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창립정신과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

출 23:1-13; 루가복음 4장 16-19


오늘은 향린교회가 이 땅에 태어난지 57주년이 되는 생일입니다. 생일은 자신의 태어난 하늘뜻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성찰하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선택한 출애굽기 23장의 말씀과 루가복음 4장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3장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던 히브리인들에게 모세를 통해 야훼 하느님께서 주신 계약의 핵심 말씀이고, 루가복음 4장은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면서 선포한 첫 번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4장은 생일에만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회가 닿는 대로 자주 읽고 묵상해야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앞서 40일 광야금식기도를 통해 악마가 던진 세 개의 유혹을 이겨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존재합니다만, 이 루가복음 4장만큼 분명하게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 구절은 없습니다. 영성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광야 40일 금식기도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의 영성]


첫째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아가는 돼지같은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영적 존재, 곧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담겨 있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세상에는 매일같이 새로운 물건이 나오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은 좀 더 빨라지고, 좀 더 편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영성이나 인간성이 함께 자라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나눔과 비임 속에서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영성의 힘은 줄어들고 경쟁과 욕망이 지배하는 물성의 힘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알기에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 자리에 나와 있지만, 우리들이 대답이 진리와 생명으로 대변되는 정신 영역에 속하는지, 아니면 우리들의 죽음과 더불어 찌꺼기가 될 물질 영역에 속하는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세상 권세자가 내게 절하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할 때, 이를 물리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정치지도자를 뽑을 때 무엇을 보고표를 던집니까? 그의 인격입니까? 그의 학식입니까? 아니면 그의 덕목입니까? 아니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입니까? 2주 후면 지방선거가 있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삼아 후보를 선택합니까? 누가 되면 집값이 올라갈 것인가? 누가 되면 내 수입이 많아질 것인가? 만약에 이게 기준이라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이 아닌 겉만 기독교인인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리치신 첫 번째, 두 번째 유혹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돌이 떡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악마에게 절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고 나날이 반개신교 정서가 이 사회에 퍼져 가는 있습니다.


우리가 받기 쉬운 또 하나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는 성공과 관련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한번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합니다. 예수께서 이 유혹을 받아들여 그래 사뿐히 내려 왔다면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매우 손쉽게 제자들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고 하느님 나라 또한 매우 손쉽게 이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제자는 주체적 결단을 하는 이성의 자유인이었지, 환상이나 기적에 마음을 빼앗긴 사유할 줄 모르는 노예들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적 인기에 기초한 하느님 나라는 마치 확 타오르다 쉬이 꺼지는 장작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을 거부하고 갈릴래아로 가시어 한사람 한 사람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들 주위를 돌아보면 이적이나 기적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여기가 좋다더라 하면 이리 몰리고 저기가 좋다더라 하면 저리 몰리는 군상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쫒아 다닌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다섯 개의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자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나갔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마저 흔들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상과 기적을 쫓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참 예수를 발견하도록 하는 하나의 보조기구일 따름입니다. 달을 보도록 하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가난한 민중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기에 그 희망을 간직하도록 하는 보조일 따름입니다.


[전제정치와 언론 장악]


환상이나 기적은 단지 신앙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세상 삶에서도 존재합니다. 삶의 단조로움과 팍팍함을 견뎌내기 위해 TV의 오락프로나 술자리를 통해 한때의 즐거움을 갖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너무 빠지면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TV 채널을 결정하는 것을 자유로 착각하는 생각의 노예화가 일어납니다. 요즘 TV는 뉴스를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이 너무 속물화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교우께서 이제는 교육방송인 EBS마저 그렇게 되었다고 한탄을 하셨습니다만, MB정권이 언론을 장악한 이후 너무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로부터 전제군주들은 자신의 권력이 결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을 생각이 없는, 비판을 상실한 얼빠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오래된 말입니다만,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3S 라는 말이 있습니다. Sports, Sex, Speed 여기에 Screen를 붙여 4S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프로 야구나 프로 축구가 언제 생겨났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군사정권 하에서 국가정책에 따라 시작하였습니다. 로마의 폭군들은 자신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 콜로세움 경기장에 마차경기를 벌이거나 목숨을 건 검투사의 시합을 만들어 시민들로 하여금 환호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다음 달에 월드컵이 시작합니다만, 이 기간 동안 우리가 환호하는 사이에 정부나 국회가 어떤 법들을 통과시키고 무슨 일을 진행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페르샤의 군주 키루스는 소아시아의 강국인 리디아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당장 이를 제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리디아의 그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하고 싶지도 않았고, 대규모 군대를 계속 주둔시킬 수도 없었기에 그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는 그 도시에 술집과 유흥가, 극장 같은 시설을 만들고 주민들로 하여금 이를 이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해냈습니다. 그 이후 그 도시에서 더 이상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ludi’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말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다. 소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ludicrous ‘바보 같은’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당시 용맹과 지혜의 상징이었던 리디아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 바보를 상징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21세기의 리디아인들]


저는 오늘 우리 남한이 21세기의 리디아가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합니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자들은 자리에서 내어 쫓고 비판자들은 온갖 방식으로 옥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 갖도록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가 그렇고 책방에 가면 많이 팔리는 책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음식점과 술집과 모텔이 많은 나라가 어디에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로마가 왜 망했습니까? 외부의 침략으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쾌락에 빠져 망한 것입니다. 지금 정권은 백성들을 쾌락의 노예로 몰아가는 퇴폐 유흥업소들을 규제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고 촛불이나 미네르바와 같이 시민들이 깨어나는 자유의 소리를 막는 일에만 경찰력을 동원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로마의 폭군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듯이, 북한을 악마로 만들어 정권을 유지해가는 일에 총력을 기울고 있습니다. ‘거 봐라! 그놈들이 했잖았느냐? 보복하라’고 아우성입니다. 조금 있으면 이제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면서 인공기를 불태우는 한편의 쇼가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면 뒤에서 조정하는 정치 기득권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처음 이명박대통령은 천안함 사건을 밝혀내려면 1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진짜 원인을 이미 알고 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발표하기가 힘들겠다는 말입니다. 만약 북한이었다면 그날로 이를 발표했을 것입니다. 모든 정보를 갖고 있던 미국은 북한에는 책임이 없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끼리끼리 모여 지지고 볶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이를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발표한다고 합니다. 그 저의가 어떤 것인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몇 십년동안 이 남한 땅에서는 왜 선거철만 되면 간첩단 사건을 비롯하여 비행기가 추락하고 구축함이 침몰하는 북풍이 부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요?


송나라의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하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먹이가 부족하니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줄이겠다.”고 말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냅니다. 그러자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그러면 도토리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바꾸겠다.”고 말하자, 모두 좋아했다는 것이지요. 국민소득 2만불, 3만불 이거 모두 같은 논리입니다. 이 숫자가 달러 환율에 따라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무리 국민소득이 올라보았자, 이는 조선과 자동차와 반도체의 대기업 서너 개가 주로 만들어낸 이익이고, 이 이익금은 대부분 국민들의 손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간에서 외국투자가들의 수중으로 흘러들어가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의 수준이 과거에 비해 어떻게 나아졌는지는 발표가 없고 자랑거리만 크게 선전합니다. 그래 우리 백성들은 모두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어가고 있지요. 이를 언론이 깨우쳐 주어야 하는데, 권력에 재갈이 물려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백성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폭군 네로는 실정이 계속되어 반대파의 목소리가 높아가자 로마시를 불 지르고 이를 기독교인들로 방화로 화살을 돌려 기독교인들을 죽였습니다. 1923년 일본 관동일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사람이 죽고 대혼란이 일어나자 곤경에 처해 있던 일본 정부는 조센징이 약탈을 하고 우물에 독약을 타 일본인들을 죽인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래 흥분한 일본인들이 몰려다니면서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 무려 6천명이나 죽였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독일 게르만족의 피를 더럽히는 악마로 몰아 600만을 학살했습니다. 30년 전 전두환 일당은 군인의 본분을 파괴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전국에서 데모가 일어나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김대중씨의 후원지인 광주를 겨냥했습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 폭력 진압을 하도록 하고 이에 시민들이 저항하자 총을 쏘았습니다. 그래 분노한 전 광주시민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이들을 폭도 혹은 빨갱이라 불렀고, 언론에서는 북한 간첩들이 사용하는 독침이 사용되었다는 허위 기사까지 내보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에 대해서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권력으로 인한 이런 거짓과 폭력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백성들 스스로가 깨어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을 받은 히브리인들이 광야 생활 며칠 만에 채소와 고기가 그립다고 차라리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기를 바랐듯이, 우리들 또한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깨우는 예수의 외침]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이고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 이 남한 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은 무엇일까요? 돈다발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정당한 일자리, 자식들을 위한 평등한 교육의 기회,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에 돈이 없다고 문전박대 당하지 않는 복지 이런 것들이 가난한 자들이 바라는 복음입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일류대학 입학자들의 가정을 조사해보면 경제 수준이 점점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어느 교사분이 그러시더군요. 이제 조금 있으면 현재 대학생들이 취직을 위해 스펙쌓기를 하듯이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입학을 위해 스펙쌓기를 해야 한다구요. 스펙은 돈에 달려 있는 일이니 결국 대학은 실력으로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라고 했습니다. 교육평등의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실력 있고 똑똑한 학생들이 사장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런 평등 사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묶인 사람들, 그들은 자유와 인권을 위해 일하다 옥에 갇힌 양심수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라는 말은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눈먼 사람들. 그들은 누구입니까? 시각장애인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간단한 시술로도 눈을 뜰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먼 자란 육체의 눈이 아닌 진실의 눈을 말합니다. 감추어진 진실을 누구나가 볼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누가 진실을 감춥니까? 기득권을 지키려는 권세자들과 조중동의 재벌 언론입니다.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라는 말은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희 교회 사회부가 주관하고 각 신도회가 주최하여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거리 서명 운동을 명동에서 가졌습니다. 그런데 선관위가 나와 이를 제지하고 저희 교회에 협박성 경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이번 선거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선거에 영향을 주니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선거철에는 신앙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하는 4대강 사업은 계속 추진되고 있고 공무원은 물론이요 시민들에게까지 계속하여 이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국토가 파헤쳐지고 많은 자연의 생명들이 죽어가는데, 선거에 영향을 준다고 금지할 것입니까? 선거가 중요합니까? 생명이 중요합니까? 마치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저 율법주의자 바리사이파들의 주장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선거는 당연히 쟁점이 사안들을 놓고 자유롭게 찬반의 토론을 해야지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저는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돼지를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는 꿀꿀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돼지들이 또 잠잠하네요.


[자살률 대한민국 OECD 중 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사람이 억눌리며 어떻게 되나요? 소리를 치다치다 안되면 자살을 합니다. 지난 달 미국 워싱톤 포스트지는 <자살 대한민국>이라는 기사를 통해 남한의 자살률은 지난 10년 새 2배로 늘어 하루 평균 35명이 자살하고 있고 이는 OECD 30개 국가 중 최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의 2.5배에 달하고 자살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일본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자살률은 남한이 부유한 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OECD 국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낮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한 사람들은 OECD 국가 중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자고, 입시학원에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누가 자살하나요? 주로 노인층과 청년층입니다. 외로움, 질병, 가난 속에 자살을 선택하는 노인층과 인터넷을 통해 동반자살 희망자를 찾는 20-30대 젊은이들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조중동의 재벌 언론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은 외국신문에 나오면 크게 인용하지만, 이런 것들은 거의 인용하지도 않고 인용하더라도 아주 작은 기사로 취급합니다. 그리고는 ‘북한에 월드컵 중계 공짜로 안한다’는 쓰레기 같은 기사는 대문짝만한 글씨로 일면 머리기사로 장식합니다. 아!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너무 서럽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쩌다가 이렇게 권력과 재벌의 놀이개로 전락되었는가 하여 너무 슬픕니다. 민족공조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이런 논리가 판을 치는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변했나요? 일개 방송국의 이익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주간지도 아닌 주요 언론의 머리기사로 등장합니까? 예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미국 기업가들 앞에서 자신을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CEO라고 뻔뻔스럽게 얘기하던 그 사람이 청와대의 자리를 차지하고 난 이후 이런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도 35명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고, 한 달이면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억눌림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을 택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하려면 <월드컵 북한에 공짜 중계 안한다>가 아닌 <자살률 OECD 최고 대한민국> 이런 것이 주요 언론의 머리기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생활고로 인한 자살자는 없도록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도록 복지 혜택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 계층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펼칠 수 있도록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도록 언론이 자기 역할을 담당할 때 참 민주주의가 형성이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른 사람들이 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인간이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어느 사회나 국가 또한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끊임없이 침략 약탈하고 35년간이나 우리 민족의 고혈을 철저하게 빨아 먹어 가면서 악랄하게 지배했던 일본을 칭찬하면 괜찮지만, 우리의 반쪽, 북한을 칭찬하면 빨갱이라 하여 옥에 가두는 사회 이건 결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제 625가 되면 북한의 침략을 잊지 말자고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하겠지만, 815가 되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잊지 말자는 얘기 대신에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동반자로 화해의 역사를 펼쳐나가자고 외칠 것입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향기나는 이웃]


향린교회는 57년 전 미국과 소련을 대신한 꼭두가시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그 혼란의 시기에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여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함께 기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어느 목사의 인도아래 시작한 교회가 아니라, 교인 모두가 주인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이념을 따라 시작한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시켜야 할 나라임을 알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시작한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생일을 맞아 이러한 창립정신들이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하여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이 그런 길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 이름을 향린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물론 시작한 장소가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이 본래 있었던 자리이기에 이 이름을 따른 것이지만, 그래도 그 이름에 신앙의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향기로운 이웃. 이웃에 향기로운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지리상으로 가까운 이웃이 아닌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나오는 대로 강도만나 신음하는 이웃, 억눌린 민중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시면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해란 야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해를 말하는데, 이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년과 희년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안식년과 희년에 행할 구체적인 일들에 앞서 율법의 근본을 말합니다. ‘너희는 가난한 자가 낸 소송 사건에서 그의 권리를 꺾지 말아라. 허위 고발을 물리쳐라. 죄가 없고 올바른 사람을 죽이지 말고 악한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말아라.’ 지금 감옥에 가보면 가난한 사람들만 주로 모여 있습니다. 같은 죄를 저질러도 부자들은 이래저래 다 빠져나갑니다. 삼성의 이건희회장을 비롯한 재벌들은 엄청난 죄를 짓고 형을 선고받아도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형을 살지 않습니다. ‘너희는 뇌물을 받지 말아라. 뇌물은 멀쩡한 눈을 가리워 올바른 사람들의 소송을 뒤엎는다.’ 일부이겠지만 검사와 판사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술 접대, 골프접대는 물론이고 성상납까지 받고 있습니다. 고급 요정, 술집에서 제 돈 내고 먹는 사람이 한명이나 있겠습니까? 수백만원씩 하는 양주를 자기가 마시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뇌물용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비쌀수록 희귀할수록 잘 팔린대지요.


‘몸붙여 사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몸붙여 살아보았으니 몸붙여 사는 자의 심정을 잘 알지 않느냐?’ 이 땅의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차별을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에서 그런 차별을 받지 않았나요? 그 때의 억울했던 심정을 기억하고 그런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은총의 해]


이런 약자보호의 말씀을 선포하고 나서 안식년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육년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 그 소출을 거두어 들이고 칠 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놀리고 소출을 그대로 두어 너희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남은 것은 들짐승이나 먹게 하여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단지 땅만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하고 들짐승까지도 위하는 자연계에 속한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해가 안식년인 것입니다. 6년동안 너희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이 먹어야 할 것들을 독차지하여 왔으니 이 한해는 그 욕심을 버리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7일 중 하루를 쉬라는 안식일은 주인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께 예배하는 날도 아닙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레 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너희 소와 나귀도 쉴 수가 있고 계집종의 자식과 몸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소와 나귀 그리고 노예들을 위한 날이 안식일이고 오늘 우리가 주의 날이라 하여 예배드리는 날의 근본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안식년을 7번을 보내고 난 50년째가 되는 해는 희년이라 부르는데, 이 해에는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는 해방시키며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는 해입니다. 모든 것을 원상태에서 새로 출발하는 해가 희년입니다. 그래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해, 희년인 것입니다. 안식년이나 희년은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 혁명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얘기를 주장하면 공산혁명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갈 것입니다. 그건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자 나자렛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예수를 절벽으로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어떤 교회가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인가?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세상의 부유한 자들과 권세가들이 절벽으로 끌고 가서 밀어뜨리고자 하는 교회 그 교회가 참으로 예수님을 쫓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다만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말씀을 그대로 전할 따름입니다. 신학을 30년 넘게 공부했지만, 저는 이 외에 다른 해석을 알지 못합니다. 향린교회가 여러 교회 중의 하나로 그럭저럭 진보교회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며 적당히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처음 창립자들이 가졌던 자유와 해방의 하느님 나라의 대망의 꿈을 갖고 어둠의 세력을 향해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아갈 것인지는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다만 저는 오늘 하늘뜻펴기 담당자로서 지금 우리 앞에는 크게 보면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라는 민족 선교,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라는 사회선교와 분가교회 설립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을 물리치셨듯이 한꺼번에 많은 대중을 동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한 명 한 명이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에게 달린 일>이라는 작자 미상의 시를 들려드림으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한 곡의 노래가 순간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다.

한 그루 나무가 숲의 시작일 수 있고,

한 마리 새가 봄을 알릴 수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에 기운을 줄 수 있다.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다.

한 줄기 햇살이 방을 비출 수 있다.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한 번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 보낼 수 있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다.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이다.

한 가지 희망이 당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린 일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