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도 주일

신앙과 민주주의, 그리고 남성

사무엘상 8, 10- 18 ; 1 데살로니카 5, 14- 23


 이  규 성 집사/한  문 덕 목사



향린교회 교인으로서 저는 독특한 이력이 있습니다. 1977년에 등록을 한 33년 된 교인이지만, 중간에 엄청난 공백기를 가졌다가 12년 만에 슬그머니 찾아온 사람입니다. 12년 만에 향린에 돌아와 저는 감동과 감격과 감사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엇보다 향린의 예배가 주는 감동이 매우 컸습니다. 향린의 예배에는 엄청난 콘텐츠가 있습니다. (예배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 잘못인 줄은 알지만 제가 가진 표현력의 한계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징울림에서 시작하여, 교독송, 영광송 등 국악찬송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심령이 담긴 가락, 정성과 열정으로 만들어내는 성가대의 선율, 개인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역사와 사회로 이어가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기도, 오늘날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렁차게 때론 세미하게 일깨워주는 (단언컨대, 이 땅의 어느 다른 곳에서는 결코 듣기 힘든) 하늘뜻 펴기,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가슴에 오롯이 새겨주는 세상으로 보내는 간결한 메시지, 마지막으로 모두 손을 맞잡고 함께 나누는 축복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하나 하나의 과정에 마음의 문을 열고 참여하는 모든 교우들. 일주일마다 이 완벽한 콘텐츠를 향린은 누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감동’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12년 만에 돌아온 향린은 저에게 ‘감격’을 주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떠났다가 돌아가도 항상 편안함과 정감을 느끼게 되는 고향처럼 향린은 저에게 늘 안겨있고 싶은 넓은 품과 같았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듯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맞아주시는 옛 교우들의 따스한 눈길과 손길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 바로 그 ‘감격’이 저를 또한 눈물 적시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한결 같이 향린 공동체에 몸 담아 있으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사악함와 뒤틀림, 그리고 후미진 곳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진실한 신앙의 목소리를 이어온 교우들의 모습. 오랜 시간 그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온 저에게는 이것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왔고, 교우들에게는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감동과 감격과 감사. 이것이 12년의 공백이 저에게 안겨준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12년의 공백은 저에게 또 다른 것도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게 되는 많은 변화들이 있습니다. 그 중 오늘 제가 교우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시끄러움’입니다. 시끄럽다니?

저는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덕분에 30대 초반이었던 17년 전 <향린 40년사> 집필의 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다른 분들이 갑자기 엄청난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 때에 진 빚을 갚느라 지금 다시 <향린 60년사>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향린 60년사 준비를 하면서 저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역사적인 시각’에서 향린은 현재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지점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적 시각’이란 현재의 향린을 지난 60년과 관련하여, 그 변화와 흐름, 연속과 단절 등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각으로 오늘의 향린을 바라보면서, ‘시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시끄럽다는 말의 반대는 ‘조용함’입니다. 교회는 본래 조용한 곳입니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이기에 조용한 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향린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부림치는 공동체입니다. 고여 있는 물이 아니고, 앞을 향해 전진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결코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은 바람 잘날 없이 시끄러웠던 초기 공동체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전투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조용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하느님의 뜻을 독점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가장 잘 훈련되었다는 교회의 지도자가 이를 독점하면 교회는 조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린의 공동체는 일찍부터 이러한 독점을 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교회 갱신을 통해 민주주의를 교회의 중심 가치요, 운영 시스템으로 정착하여 왔습니다. 제가 특별히 향린의 현재를 ‘시끄럽다’고 표현한 것은 향린이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현재가 그 ‘변화의 한가운데’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말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갈림길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한계와 모순이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시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향린 교인이면 누구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깃발을 드는 것과 민주주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번잡하고, 효율적이지 못하고, 때론 충돌하고 갈등합니다. 그렇기에 쉽게 귀찮아하고, 실증내고, 실망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민주주의는 슬그머니 뒤로 나앉게 되고, 그것을 ‘차라리 잘됐다’며 위안으로 삼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사실 교회에는 민주주의에 역행할 수 있는 또 다른 유혹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향합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모든 면에서 원칙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향합니다. 교회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바로 이러한 충돌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또한 교회는 ‘화평’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대립과 충돌이 생기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대립된 의견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공개적인 경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회 조직이나 단체보다 교회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는 더욱 힘듭니다. 교회가 가진 고유한 가치가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현재의 향린이 특별히 ‘시끄럽다’고 표현한 것은 현재 향린의 지도자들(특히 목회자들)이 매우 민주적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향린의 목회자들보다 더 민주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분들과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쉽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향린이 지금까지의 민주적 성과들을 정착시키고, 내실을 다져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기를 바란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뜻입니다.

‘시끄러움’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하늘 말씀인 제1성서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여 백성들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 달라고 청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그러한 바람은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왕’은 눈에 보이며 직접 절대적인 뜻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뜻을 쉽게 헤아릴 수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하느님 대신에 왕을 원한 것입니다. 왕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끝끝내 절대자인 왕을 원합니다. 백성들은 왕이 없는 ‘시끄러운’ 사회를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시끄러움’ 속에서 뜻을 펼치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현재 향린의 민주적 토대는 결코 튼튼하지 못합니다. 아니 매우 허약하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도 향린의 모든 민주적 성과물을 한 순간에 허물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가치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언론과 비판의 자유, 권력의 분산, 밑으로부터의 권력, 의견을 수렴하고 결정하는 대의제적 방식 등. 이러한 요소들 중에서 현재 향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참여’와 ‘소통’입니다. 제가 향린의 민주주의가 취약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참여’와 ‘소통’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여가 결핍된 곳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향린에서 지도자나 일꾼을 뽑으려고 하면 적극적인 참여 의지의 부족으로 매우 힘이 듭니다. 향린의 민주적 조직 체계인 제직회, 각부의 모임, 신도회 등은 참여의 부족으로 늘 썰렁합니다. 뿐만 아니라 향린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봉사와 실천에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이것이 향린의 민주주의를 매우 취약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도심교회라는 특성이 이것을 강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향린 교인들 개개인의 특성도 있습니다. 향린의 교인들은 비록 교회의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못하더라도 개인의 삶의 터전이나 직장에서 향린교회가 지향하는 선교적 과제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들은 향린에서 주로 ‘에너지 충전’을 바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향린은 무한히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자가발전기’가 아닙니다. 개개인들의 참여의 빈곤으로 향린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한다면, 충전할 에너지도 소진될 것입니다.

저는 아주 간단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향린 교인 모두가 지금보다 1주일에 딱 30분만 더 교회의 일이나 모임에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향린의 기본 조직인 공동의회, 제직회, 각부서, 신도회의 모든 모임에 교인들이 바글바글할 것입니다. 1주일을 분으로 환산하면 약 1만 분입니다. 1만분 중에 딱 30분만 더 교회의 공식적인 일에 참여해 봅시다. 이처럼 참여가 많아지면 책임을 맡은 대표나 일꾼들도 신명이 나서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거기서 보람을 느끼고, 신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대표나 일꾼을 뽑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모든 교우들의 ‘플러스 30분’이 향린 민주주의의 선순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여의 빈곤이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면, 왜곡된 소통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킵니다. 향린교회에서 소통은 어떤 모습일까요? 민주주의에는 의견을 수렴하고 그에 따라 어떤 결정을 이루어나가는 ‘약속된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게임의 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게임의 룰이 곧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게임의 룰이 적용되기 전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소통이 이루어지는가가 결국 민주주의의 내용물이 될 것입니다. 축구 경기를 봅시다. 축구에 대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대부분 축구 경기의 규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이 축구는 아닙니다.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진짜 축구입니다.

다시 말해 절차와 규칙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소통이 민주주의입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이 민주주의의 참 내용으로 알차게 채워져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민주적으로 훈련되어 있을까요? 민주주의의 가치를 누구나 앞세우지만, 정작 우리 자신들은 민주주의의 걸음마 단계가 아닐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립되는 의견을 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가슴앓이를 하거나 홀로 공허하게 외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면 쉽게 마음이 상하고 미운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대립된 의견을 차이로 인정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으며, 대립된 의견 가운데 하나의 의견을 모아가는 것도 아주 서툴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을 대화와 토론에서 배제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합니다. 한번 발설한 의견이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지더라도 무작정 끝까지 주장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후퇴하거나, 수정하거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을 제대로 못합니다. 의견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단 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이나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목소리를 키운다고 해서, 대화의 점유율을 높인다고 해서, 또는 말을 세련되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노력과 인내와 이해심과 열린 마음과 진정성 등이 있어야 합니다.

듣고 이해하는 것, 오류를 인정하는 것, 대립된 의견을 소화하는 것,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순간의 깨우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경험과 반성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터득해 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성서의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초기 공동체에 대두되는 수많은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공력을 쏟았는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당시 바울의 말들이 당연히 가장 큰 권위를 가졌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서신은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대립되는 여러 의견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묻어나오는 바울의 소통 방식, 즉 헌신과 열정과 인내와 진정성, 그리고 강력한 논박과 집요한 설득의 논리 등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가 어떻게 소통을 이루어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오늘의 하늘말씀인 제2성서 데살로니카전서 5장 14절 이하에서 보듯이 공동체 내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편지의 끝 부분으로 그저 인사말처럼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을 인내로써 대하십시오.” 또한 이런 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바울은 모든 일들에 대해 모범답안을 준 것이 아닙니다. 권면하고, 훈계하고, 격려하고, 인내하라는 말은 오늘 제가 강조하는 소통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붙들라’는 말은 민주적 토론과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항상 주목할 것은 바울의 이 편지가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어떤 대표자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편지를 꼭 모든 교우에게 읽어 주십시오”라는 말로 바울은 편지를 끝맺고 있습니다. 대표자만을 설득해서 위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함께 읽기를 바랐으며, 그들 간의 권면과 훈계와 격려와 인내, 그리고 다양한 의견과 정책의 시험을 통해 하느님의 올바른 뜻을 찾아나가기를 바랐습니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울 진정한 ‘소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만 있고 소통은 제대로 안될 때, 그것을 우리는 ‘시끄럽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끄러움’ 속에서만 민주주의를 배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향린이 더욱 시끄러워지기를 바랍니다. 현재는 부적절한 소통으로 그것이 시끄러움으로만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민주주의를 배워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향린이 지금까지 일구어온 민주주의의 싹을 참여의 결핍으로 질식시키지 맙시다. 우리 모두가 한 걸음씩만 더 다가섭시다. 한번 씩만 더 소통하고, 한번 씩만 더 참여합시다. 시끄러운 불협화음 속에서 참된 소통을 이루어냅시다. 먼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이해합시다. 그리고 나서 비판하고, 대립하고, 설득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시끄러움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소통의 하모니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이규성 집사)


오늘은 남신도 주일이고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신앙과 민주주의 그리고 남성입니다. 오늘 하늘뜻펴기를 하신 이규성 집사님은 청남 회장이고 얼굴로 봐서는 30대 같지만 지천명을 곧 앞둔 40대 끝자락에 있습니다. 집사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향린의 민주주의에 대해 잘 풀어 주셨기에 저는 남신도 주일이니 남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규성 집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깊게 생각한 것 중에 하나는 왜 이규성 집사님은 향린으로 돌아왔으며, 돌아 왔을 때 눈물을 흘리게 되었을까 입니다.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저는 여러 통계지표들이 보여주는 3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의 한국 남성들이 겪는 대체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6월 29일자 한겨레 21에서는 특집으로 한국의 40대 남성의 삶과 위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제목이 이러합니다. <40대, 버려진 영혼의 노숙자여>. 부제는 <직장선 생존경쟁 몰리고 가정선 왕따 신세인 ‘산업화 시대 버려진 막내’들의 탈출구는 어디에>입니다. 이 특집 글은 서강대 정유성 교수가 한국인권재단의 생활인권 시리즈로 낸 연구보고서 <한국 40대 직장남성들의 생활과 인권 - 사회의 병리, 육체의 손상, 영혼의 노숙>이라는 글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 보건 기구(WTO)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여러 국가들의 연령별 남녀 사망률을 그린 그래프를 보면 비슷하게 시작해서 20-30대에 차이를 보이다가 40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점차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래프에서 40-50대로 들어서며 남성의 사망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나라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나라입니다.1) 이렇게 한국의 40대 남성들의 사망률이 전 세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40대 직장 남성은 아직도 권위적이며 위계질서가 뚜렷한, ‘경직’된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직장을 비롯한 경제활동의 주역이며, 사회와 제도 전반의 중추며, 가정의 주춧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워낙 가파른 안팎의 변화에 가장 먼저 치이고, 당하는 피해자들이기도 합니다. ‘베이비 붐’ 세대로서 무시무시한 ‘경쟁’을 뚫고 살아왔지만, 오로지 ‘경력’을 바라고, 죽을 만큼 일하다가 그만 몸은 병들고 마음은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유연해 진 노동시장에서 오늘 당장 가장 먼저 쫓겨날지 모르는 퇴출 대상이면서, 앞으로 올 고령화 사회에 제대로 준비와 채비도 갖추지 못해 궁핍한 노후를 보낼 위협에 처해 있고, 386세대로 상징되는 거대담론의 담지자였지만, 허울 좋은 민주화와 가차 없는 신자유주의 보수화 사이에서 이렇다 할 지향도 입지도 확보하지 못하고 허청댑니다. 지친 몸을 쉬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영혼을 재충전할 가정에서도 자신의 자리는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가장 아닌 남편, 어깨가 무거운 아빠, 시골계신 부모님의 불효자식이기 때문입니다.2)

        지난 1998년 IMF와 2008년 말부터 닥쳐 온 지구촌 경제위기 속에서 삶은 더욱 팍팍해져만 가는데, 지난 동안 경제성장과 물질의 풍요만 바라보고 앞뒤고 옆이고 돌아 볼 겨를 없이 내달아 온 어른 세대는 안팎으로 흐트러지고 헝클어진 삶터에서 성숙한 민주시민 의식도, 튼실한 자아 정체성도 갖추지 못한 채 더욱 흔들리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의 40-50대 남성에게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위기상황에서 스스로 돌아보고 짚어보고 새롭게 만들어갈 인간관계나, 스스로의 속내를 다듬고 돌보고 매만지는데 무척 서툴다는 것입니다. 빠르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매몰되어 관계와 내면의 성찰에 소홀하기에 이익을 따르는 집단이나, 혈연, 지연, 또는 뜻이나 목표도 없이 아리송하게 모인 패거리에 휩쓸리거나 기대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은 점차 사라지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다움의 욕구는 멀어지고, 왜곡된 욕망과 물질적인 성공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시련과 사회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된 원인을 파악해서 그것을 치유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성서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 왕을 세워달라고 부탁하고, 사무엘이 왕정의 폐해를 알려주었음에도 백성들이 고집을 부린 이유는 바로 전쟁의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있어야 다른 나라하고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최정점의 모습이 바로 전쟁이고 이 전쟁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을 잠재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게놈’연구에 의하면 3만개쯤 되는 인간 유전자들 대부분은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환경 등의 외부조건에 따른 안팎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의 복합성을 만들어 냅니다.3) 인류는 이런 생명의 다양성과 양성평등 또는 모성 중심이라는 자연생태계의 일반법칙을 거스르고4), 힘센 남성중심의 폭력과 억압으로 유지되는 사회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힘 있는 남성이 자신들의 지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오래도록 이용한 제도를 우리는 가부장제라고 하고, 이 가부장제는 인류 역사에서 국가와 제도, 개개인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이 힘이 없는 모든 약자들의 인권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한국의 중년 직장 남성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도 대부분 이 가부장적인 사회 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절대로 고통의 굴레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기 가장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성의 경우 가부장제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가정과 직장, 자신 스스로와의 관계와 타인과의 소통 등 모든 생활세계 일반에서 한국의 40대 남성은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먼, 비인간화되다 못해 거의 반(反)인권적인 삶을 살면서도, 이들은 대부분 흔히 말하는 그 불행과 반인권적인 삶의 배경이나 원인, 맥락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더라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제일 못하는 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I hurt, I need, I can't입니다. ‘나는 상처받았고, 이런 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못하겠다’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을 잘 하면서 남에게 위로도 받고, 남의 도움을 받을 줄도 알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낼 줄 아는 향린교회 남성 교우들은 얼마나 있나요? 저도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조 목사님 안식년으로 제가 희남/청남 수련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 두 신도회가 모두 자신들의 삶과 어려움들을 나누는 것으로 수련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향린교회 남성들은 건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수련회에서 남성들끼리 나눈 이야기들을 가정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들과 할 수 있을지요? 또는 직장에서 동료들과 윗 사람과 아랫 사람과 편하게 할 수 있는지요?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자신도 이미 가부장제로 인해 상당히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또 그러하므로 가부장제를 더욱 확고하게 유지하는데 이바지하는 사람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난 6월 10일 기독교 회관에서는 <2000년 기독교를 새롭게 디자인한다>라는 제목의 대토론회가 열렸고,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분들이 강사로 나오셨습니다. 저는 그 때 거기서 강연하신 현경 교수님의 한마디를 잊을 수 없고 저의 새로운 화두로 삼고 지금도 계속 고민하며 나름 노력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현경 교수 왈, 지금까지의 모든 신학은 그것이 제1세계의 서구중심의 신학이든, 또는 제3세계의 해방신학이든 그것은 혹시 “독신 남성 수행자 신학”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반대로 “살림하면서 그 살림을 바탕으로 나오는 신학”을 새로운 화두로 잡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이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돌봄과 보살핌의 위기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실마리는 남성들이 보살핌과 돌봄에 나서는 것입니다. 특히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많은 한국의 남성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일의 성취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기 쉽고 그래서 가정보다는 회사의 일에 매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회사의 업무는 누군가 대신할 수도 있고, 꼭 자신이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남편이나 아빠는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정에 소홀하면 결국 모든 후폭풍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기에 일이 터진 다음에는 수습하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직장을 얻어서 근무를 하는 바람에 제가 쉬는 휴일에는 온전히 6살 3살인 두 사내아이와 함께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집안 치우고 밥해서 먹이고 유치원 보내고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씻기고 돌보면서 한편으로 힘도 들지만 한편으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돌보고 보살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것,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등등, 또 아이들의 막무가내의 요구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달래려면 제 자신의 감정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몸으로 해 보시면 알겠지만 보살핌과 돌봄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 인식과 통찰에 이르기도 하고, 오늘 제2성서의 말씀의 한 구절, “모든 사람을 인내로써 대하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한국 사회는 남성들을 돈 버는 기계로, 회사형 인간으로 만들어 먹잇감을 찾아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사는 사냥꾼으로 살게 하지만 우리는 계속 돌보고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야 합니다. 내년에는 봉사부장도 남성이 하고, 주일 아침 식사준비에도 지금보다 더 많은 남성들이 참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함께 음식을 준비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우리들의 마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하는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신의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보다 더 본원적인 자기를 찾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자기교육에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관계를 맺는 훈련, 이것은 위에서 이규성 집사님께서 말씀하신 민주주의를 위해서 뿐 만 아니라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구호를 외치기는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김광석이 노래한 <부치지 않은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우리가 하려는 것 가부장제 하에서의 남성 존재의 모순과 문제점을 찾고 드러내고 고쳐나가서 양성이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람들을 만들어가는 일은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운” 것입니다.

        신앙이란 모험이며 끊임없는 자기갱신이며 이전에 있던 당연함에 시비걸기 즉 어떤 면에서는 낯설게 하기 또 다른 면에서는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번 주에는 추석명절이 있습니다. 많은 음식을 장만하겠지요. 향린교우 남신도 여러분! 그 잔치자리에 손님처럼 대접받지 말고 그 잔치를 준비하는 손길이 되십시오. 모두 함께 음식을 장만하면서 서로 정겨운 수다를 떠시기 바랍니다. 제가 다음 주에 여신도들에게 꼭 물어보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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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최재천,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2003, 39-40. 
2) 어느 40대의 고백: http://nesi4034.egloos.com/tb/9398438 중에서. 
3) Whitehead. S. M. Men and Masculinity. 2002. 12. 
4) 최재천,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