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 창조절9, 교회개혁주일
고백적인 참여, 변화하는 공동체 / 임보라 목사
잠언 16: 1-6 ; 로마서 12:1-5
찬36장, 366장, 국찬 189장.



[욕심의 근원-내 중심적 사고]

혹, 함께 있어도 늘 외로움을 느끼는 분 계십니까? 그런 분을 위한 ‘사랑을 병들게 하는 여덟가지 욕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열거되어 있는 욕심은 이렇습니다. 

“내 연인은 내가 바라는 대로 변해야 한다” / “내 연인은 나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야 한다” / “내 연인은 나에게 완벽해야 한다” / “내 연인은 나에게 어떤 경우에든 상처를 주면 안된다” / “내 연인은 내 마음을 훤히 읽어야 한다” / “ 내 연인은 나와 절대 싸워서는 안된다” / “내 연인은 나를 무조건 신뢰해야 한다” / “내 연인은 성관계에 완벽해야 한다” 

‘반드시, 완벽, 어떤 경우에든, 절대, 무조건, 완벽’  등, 그 말만 들어도 병이 날만합니다. 누군가 제게 이러한 것을 일방적으로 계속 요구해온다면 아마 저는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상당히 숨이 막혀올테니까요. 나는 나다워야 하지 환상 속의 그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고, 상대가 행복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그 노력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자만할 수 없으며, 일부러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 부득이 하게 상처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 상처가 잘 아물도록 노력하는 과정을 지나는 것이 관계의 깊이를 더하여줄 것이며, 마음을 먼저 읽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때그때 솔직한 감정표현을 해주는 것 또한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연인’대신 ‘교회’를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내가 바라는 대로 변해야 한다” “교회는 나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야 한다” “교회는 나에게 완벽해야 한다”  “교회는 나에게 어떤 경우에든 상처를 주면 안된다”  “교회는 내 마음을 훤히 읽어야 한다”  “교회는 나와 절대 싸워서는 안된다” “교회는 나를 무조건 신뢰해야 한다” 등 이렇게 바꿔서 다시 읽어보니, 내 연인이 되었던, 교회이던, 관계를 병들게 하는 욕심의 근원은 바로 ‘내 중심적’이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이상, 꿈을 가질 수는 있지만, 거기에 사로 잡혀서 주변 사람들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 꿈은 그저 나만의 꿈에 머무르게 되고, 사람들은 그 꿈을 욕망, 그것도 이기적인 욕망이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물론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인 교회에서 공동체성을 이루어간다고 하는 것은 이상과 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소통, 열린 마음과 귀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면죄부 판매]

 

매해 10월이 되면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함으로 당시 절대적 권력자인 교황에 도전한 사건!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행사가 여러 곳에서 다양한 내용으로 개최됩니다. 향린교회는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기독교 중심주의라고 여기기에, 기독교 개혁이라는 말을 거쳐, 현재는 ‘교회개혁’이라는 말로 이 ‘저항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라는 이른바 five solas를 대부분의 세계 교회가 해마다 되 뇌이고 있는데도 이 sola(오직)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전혀 성서적이지 않고, 믿음의 대상은 사실 돈이고, 하느님의 은혜에 가격표 달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부록으로 달려 있는 것쯤으로 여기며, 입으로는 하느님께만 영광!을 외치지만, 실은 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달려들거나, 지혜로운 채하며 약아빠진 사람이 오히려 득세하는 현실은 이제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일상이 되고만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증명서인 “면죄부”는 각양각색의 타이틀을 건 헌금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헌금의 종류가 71가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감사의 범위는 무제한적이기에 71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을 누군가가 수금하듯이 지정해준다면 그것은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를 오히려 제한하는 일이 되겠지요. 71가지 감사헌금은 바로 그것을 꼬집기 위한 말일 것입니다. 저는 평소 현금을 갖고 다니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주정헌금을 비롯한 헌금을 인터넷 뱅킹을 통해 드리고 있기는 합니다만, 교회 안에 아예 십일조, 선교헌금, 감사헌금, 주일헌금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터치스크린 현금기계가 놓여있는 것을 보면 섬찟함을 느끼게 됩니다. 

493년 전, 자신의 임기 내에 커다란 성전을 완공할 요량으로 비용충당을 위한 홍보, 판매기획자까지 고용하여 면죄부를 판매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이익금을 반반씩 나누어 갖자면서 또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그 영혼의 소중함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두(頭)당 10만원, 100만원 이렇게 돈으로 환산해서 줄을 세우는 마케팅 전략이 여전히 먹히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면죄부를 위한 마케팅 전략에 큰 공을 세운 당시 유명했던 웅변가 테첼 (Tetzel, Johann.1450-1519)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연옥의 고통 중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귀를 열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낳아주었고 키워주었고 재산까지 남겨주었건만 너희는 우리를 이 고통받는 곳에서 구해주지 않는구나. 이 뜨거운 불꽃 속에 우리를 그대로 놔둘 셈이냐?’ 여러분은 고통 받는 그들의 영혼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찰랑하고 동전이 돈궤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던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릅니다.”

부모가 동원되고, 자매형제가 동원됩니다. 개신교에서는 연옥의 개념이 없지만,  ‘찰랑하고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은 여전히 소위 사람들에게 먹혀서 '알겠습니다. 합시다. 냅시다' 라고 부흥회에서 한 목소리로 외치고 나면 순식간에 몇 천만원의 헌금이 걷힌다고 합니다. 이는 올바른 신앙정립이 안되어 있는 병든 그리스도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이를 십분 활용하여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건드려 몸과 맘을 드리는 의미로서의 헌금의 의미를 보장성 보험용 헌금으로 추락시킨 부패한 성직자들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따르는 세상살이 방식과는 차별이 있어야 하고, 세상에서 통용되는 질서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대조사회(kontrastgesellschaft)로서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면서도 그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향한 저항’과 ‘대항적 파토스’가 필요한데 만약 이러한 것이 없다면 결코 하느님 나라는 도래할 수 없다”라고 신약성서학자인 게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는 말합니다.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공동체]


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오늘을 우리는 이름하여 ‘교회개혁주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몸된 교회를 이루고 ‘향린 정신’을 새기며 ‘향린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우리만 이렇게 결단한 것이 아니라 표현된 말은 다를지언정 이러한 뜻을 품고 시작한 교회들은 많이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시작했지만, 결국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던 교회가 있는가 하면, 생존방식을 철저히 바꾸어 남아있기로 결정한 교회도 있고, 본질을 잃기 않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이어오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세 번째에 해당할 것입니다. 네 가지 창립정신을 시작으로 하여 57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 까지, 로핑크가 말한 세상을 향한 저항과 대항적 파토스를 뿜어내온 역사의 물줄기가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향린교회가 현존하는 여러 교회들 중에서 여전히 의미있는 교회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유는 밖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요인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저는 그 의미를 “우리는 우리가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자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고 그의 이끄심을 신뢰할 뿐이다.”라는 향린의 고백 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뼈를 깎고 살을 베는 근본적인 개혁과 갱신을 통해 거듭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다.’라는 선언을 하면서 거듭나야 하는 주체로서의 내 자신, 그러니까 향린교회 스스로를 빠뜨렸다면, ‘마음이 거만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에 지나기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하고 불완전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뼈를 깎고 살을 베는 아픔을 감수할 각오를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성이 드러나는 ‘개혁과 갱신’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인만큼 철저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는 오늘, 우리의 갱신선언을 돌아보면서 우리 스스로 얼마나 뼈를 깎고 살을 베어 왔는지 점검하는 일은, 일회적인 갱신이 아니라 거듭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로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되짚어 보기-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과 교회갱신 선언]


17년 전, 향린교회는 1) 한국 교회의 예배와 문화가 민족 정서를 담아 내야 하며 2) 민주적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3)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교회갱신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고민하면서 결의하였습니다. 일회적인 갱신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하는 길을 택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갱신선언문과 실천결의문은 그 내용에 있어 간극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언에서 시작하여 실천 결의에 이르는 1년 반 동안 치열한 토론이 오고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 중에 제2의 분가선교를 실현하기 위한 꿈과 의지를 담아 헌금을 드리게 됩니다만, 이 분가선교만해도 분가의 기점을 성인교인 500명으로 했다가 출석교인 500명으로 바꾼 것을 보면, 1993년 강남향린교회 설립 이전과 이후 분가선교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약속한 내용에 대한 실천을 우리는 얼마나 이루었을까요?
첫번째, 예배와 문화에 대한 7가지 실천 항목은, 현재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천하고 있습니다.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족 정서와 문화를 담은 건축양식과 기물 사용과 조상추모 제사의식에 대한 정립입니다.
지금의 건물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이것은 새로운 건물을 지을 기회가 온다면 실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사항입니다. 시청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 갈 때마다 그와 꼭같이 규모가 커야할 필요는 없겠지만 유형문화재로 길이 남을만한 민족정서가 담긴 건물이 이곳 명동에서 밀려나지 않은 채 지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한편 올해 설날에는 ‘한국 개신교회에 드리는 권고와 우리 사회에 드리는 사과문’을 우리교회를 포함한 10개의 교회와 단체가 발표한 바 있습니다. ‘제사문화를 우상숭배로 폄하한 잘못’에 대한 사과였습니다만 실천선언문에 언급한 바대로 기독교적 요소를 더하여 조상추모 제사의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표준예식서 보급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 민주적 공동체로의 갱신은 제도적인 개혁을 촉발시킨 의미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17년전, 여성과 청년이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습니다. 이를 위한 실천과제로 내어놓았던 공동의회 소집 과정, 당회 결의내용 공개, 목회위원회 설치(현재는 목회운영위원회), 그리고 부목사 임기 3년 보장 등은 실천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거기에 장로임기제, 목사임기제 또한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 실천해보니 어떠하더라 라는 되돌아봄의 과정은 필요할 것입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 여전히 미진한 것들, 혹은 더 발전시킬만한 것들을 찾아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갱신선언서에는 담겨있었지만 실천선언서에는 삭제된 여성 장로 숫자에 대한 문제는 현재도 정관개정을 위한 쟁점사항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그때 ‘교인들의 여남 비율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했으니 50대50을 의미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요.

세 번째인, 선교지향적 공동체로서의 갱신을 위한 실천 또한,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교회 예산의 30% 정도를 선교비에 할당하도록 하는 조항은 이미 되었다, 안되었다 논란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얼마만큼을 쓰고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물적 자원 뿐만이 아닌 인적자원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현장성이 없는 온라인 선교을 우리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해야겠지요.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선교를 위한 사회선교센터의 설치,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설 개축 등의 숙제가 있고, 목회자의 재산 공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항목 중 하나입니다. 시설 개축은 장애인의 접근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위해서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지만, 안타깝게도 즉시조치를 취하기에 제약이 많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현재 4층 식당까지 공동식사를 위해 올라가는 일, 차를 마시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 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다시 1층에서 4층으로 가야 하는 동선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을런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오기 힘든 이유 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편, 사회선교센터는 단지 공간만 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얼마 전 수유리에 사무실이 있었던 기장 교육원이 다시 서대문 건물로 복귀하기 전까지 그 건물에는 여러 사회단체들이 입주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마련하여 임대를 위한 공간으로 제공되는 센터는 우리가 꿈꿔온 센터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센터 주변의 풀뿌리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인적자원이 풍부한 향린 교우들의 헌신으로 내적인 내용을 채울 수 있다면, 참여하는 이들로부터 갱신의 불씨가 시작되고, 우리, 그리고 지역으로까지 번져가는 갱신의 불을 놓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선교센터를 채울 컨텐츠는 이미 우리 안에 풍부하게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나 목회자나 필요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지 말고 사회를 위한 선교사업에 활용해야 하는 것은 지당하기 그지없는 말입니다. 제 자신을 예로 든다면 재산 목록으로 공개할 만한 것이 없다보니, 오히려 우리 교인들이 ‘아니 없어도 어떻게 저렇게 없어!’ 하며 창피해 하실까봐 걱정이긴 합니다만, 필요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 목회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 한사람, 한사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여깁니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향린교우들이 삶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갱신을 촉구하는 선언을 해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일까요?

현재 저희는 2005년도 8월에 가결한 향린교회 정관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정관에 구체적인 명시가 없어도 부칙 제1조에 따라 구체적으로 정하지 아니한 사항은 기장 헌법, 교회갱신선언서, 신앙고백서 등에 따르기로 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17년 전의 선언서가 유효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당시의 선언문은 사문서가 아니라 오히려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더욱 실천적이 되어야 하며, 당시에 놓친 것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를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갱신은 고백적인 참여]

 


오늘 함께 읽은 하늘 말씀은 낯익은 내용일 것입니다.
 


잠언을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은 “계획은 사람이 세우고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 사람의 일이 제 눈에는 모두 잘돼 보여도 야훼께서는 속생각을 헤아리신다.”라는 것입니다. 갱신에 대한 몸부림을 통해 제도적인 장치를 여럿 두고 있지만, 거기에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왜냐하면 속생각을 헤아리시는 야훼께서는 정말 이것이 잘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고, 야훼께서 비추어 주시는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속을 가장 잘 비춰주는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의 말씀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정도가 있는 법이고, 지체의 기능이 각각 다르지만 하느님 뜻을 분별해야 하는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책임감을 상대적으로 덜 느낄 수는 있지만, 아예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한겨레의 종교전문기자인 조연현님은 그의 책에서 공동체를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분노와 질투와 욕망과 경쟁의식이 드러나는 곳’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근래 들어 부쩍 와 닿습니다. 실체를 숨기고 거룩한 채하고, 의로운 척 하는 공동체 보다는 속에 숨겨진 것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고, 극복해 가는 공동체야 말로 책임감 있는 공동체요, 대조사회로서 저항을 이어갈 수 있는 근거를 지닌 공동체이기 때문 입니다. 거기에서 갱신의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갱신운동은 그에 대한 의지가 중요한데, 그 의지가 샘솟는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때문에 갱신의 추진력은 신앙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도적인 갱신만이 다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갱신해 나가는 것, 우리가 함께 갱신되어 지는 것, 신앙의 틀거리가 되는 신학을 새롭게 다지는 것,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제든지 낮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몸집을 가볍게 하는 것 등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생명력을 잃고,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잠김효과”(lock-in effect)입니다. 한번 개발을 하고 나면 더 새로운 창의력을 기반으로 한 개발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안주하려는 것, 다양성과 개방성을 상실한 것 등등을 의미하는 말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잠김효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정체’ 현상입니다. 공동체, 갱신, 선언 등이 잠김효과로 이어진다면 이는 자기 만족감에 그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이나 개방성을 상실한 채 밖의 사람을 선도하려고만 든다면 오만하다는 비난을 받을 염려도 있습니다.
제도로서의 교회에만 의미를 둔다면 모르지만, 늘 개혁을 추구하는 자발성을 기초로 한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남기 원한다면 쉬지 말고 스스로 다지는 일을 멈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보에 있는 홈페이지 안내에도 실렸지만, 라이트코리아와 사이버정화시민연대가 선정하여 발표한 ‘반(反)국가 친북좌파 사이트 1차 공개’ 명단에 향린교회이름이 32번째로 올라와 있습니다. 친북좌파라는 말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님에도 그 꼬리표를 새삼스럽게 확인시키는 자들을 대하고보니 실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반국가, 친북, 좌파를 다같이 붙여서 부르는 그들의 인식 수준도 변함없이 그대로이구나 싶구요. 한때 유행했던 정치적 성향 테스트 결과를 기준으로 한다면 저는 상당히 자유주의적이고, 좌파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오늘 내가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가늠하는, 갱신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주는 표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갱신은 교회를 거듭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하심에 대한 고백적인 참여이다. 우리 향린교회가 현실에 안주하고 더 이상 갱신하기를 멈춘다면,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건은 성령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을 향해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갱신선언서 말미에 우리는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토대로 여러분께 묻습니다. 
 


우리는 개혁된 교회입니까? 아니면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입니까?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내 삶의 기준이 교회 안과 밖에 따라 다르다면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십시오.
우리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지 말고,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선한 일을 계속 하십시오.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간, 당당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십시오.
내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기억하고 일상의 예배를 이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