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문제가 되었고 후에는 교회분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요한계시록에 몰입하여 ‘말세론’을 주창하여 나라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교인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현실 도피적인 보수적인 신앙을 심어준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에 대한 선교사 게일의 인물 평가입니다. “그는 만사에 지혜롭고 갈등하는 상황을 화해하는 능력이 있으며, 두려움이 없고 온유하다. 그는 평양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즐거이 무릎을 꿇고 경청한다. 그는 비록 지성적인 경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심령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하느님이 사용하시는 미묘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로서 그는 청중을 웃기는 법을 알고 있다. 사역자로서 그는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강철같이 강력하게 붙잡는 법을 안다.”(<길선주목사의 목회와 신학사상> 허오익 대한기독교서회 2009. 7쪽에서 재인용) 그리하여 그의 뛰어난 설교로 월남 이상재선생과 남강 이승훈선생같은 사회의 거물 인사들이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청년시절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평탄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부친으로부터 4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당시의 풍습에 따라 11세 때에 16세 되는 아내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께서 첩을 두는 일로 어머니가 심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됩니다. 마치 안병무선생이 아버지가 첩을 두는 일로 어머니 선천댁이 당하는 아픔을 통해 인간 삶의 실존적 죄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길선주목사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열 살이었을 때부터 세상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참 만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슬펐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서당에서 계속해서 어떤 새로운 진리를 찾았습니다. 나를 좀 더 밝은 빛 가운데 인도해 줄 분의 제자가 되기를 갈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열 살 때부터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더 나아가 당시의 격동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7세 때에는 형님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불량배 집단의 습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한 일이 있었고 이후 평양으로 이주하여 잠시 상점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실패를 하자 세상을 싫어하여 절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때 중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던 차에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나 을밀대에 가보라는 얘기를 듣고 거기서 한 도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선도에 깊이 빠져들어 차력까지 행하는 일종의 도인이 되었고 불교에도 깊이 입문을 합니다. 19세부터 29세까지 10년간을 수시로 입산하여 수도하였는데, 때로는 21일, 49일, 100일에 걸쳐 눕지 않고 쉬지 않는(불침불휴)의 기도에 전념하면서 주문을 외웠던 것입니다.


        그의 경지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하면 선술(仙術)에 통달하여 결가부좌로 앉아 주문을 암송하면 몸이 뛰어 오르는 초약(超躍)을 하였습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둔갑술을 배우던 한 친구에게 주문을 알려주자 이 친구는 사나흘이 되자 격렬하게 떨면서 초약을 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절간 천정을 떠받기까지 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것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길선주목사님의 일대기를 적은 목사인 저자도 약 50센티미터를 뛰는 것은 본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제 친구 또한 한때 그런 것을 배운다고 쫓아다닌 적이 있는데, 자기 스승 또한 그러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목사 아들이었으니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믿거나 말거나!) 하여간 길선주목사는 청년시절에 상당한 수준의 차력을 행사하였고, 이를 성서에 나오는 삼손과 같은 하느님이 주시는 힘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길선주는 배에 힘을 주면 사람들이 주먹으로 그의 배를 아무리 힘껏 후려쳐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망치를 손으로 끊을만큼 괴력을 보여주었으며 웬만한 개천은 단숨에 뛰어넘어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선술(仙術)과 한국 기독교]


        그러다가 같은 도인이자 친구였던 김창섭이 모펫선교사를 만나 개종을 하게 됩니다. 이 김창섭이 후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의 초대장로가 되고 또 목사가 됩니다만, 그는 길선주를 비롯한 많은 친구 도인들을 개종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평양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신흥 중산층에 속하는 상인과 객주들이었으나 두 번째로 개종한 이들은 도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까지 교회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도교적 영성을 무장한 이들의 강력한 영적 지도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생활 해보시는 분들은 물론이고 지금도 보수교회 안에는 기도의 사람이 되려면 ‘산에 올라가 소나무 한 뿌리는 뽑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방식은 바로 이러한 도인들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교회 안에 방언과 병 고침에 대한 은사운동이 매우 강한데, 이 또한 기독교로 개종한 도교인들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장수에 대한 관심이 높은 민족이 별로 없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도교에서 출발한 불로장생에 대한 희구 때문입니다. 이 불로장생의 염원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부활과 영생 교리에 접목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던 1890년대에 가장 애송된 찬송가에는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찬송가사가 들어 있습니다. “하늘엔 곤찬코 장생불로/ 신뎨가 쾌?야 장생불로/ 괴롭고 힘드러 세상사? 짐졌네/ 하늘엔 즐거워 장생불로”(61쪽) 게다가 성서를 구분 짓는 ‘구약 신약’의 이름 또한 장생불로의 약 이름으로 오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술 담배를 금하게 된 것이 서양 선교사들이 볼 때는 조선인들의 지나친 주초가 문제시 되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도교 출신의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20대 중반에 길선주는 한방 연구를 하여 한약국을 개업하고 동시에 양약국을 겸하였다고 하는데, 평양에서 한방과 양방을 겸한 것은 길선주가 효시였다고 합니다. 그가 주로 취급했던 양약품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던 금계납과 회충산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는가? 이 이면에는 청일전쟁이 있습니다. 그간 저는 청일전쟁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는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 전쟁이 조선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청일전쟁을 목격한 스크랜톤 의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2만명의 오합지졸인 중국 군인들이 두 달 간 도시를 점령하면서 가옥을 약탈하고 쌀과 솥을 빼앗아 갔으며 부녀자들까지 겁탈했다. 일본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8만 명의 주민 가운데 남은 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청일전쟁이 평양시민에게 가져다 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게 패한 것은 길선주와 같은 도교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신봉하던 유불선이 모두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에 정체성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래 스피어 선교사는 말하기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승리는 조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서양 문명과 종교를 한층 더 높이 평가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귀신 숭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중국신들의 숭배를 죽였으며, 남아 있던 불교의 일부 버팀목들도 잘라 버렸다.”(허호익 저 45쪽에서 재인용) 결국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일본의 승리는 조선인들이 가진 전통종교에 대한 한계를 각성시켰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대하 반감을 해제시키고 서양 기독교를 수용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혁명’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길선주는 처음 친구 김종섭의 전도에 완강하게 반대하였으며 그의 개종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도에 대한 7년 동안의 탐구과정을 거쳐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바울과 길선주]


        게일 선교사가 전하는 그의 고백입니다.


“옛날 기도하던 방식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번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다. 점차 나는 그렇게 완강히 붙잡고 있던 밧줄을 놓기 시작했고, 밧줄은 한 가닥씩 풀렸으며, 내 영혼은 심연 위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상실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 고뇌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일곱째 되던 날 지치고 절망한 나는 반 홍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는 갑자기 ‘길선주야’라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고, 그 소리는 반복해서 울렸다.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방 자체가 변형되었고 영광스러운 빛이 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내 영혼에 안식과 용서와 애정이 자리 잡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얼마나 기뻤던가!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내가 수년간 고뇌하며 찾았던 하느님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자가 되어 마음이 편했다.”(55쪽에서 재인용)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의 다마스커스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회심을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오해라고 생각하며 당시의 최고의 엘리트였던 바울이 회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고 있었던 사람이기에 오래전부터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에 관한 증언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길선주가 친구나 모펫선교사 그리고 기독교에 관련한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쉽게 개종하지 않았듯이 바울 또한 그러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청년 길선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것은 친구 김종섭의 변화입니다. 저는 그래서 바울 또한 누군가로부터 큰 영향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그 인물은 스테파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어 그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피를 흘리면서도 저들을 용서해달라는 스테파노의 기도소리를 듣고 그의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의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유대교의 율법 종교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신앙의 기쁨을 경험한 것이고 바로 이 경험이 그에게 회심의 단초를 주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유대교라는 밧줄에 매여 있었듯이 길선주 또한 유불선이라는 밧줄에 매어 있었던 것이고, 구원의 밧줄을 놓아버렸을 때의 상실감과 절망감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바, 이를 루가는 사울이 사흘 동안 시력을 상실한 것으로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반면, 길선주는 이를 칠일동안의 혼수상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영광스러운 빛이 환하게 비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울의 다마스커스 경험을 극적인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극적이라는 말은 시간의 짧음을 두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사람이 오히려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길선주 또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완강히 거부하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회심 또한 매우 극적인 것입니다. 그래 이러한 체험을 하자마자 김종섭과 함께 예배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친구가 길선주에게 기도하라고 말한 즉 매우 확신에 찬 기도를 하여 모든 교인들이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의 회심의 얘기가 알려지게 되어 미국을 비롯한 만국주일공과에 예화로서 실렸고 독일의 어느 주일학교에서는 이를 읽고 헌금을 하여 송금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유불선이 없는 예수교의 도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요 두 번째는 부활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길이요 세 번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과 예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실은 이 세 가지의 깨달음은 물론 기독교의 핵심교리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운동의 거점인 갈릴리가 갖는 민중해방과 예루살렘 성전숙청이 보여주는바 정치권력에 저항했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기독교의 아버지라고 존경받는 길선주목사님의 한계만이 아닌 오늘의 남한 기독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매우 단순한 교리와 감성에 기초한 기독교 이해를 바탕으로 길선주목사로부터 시작된 1907년의 회개 부흥운동은 분명 조선 기독교에 수적인 성장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불신지옥 예수천국’이라는 일차원적인 구원 신앙이 남한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 오늘날 대다수의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남북평화협정이나 미디어법이나 한미FTA나 미군주둔이나 4대강사업에 대해서는 장로대통령이 수반으로 있는 정부가 하는 일이니 무조건적인 동의 내지는 그런 사회적 이슈들은 신앙과는 관계가 없다는 몰역사적인 입장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질문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믿음을 성장시킴에 있어 질문과 의심은 필수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과 비판은 불신과 회의를 낳는 죄와 동일하다는 이성불신주의를 조장하여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맹목순종신앙과 구원획일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입니다.


        1907년의 회개부흥운동에 관련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겠습니다만, 오늘은 향린교회와 밀접하게 관련된 길선주목사님의 공헌에 대해 얘기함으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길선주와 국악]


        길선주목사가 활동하던 시절은 중국이 물러나고 일본의 지배가 가시화되는 시기로 자연히 미국을 중심한 서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래 길선주목사 또한 서양문화 도입에 앞장선 사람이었지만 동서의 문화적 갈등을 누구보다 슬기롭게 해결하고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서양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조선 최초의 교회 성가대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조선의 교회가 서양문화의 산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외국문화와의 갈등이 시작된 현실에 살고 있다. 이는 후진 민족이 당하는 가장 무서운 싸움의 시작인 것이다. 총칼의 승리는 외적인 모든 것을 약탈하고 그 민족을 포로로 하지만, 문화 싸움의 패배는 민족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교차로가 된 오늘의 교회가 외국 문화의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문화 위에 꽃을 피우는 기독교가 되는 때에 우리 민족의 종교가 될 것이다.”(97, 9쪽)


        그는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서양찬송을 따라 부르던 당시, 국악으로 찬양을 연주하였습니다. 그는 전통악기인 단소의 명인으로 1909년부터 “교회의 행사와 절기 때마다 조선의 전통음악을 연주하여 교회음악의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으며, 저명한 국악 악사 한 사람을 초빙하여 그의 집에 거주하게 하면서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과 성경구절을 선택하고 연주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찬송가를 ‘청북수심가’ 가락에 맞춘 시조창으로 부르게 하였고, 당시의 찬송가 여러 장을 국악찬송으로 편집하여 국악을 통한 민족적인 기독교정신문화를 세워가기 위해 애쓴 당시로서는 드문 목회자였습니다.(10쪽) 물론 16년 전 향린교회가 국악예배를 시작할 때, 길선주목사님의 뜻을 따라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기도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향린교회의 목회 안에 씨앗을 뿌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주전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국악 예배를 전파하기 위한 ‘우리가락으로 드리는 예배 워크샵’이라는 배움마당을 열었습니다. 예상보다는 적은 숫자가 모였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었고, 이는 분명 한국기독교의 미래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더욱 열심히 추진해야 할 사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에 몇몇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국악찬양선교단을 조직한 일도 고무적인 일입니다.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면 자신들의 교회에도 이 국악예배를 도입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합니다. 그럼에도 이 일이 쉽지 않음은 남한 사회가 너무 미국화되어 있고, 교인들 또한 지나치게 서구화되어 있어 자기 것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할뿐더러 민족음악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가 외적으로는 민족통일과 민중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내적으로는 우리 가락을 살리는 국악예배의 성장과 보급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50년 100년 후에는 적어도 반 이상의 남한교회들이 국악예배를 드리는 것을 꿈꾸면서 길선주목사님에 대한 전편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