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

이사야 61장 1-6절; 에페소 4장 11-16절

[용산참사 5분의 추모 초를 켜고 추모 시를 읽고 침묵기도 드림]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원래 사람의 수명은 서른 살이었다고 한다.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서른 살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나귀가 달려와 “하느님, 그렇게 오래 살면 저는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줄여 주십시오” 해서 당나귀의 수명을 십이 년 깎아 십팔 년이 되게 했단다. 그랬더니 개가 달려와 “저는 그렇게 오래 뛰어다닐 수가 없으니 저도 줄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해서 십팔 년을 줄여 십이 년이 되게 하였다. 이번에는 원숭이가 달려와 “저는 사람들을 웃기고 재롱이나 떨면서 사는데 늙어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깎아 주십시오” 하여 십 년으로 줄여 주었단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께 찾아와 “삼십 년은 너무 짧습니다” 하고 화를 내기에 당나귀와 개, 원숭이에게서 줄인 것을 모두 합쳐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은 팔십이 되었는데, 그 덕택에 사람은 사는 동안 당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고 개처럼 헐레벌떡 뛰어다녀야 하며 원숭이처럼 먹을 것을 던져 주는 사람 앞에서 재롱을 떨고 바보짓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독일의 한 민담의 이야기이다. 올 한 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짐과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나날들을 떠올려 보면 이 우화가 던져주는 의미는 상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순간순간의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면 우리 인생이 그렇게 헛된 노고로 이어지는 삶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은 목표를 잃어버렸을 경우이다.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은 중도에서 일어나는 어떤 역경도 헤쳐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가 목적지인지를 알 수 없을 때, 그 인생은 불안해지고 짜증이 일고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의 힘이 있다. 폴 틸리히가 말한대로 인간은 그 궁극적 관심을 품고 나아갈 때, 바른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우리는 살다보면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혼동합니다. 급하다고 해서 항상 중요한 일은 아니다. 또 중요한 일은 정말 시급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자기 성찰의 힘이 필요하고, 인생을 멀리 내다보는 혜안 곧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무슨 특별한 방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식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영혼이 성공하는 방식에는 특별한 방식은 없습니다. 매일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성서 말씀을 통한 묵상과 기도 훈련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영성의 깊이와 높이 그리고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스스로 측정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감사하는 삶]


첫째는 감사입니다. 살아가면서 감사가 많다면 그건 자신의 영성의 힘과 그 깊이가 아직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감사는 없고 불평불만이 많다면 그때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고, 성서말씀을 묵상할 때입니다. 이는 사회개혁을 하는 혁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 또한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지 불의에 대한 분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노에 기초한 열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연대의 끈을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의를 혼자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없다는 것은 사랑의 힘이 고갈되었다는 말이고,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연대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안의 감사를 측정하는 일은 우리의 믿음의 깊이와 영성의 정도를 아는 잣대입니다.


창세기 처음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인간의 원죄가 무엇입니까?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다는 그 신화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경고는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어디에서 출발하나요? 그건 우리의 마음에 감사가 메말라갈 때 교만이 생겨납니다.


감사에 관련한 몇 마디를 소개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감사 없는 소망은 의식 불명의 소망이요 감사 없는 생애는 사랑이 메마른 생애다. 어떤 아름다운 것도 거기서 감사를 빼면 이미 절름거리고 만다.” “감사는 기적을 창조한다.” ”감사는 위대한 교양의 결실이다. 야비한 사람에게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하는 감정이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감사하는 마음을 꾸준히 갈고 닦아라. 그러면 그대는 영원한 잔치를 즐길 것이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느님을 베푸시고 다른 속박을 풀어주신다.”


[도전하는 삶]


영성의 깊이를 측정하는 또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새로움을 향한 도전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도전이라는 말을 흔히 정치인들의 대권을 잡는다는 그런 거창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러나 결코 쉽지 않는 생활의 변화를 말합니다. “추운 날 어쩌다가 물주머니 두 개를 안고 잘 때면 그야말로 천당에 온 것 같아서 침대 전체가 물주머니라면 얼마나 근사할까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전기요를 깔아 침대 전체가 따뜻해지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예전에는 물주머니 위치에 따라 종아리가 발을 부러워하며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맛이 있었는데, 이제 전기요로 온몸이 한꺼번에 뜨거워지니 아쉬운 부위도, 부러운 부위도 없이 서로 무심해져버렸다. (중략) 나는 다시 물주머니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따끈따끈 말랑말랑한 놈을 안고 누우면 세상에 아쉬운 게 없다.”


이는 35년째 독일에서 살면서 독일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워 온 임 혜지씨의 책 <고등어를 금하노라>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직업적 성공을 포기했고,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했고, 좀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난방과 온수 그리고 좋아하는 고등어를 포기한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인간의 품위와 자긍심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불편을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불편이 적을수록 삶의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불편과 만족도의 관계는 벨 커브와 같아 불편이 너무 클 때는 물론 너무 적을 때도 만족도는 크게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젊어서 뼈 빠지게 고생해서 돈을 모으고, 나이 들어서는 일 안하고 편한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획은 대단한 착각이며 불행의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삶의 깊은 만족감은 불편을 적극 껴안을 때 찾아옵니다. 단, 어떤 불편이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불편을 기꺼이 껴안을 때 가능합니다. 가치추구에 따른 불편!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발적 불편이며, 이 불편은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한 불편이 아니라 즐거운 불편이 되어 깊은 만족으로 삶을 인도합니다.


독일 시인 귄터 아이히는 <꿈>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2010년을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도전을 합니다. “불편을 겪어라. 그리고 세계라는 장치 속에서 기름이 아니라 모래가 되라.”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행복에 겨운 삶을 살라고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변화를 시키려면 우선 불편하게 살라는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래처럼 버긋거리는 방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소금이 되어 불의를 막아내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둘 다 자신의 몸을 사르고 녹이는 일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신앙 훈련소입니다. 교회는 분명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방주 개념은 잘못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세상 사람은 다 지옥에 간다고 하는 기복 신앙인을 만들어내기에 저는 교회는 세상에 나가 싸울 군사를 양성하는 훈련소라고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방식은 기름의 방식이 아닌 모래의 방식입니다. 모래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은 불편하기 살기라는 도전정신입니다.


[향린교우가 된다는 것]


이제 이러한 감사와 도전이라는 신앙의 열쇠말을 붙들고 오늘의 향린교회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다시피 현재 저희 교회는 매년 60-70여명이 새롭게 등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새해 첫 주에만도 5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원은 다른 교회와는 질적으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향린교회 정문을 통과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밖에 걸려있는 현수막 구호에 동의해야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빨갱이라고 불리는 비난을 받을 각오가 있어야 들어옵니다. 향린교회를 가겠다고 하면 주위에서 말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가족들이 반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따르게 되면 가족 안에 불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실감하는 교우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심지어는 회사에서조차 향린교회는 다니지 말라고 하는 얘기를 들은 교인도 있습니다. 그래 등록은커녕 방문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곳이 향린교회입니다.


세 번째는 직접 십자가를 저 앞에 달아야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결코 등록하지 못합니다. 기존 교인들은 교인으로서 하는 일종의 예식에 불과할 수 있지만, 새로 등록하는 교인들에게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주문이자 도전입니다. 여기에 징을 치고 국악으로 예배를 드리니 이일 또한 우리 가락에 대한 애정과 민족인식이 없이는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은 분명히 사회와 민족 그리고 정의 평화 생명에 대한 하느님 나라 민중운동에 분명한 사고와 의식을 지닌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교인 숫자를 말할 때에 향린교회 한명과 다른 교회 한명과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는 목사님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민교회 교인 한명은 남한교회 교인 열 명, 스무 명에 해당한다고. 도시 전체에 한인 인구가 수백 명밖에 안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백 명도 안 되는 경우도 많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신 출신 기장목사님들이 섬기는 교회는 신신학이니 이단이지 하는 헛소문이 하도 많아 교인이 더 오지 않습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에 이런 이유로 나간 교인들도 제법 됩니다. 그래 기장출신 목사님들끼리 모이면 기장이민교회는 다른 이민교회 열 명, 스무 명과 같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향린교회 한 명은 다른 교회의 몇 명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스스로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향린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참으로 독특하신 분들이요 뛰어나신 분들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면 다 지도자 되실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분들이 지난 3년동안 등록하신 분이 160여명입니다. 이 숫자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질적인 의미에서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리고 남한교회 전체 기독교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현 상황에서 가장 진보적인 향린교회에 교인이 는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남한 교회에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교회사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분이 향린교회를 미래를 이끌고 갈 대안교회 중의 하나로 선택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향린교회를 연구대상으로 삼았고 그분들은 보수교회 출신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사실은 많은 교회들이 향린교회를 목회 모델이나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 청주의 디모테오성당 지도자 세미나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지금 이 성당은 정의평화사제단의 총무로 계시는 김인국신부님이 섬기시는 성당이고 7년 되었는데, 등록신자가 4천명 출석은 천명이 나오는 성당입니다. 천주교가 성장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부흥하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를 부른 이유는 향린교회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향린교회의 정신과 목회에 대해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의 당면 과제]


그런데 우리가 외부적으로는 그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내부적으로는 여러 목회적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등록교인이 는다고 해서 좋아할 일은 아닌 것이고, 그들이 얼마나 많이 정착하고 또 제대로 훈련을 받아서 향린교회의 참다운 교인이 되고 나아가서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군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교인이 이렇게 등록한다고 해서 전부 다 정착하는 것도 아니고 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래 된 교인들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새교우들은 대체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교인들이 별로 없고, 오래된 교인들은 자리 또한 넉넉하지 못하니까 혼잡을 피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따로 모일 장소도 마땅치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별로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번듯한 교회당 하나 짓고 저 밖에 걸린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는 현수막만 내리면 천 명 이천 명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일지 다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는 너무 골동품이라 남한 교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의자입니다. 아무리 오래된 시골교회에 가도 이런 의자는 볼 수도 없는 골동품입니다. 수십 년 전의 사람들의 체형에 맞춘 의자로 낮고 폭도 짧습니다.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큰 사람은 걸치고 않아야 합니다. 그래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한 시간 앉아 있는 것도 영성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골동품 조심스럽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때로는 손가락질 받기도 하는 향린교회에 등록하신 분들이 많아지는데, 이를 우리가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식하면 체하는데, 이러다가 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사도 바울로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에 속한 여러 지체들입니다. 이는 매우 간단한 개념이지만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몸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어느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것이 몸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가요?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불과 5백 명 교인 정도에도 우리는 몸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교우가 아파하고 있어도 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픔은커녕 이름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의 행사 모임일 따름이지, 한 몸으로서의 교회, 생명체로서의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 오늘 향린교회가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이룩하는 일입니다.


주일예배 참석이 어른 300여명 되는 교회에 한해 새로 등록하신 분들이 70명이라고 한다면 이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4분지 일이 새 교인이라는 사실은 큰 도전입니다. 교회가 5년 정도 된 신생교회라면 이는 그리 큰 도전이 아닐 수도 있지만, 57년이 된 교회에 1년이 안된 새 교인이 4분지 1이요 3년 내 등록 교인이 160명, 출석교인의 절반이라면 이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이를 잘 대처하지 못하면 저희 향린교회는 내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세대를 예전에는 30년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워낙 변화가 심해 젊은이들은 5년 정도 차이가 나면 세대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분들의 나이 차이가 거의 50년 60년에 가깝습니다. 세대로 따지면 4,5 세대의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한 세대만 달라도 생각이 다르고 소통에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 우리 안에 소통의 문제가 있고 같은 문제에 대한 의견차이가 큽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로 모였기에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룩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지금 장례식을 하면 관련 신도회만 나옵니다. 얼마 전 심연희권사님 경우에도 젊은층에서는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결혼식을 하면 어르신 교우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습니다. 교인이라면 한 몸에 속한 지체라면 장례식과 결혼식 참여는 기본인데 이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교인들의 참여가 그렇게 저조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민교회를 섬길 때는 전 교인이 함께 했거든요. 현대사회가 분업사회요 개인주의로 나아이긴 하지만, 교회는 이 흐름을 거스르는 곳입니다. 그러나 서로 알아야 장례식에도 결혼식에도 참석을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한다고 참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분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있습니다만, 분가할 때는 하더라도 몸으로서의 본래 교회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작년에 이어 <생명과 평화를 일구어 가는 교회>라는 교회 목표를 내세웠지만, 내적 목회의 최대과제는 몸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목회 용어로 말한다면 신구교우간의 만남과 나눔입니다. 7년 전 제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새교우강좌반이 3주 과정이었습니다. 목회자들과의 만남이 주였습니다. 이후 과정을 계속 늘려 지금은 10주로 정착이 되었고, 여기에는 교회의 여러 지도자님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 교인들과 함께 하는 1박 2일의 힘몰이 여행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연속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오래된 교우들은 향린교회의 좋은 전통과 신앙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그리고 새교우들은 이를 배울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나눔을 통해 피가 잘 돌면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 저는 지난 몇 년동안 기존의 구역을 살려내기 위해 애를 써보았지만, 한 구역장이 20가정 이상을 돌보아야 하는 역할이 너무 크고 시대 변화도 있어 지난 해 같은 경우는 두세 구역이 한 두 차례 모였지만, 거기도 새교우들은 거의 없고 기존교인들만 모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구역을 없애든가 새롭게 재개편하든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없애는 쪽도 여러 차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 저는 3년 전부터 <평화나눔공동체> 운동을 활성화시켜 구역조직을 대신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8개의 공동체가 있고 여기에 참여하는 교인이 대략 150명이 넘는데, 구역조직과는 반대로 70% 이상이 새교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교인들은 참석이 저조한 이유는 첫째 나이가 많아 주일 예배 이외 모임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고 새로운 교회 운동에 열정도 식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몇 몇 기존교인들로부터 불만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찬밥이냐? 조목사는 새교인만 좋아한다는 괴소문(?)도 떠돌아다닙니다. 우리가 이 교회의 주인인데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평화나눔공동체운동에 함께 동참하여 새로운 교인들과 서로 나누고 배우면 문제가 없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습니다. 새교인들과 활발한 접촉을 통해 자신의 신앙 열정도 회복하고 신앙유산도 넘겨주어야 하는데 잘 안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몸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가정입니다. 새교인은 일종의 갓 태어난 아기와 같고 기존 교인은 일종의 맏형이요 큰누나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도회는 남녀와 연령에 따라 애초에 구분되어 있고, 부서조직은 일을 목표로 하고 있어 신구간의 고른 참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 올해 제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기존의 구역조직을 대신하는 대략 12명을 한 가정으로 구성되는 가정구역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2010년도 활동계획서를 받고 있지만, 워낙 참여가 낮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분을 제외하고 모든 교인들을 이 조직에 일단 포함을 시키겠습니다. 아마 40개 이상이 될 것입니다. 지역이나 신앙연륜 나이 등을 포괄적으로 감안한 새로운 조직을 짜고 지도자 훈련 등의 과정을 거치면 첫 모임은 2월 중순경에 시작할 것입니다. 일 년에 4번 가정구역 주일을 정하고 전 교우들이 각 가정에서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교우들의 참여도 중요하지만, 장로 권사 집사님을 비롯한 지도자님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합니다.


에페소서 4장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들로, 요즘말로 바꾸면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장로로 소그룹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을 준비시켜서>에서 <성도>란 앞에 말한 직분을 받은 그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직분이 없는 신앙의 연륜이 짧은 새교우들을 두고 한말입니까? 이는 새교우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래 다음 구절에서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직분의 기본은 새교우들을 섬기고 교육시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가정에서 아이가 잘 자라도록 어른이 되도록 이끄는 일이 어버이의 일이요 형과 누나의 일이다. 동생의 지저귀를 갈아주는 일은 기쁨의 일이지 부담의 일이 아닙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은 교우들 또한 그렇게 누군가가 자신들의 지저귀를 갈아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성숙한 교인이 되었듯이 여러분들이 새교우의 지저귀를 갈아준다면, 그들 또한 앞으로 자라나서 다른 사람들의 지저귀를 갈아주는 일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 행함이란 이사야가 말하고 예수께서 외치친 나자렛선언에 있습니다. ‘억눌린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룰 주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함께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향린교회의 창립목적 가운데 공동체교회와 입체적교회 이상이 있다. 공동체 교회란 교인들이 가족과 같이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육신적으로는 같이 먹고 영으로는 같이 기도한다는 말이다. 서로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정신이다. 입체적교회란 세상에서 살아가는 서로 다른 직업과 재능을 함께 모아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처나간다는 정신이다. 서로가 서로를 신앙으로 돌보고 기도로 심방하는 그런 평신도 목회자 교회를 꿈꾸었습니다. 가정구역이 지향하는 목적이 바로 이런 것이다. 큰형 작은 누나 그리고 동생들이 함께 어우러진 가정의 기쁨이 있으면 교회 오는 것이 큰 기쁨이 됩니다. 일요일이 마냥 기다려지고 주중에도 서로 안부를 묻고 만나게 됩니다.


[입체적 교회/사회선교]


향린40년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들이 추구했던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잠깐 교회 나와서 한 시간 예배보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사회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성서공부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들의 확신이었다. 신앙운동은 전 생애를 바쳐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일날 한번 모여 예배보고 헌금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것만 가지고 ‘나는 할 일 다 했다.’고 스스로 안주해서는 안된다.>


안병무선생께서 한때 향린교회를 가리켜서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렸다’는 자책어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올해 호랑이해를 맞아 원래 그리려고 했던 호랑이를 그려내는 향린교우들의 열정어린 참여를 꿈꿔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의 말]


새해 아침의 기도


안도현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조아리고 새해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나 아닌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꿇어앉아 기도하게 하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평화의 강이 되어 출렁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뉘우치게 하소서.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과, 남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던 불끈 쥔 주먹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기분 좋게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소서.

무심코 내뱉은 침 한 방울, 말 한 마디가 세상을 얼마나 더럽히는지,

까맣게 몰랐던 것을 부끄럽게 하소서.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새해에는 부디 뉘우치게 하소서.


새해에는 스스로 깨우치게 하소서.

내 배부를 때 누군가 허기져 굶고 있다는 것을,

내 등 따뜻할 때 누군가 웅크리고 떨고 있다는 것을,

내 이마에 햇살이 닿을 때 누군가의 등에는 그늘이 지고 있다는 것을 새해에는 알게 하소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길 때

내 발 밑에 밟혀 죽는 작은 벌레와 풀잎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큰것보다는 작은것이 좋다는 것을,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 좋다는 것을,

높은것보다는 낮은것이 좋다는 것을, 빠른것보다는 느린 것이 좋다는 것을


새해에는 분명히 깨우치게 하소서.

새해에는 연약한 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빛나지 않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외롭고 쓸쓸한 것들의 옆에다 내 몸을 세워 주소서.

그리하여 새해에는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시고,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울긋불긋한 네온사인 아래 부초처럼 떠돌게 하지 마시고,

고요한 촛불 하나에 마음을 단단히 기대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하소서.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 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사랑해요, 라는 말이 새해에는 기어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하지만 사랑해요, 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오고가는 눈빛으로 사랑을 확인하게 하소서.

사랑 때문에 헤어져 아프게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새해에는 다시 사랑의 연둣빛 싹을 틔울 수 있게 하소서.

저 실업과 노숙의 거리,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골목길의 어둠을 새해에는 물리치게 하소서.

사람 사이의 반목과 지역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에게는

우레와 같은 호통을 내려 정신이 번쩍 들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세월 동안 잘 먹고 잘 입으며

살아온 사람들을 깊이 참회하게 하소서.

그들이 통일로 가는 기관차를 가로막으려거든 크게크게 기적을 울려

화해와 상생의 길을 함께 걷도록 꾸짖어 주소서.

새날은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라 발벗고 찾아 나서야 오는 거라고,

새해에는 자신 있게 말하게 하소서.

썩은 물은 나가고, 맑은 물은 들어오게 하소서.

새해에는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활짝 피게 하소서. 북소리가 둥둥둥 들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새해에는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그때까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당신에게 닿기 위해서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