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1일 / 창조절 9 / 교회 개혁 2
사무엘하 13:16-21;사도행전 18:9-17 /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찬 9장 하늘에 가득 찬 / 찬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 국찬 229장 하늘나라 바로 여기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


지난 주 중에는 ‘봉은사 땅밟기’ 동영상으로 인해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제목만으로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이 가서, 사실 관련 동영상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보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보니, 결국 그 기가 막힌 장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저도 땅밟기 경험이 있습니다. 법당, 사찰을 돈 것은 아니지만, 제가 자랐던 교회가 성전을 넓히기 위해서 본 교회 옆에 있던 상가건물을 사들여야 했었는데, 그 상가에 있었던 여러 주인들이 팔지 않겠다고 해서, 한동안 그 주변을 돌면서 여리고성 무너지 듯 기도를 해야했는데, 저 역시 그때 그렇게 해야 하는 줄만 알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땅밟기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그 장면을 보니 기가 막히다 못해 가슴이 떨려왔습니다.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돌아보는 이 시기에, 남한교회가 도려내어야 할 부분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웃 종교를 폄하해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웃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배웠는지, 우리 스스로 내재된 부분을 성찰해보면 이웃종교라 부르고 있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많은 편견의 찌꺼기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저희가 속해있는 서울노회 정기회에서 막간을 활용한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이웃 종교 지도자들을 희화하고,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라는 내용의 단막극이 있었는데 보는 내내-그렇다고 중간에 일어날 수도 없고-한없이 불편해지는 마음으로 인해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 교단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봉은사에서 땅밟기를 한다는 명목으로 온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심지어는 법당에 들어가서 손들고 기도까지 했던 사람들이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 일이 사과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일까요? 역지사지로 자신들의 교회에서 찬양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웃 종교인들이 와서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드리면서 교회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은혜와 진리가 선포되어야 한다며 주님을 위한 곳에 이런 법당이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애통해하며 봉은사 곳곳에서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며, 땅을 밟아대는 이십대, 삼십대 젊은이들의 모습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 그 자체였습니다.

 

[침묵의 카르텔-존재를 짓밟는 무서운 행위]


‘폭력은 없어져야 한다’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손을 들어보세요.
아마 백이면 백, 모두 손을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없어져야 할 폭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라고 되물어보면, 대체적으로 전쟁을 비롯하여, 상해, 협박, 폭행, 갈취 등으로 답할 것입니다.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과도한 진압과정에서 생기는 폭력행위를 일컬어 ‘국가 폭력’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러한 국가 폭력에 대해서 반발하고, 항의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사회가 성숙해 가면서, 국가 폭력이란 당해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가폭력은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자행되는 일이지, 결코 거기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군대나 경찰의 물리적인 힘이 동원되는 국가폭력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에 의한 폭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노합니다. 법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국가 폭력과 법에 의한 폭력으로 인한 상흔은 당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피해자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평생 따라다니는 깊은 상처가 됩니다.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몸뚱아리를 갖고 있는 국가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사람, 두사람 이렇게 모여 똘똘 뭉치게 되면 그런 폭력을 고발하고 이를 없애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경험을 우리는 그동안 해왔습니다. 하지만 똘똘 뭉친다는 것도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방치해두게 되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 채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고 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에 대해 무감각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되겠지만, 어렵다고 해서 저항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면, 그러다 어느 순간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폭력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소름이 끼쳐 옵니다.


카르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카르텔이란 담합, 부당공동행위, 기업 연합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인데, 여기에 침묵이라는 말을 붙여 ‘침묵의 카르텔’하면 귀에 좀 익은 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지난 10월 초 4대 종단 성직자들이 3일 동안 금식하며, 대한문 앞에서 노숙을 해가며 4대강 개발사업 중단을 외쳤지만, 경향신문, 한겨레 신문과 몇몇 인터넷 언론을 제외하고는 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 정치와 언론이 담합해서 별로 득이 될게 없는 불리한 여론을 싣지 않은 것이지요. 4대 종단 성직자들이 모여 게다가 금식기도라는 초강수를 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도되지 않음으로 인해 하찮은 일, 혹은 아예 없는 일 취급을 받았습니다.


물론 보도가 안되었다고 해서, 그 일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은 아니지만, TV, 신문에서 보도되는 일이 다 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는, 언론이 갖고 있는 위력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해도, 사실은 침묵의 카르텔에 의해 오히려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이 침묵의 카르텔은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한 집단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 일어난 일 자체를 덮는 현상을 일컬을 때도 이 말을 씁니다.   


이렇게 보면, 침묵의 카르텔은 경제, 정치, 그리고 언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관련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는 강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침묵의 카르텔은 서로를 향한 배려심을 짓밟은 무서운 행위입니다. 이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것은 두려움과 무력감입니다. 모욕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부인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폭력입니다.

 

[공동체원에게 필요한 요소-배려심과 공감능력]


지난 주일 하늘뜻펴기에서 우리는 향린교회의 갱신선언문을 토대로 오늘의 향린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공동체원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요소를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이 평소 생각하고 있던 공동체원에게 필요한 기본요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동체원에게는 공동체의 지향점을 함께 이루어간다고 하는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공동체 속에 그저 묻혀가는 것만이 아니라, 내 몫은 제대로 해내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또한 내가 바라는 공동체상이 무엇인지, 나의 지향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드러내 보여야 하기에 스스로를 내비치는 투명성이 필요합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우리는 불신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다 내보이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서로가 꼭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같지 않다고 화들짝 놀라며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깨지는 것을 의미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민주적인 소통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민주적이고, 또 제대로 소통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다음 단계를 풀어나갈 때 또다시 난관에 부딪히겠지요. 내 몸에 건강한 소통 방법이 몸에 익혀져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유혹이 찾아옵니다. 소통이 안되고 관계가 엉켜있는 사람을 배제하고자 하는 유혹 말입니다.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오히려 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는 포용성이 요구 됩니다. 그러나 이 포용성은 단순히 ‘모두 다 모여라!’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여 있는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의 의도와 목적과, 말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헤아릴 줄 아는 배려심과 공감능력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분들이 떠올리셨던 것들도 많이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해보면서, 그 중 ‘배려심과 공감능력’을 공동체에게 필요한 기본 요소로 놓고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인권 감수성]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이 일로 너무 마음 쓸 것 없다."


오늘 함께 읽은 제1성서의 하늘말씀은 참담한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촌 요나답이 짜낸 계략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빠 암논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오빠 압삽롬과 아버지 다윗에게로 부터는 제2, 제3의 폭력을 경험한 다말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배려와 공감능력을 상실한 인간 군상들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어느 누구도 다말의 편에 서서 그 마음에 귀기울이려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다말은 자신의 욕심을 한껏 채운 암논으로부터 당장 꺼지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면서도 입을 봉하는 압살롬, 화는 나지만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는 무책임한 아버지 다윗 등 다말의 입은 이중삼중으로 봉해지고 맙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입도 꾹 다뭅니다. 침묵의 카르텔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과 마음을 다독여주지는 못할망정, 찢겨진 마음에 대못질을 해댑니다. 마음 쓰지 말라고요? 마음을 쓰는 일은 피해를 당한 당사자 외에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그들은 마음을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마전 정신병원에 입원한 정신장애 여성(정신장애 2급, 36)을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병원 직원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원직원은 상대여성이 항거불능 그러니까 반항을 못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적장애가 있는 15살의 소녀를 집단 성폭행한 사건에서도 경찰은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다’라는 해석을 붙여놓았습니다. 혹, 이 자리에도 강하게 저항하면 성폭행을 피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성폭력에 대한 아주 잘못된 시각입니다. 공공선을 이루어가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은  사회구성원, 특히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한 배려와 공감능력이 상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폭력’은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서도, 우리 생활 속에 난무하고 있는 다양한 폭력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관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나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 처럼, 그리고 메스컴에 등장하는 일들은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합니다.
손이나 발, 막대기 등으로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말로도, 그리고 표정으로도, 상대방을 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무감각합니다. ‘그것은 인권침해이다!’라고 명명하면 화들짝 놀라고, 더 나아가 적반하장격으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나는 인권침해를 한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당한 폭력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자신이 휘두른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이라는 인식조차 채 하지 못하고 쉽게 잊고 맙니다.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폭력에 대한 호소를 듣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로한다고 하면서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정도는 심각한 폭력이 아니라고, 맘 쓰지 말라고, 당신이 이해해야지 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골치 아픈 일에 어떻게 하면 얽히지 않을런지 빠져나갈 궁리부터 하곤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일에 서투른 우리들의 모습을 일컬어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오늘 목회마당에도 간단히 설명을 해놓았습니다만, 인권감수성은 인간답게 살기위해 필요한 것들이 간과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감성을 말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부정당할 수 있다는 자의식, 그리고 내 이웃에게 나는 어떻게 대하고 의사표시를 하고 있는지가 이 인권 감수성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권감수성은 단번에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고 또 평생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을 되짚어 보면서, 생각 없이 말을 했거나, 상대를 염두에 두지 않고 했던 행동이 없었는지를 곰곰히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면 상대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입니다.
처음 봤는데도,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몇 살 인지, 애인이 있는지, 결혼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언제 가질 것인지, 또 결혼한지 그렇게 오래 됬는데 왜 아이가 없냐, 애인이 왜 없냐며 누구 소개시켜줄까 등등 개인에 대해 시시콜콜 궁금해 하며 묻는 것은 친밀한 사이에 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요, 관심의 표현이라고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것은 그저 나의 궁금증이요, 호기심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요즘 회사에서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우리의 과거, 현재를 돌아보면,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인권교육, 사람을 대하는 법, 인권감수성 교육 등등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인권에 대해서 다들 잘 안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그렇기 때문에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는 분들도 더러 계십니다.
더군다나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이 베어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뭔가 배운다는 것, 특히 나이 어린 사람들의 의견을 듣거나, 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일을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배가 위인 사람에게 평등을 빙자해서 막 나가자는 식으로 대하는 것도 배려와 공감능력, 그리고 인권감수성의 의미를 떠올려볼 때,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위이던 아래이던 서로를 존중해 가면서 의사소통 하는 법을 우리들 몸에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변한 인권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또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라도 나 역시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내면화된 폭력 깨기-침묵을 말하라!]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가 인권단체인가요?’ 교회와 인권단체의 차이는 기독교, 즉 종교를 기반으로 했냐? 안했냐? 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고,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가 은혜로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동받을 수 있으려면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를 갖추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 상처는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틀어져서 생겼다기 보다는 하느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상처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권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셨다는 창조신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그저 법률이나, 선언서에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인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세상 어디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말이야기에 등장하는 요나답, 암논, 압살롬, 다윗은 미친 X, 싸이코패스라고 이야기 되는 비정상적인, 인간도 아닌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딘 인권감수성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인간군상을 그린 것입니다. 또한 일상의 폭력을 내면화 하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폭력의 내면화를 깨기 위해서는 고통을 고통으로 말할 수 있는 순간 없앨 수 있는 법인데, 어찌보면 기독교는 내가 야기 시키지 않은 고통에 대해서조차 인내하라고 가르쳐 왔고, 부당한 상황에 대해서도 참으면 된다는 식으로 억압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폭력의 내면화에 종교가 기여한 면이 많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사도행전의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전도하여라 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전달하기에 부족합니다만, 다른 번역본에서는 ‘끊임없이 말하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라고 그 의미를 잘 살려 놓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라는 내용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유다 사람에게 증거할 때, 그들이 반대하고 욕설을 퍼붓더라도 이에 굴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반대하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은 바울로가 전하는 말씀이 합법적인 종교의 틀, 그리고 로마법을 어긴 것이라고 비난을 해대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도 꼭같은 하느님의 은혜가 있다고 전하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울로가 이방인에게 전했던 그 은혜, 그것은 해방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방인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해야 했던 억울함, 나의 존재 자체가 마치 원초적으로 하자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그 냉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준 그야말로 복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방인은 비단 국적이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다양한 편견으로 인해 밀려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계선 밖으로 자꾸 내몰리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입이 봉해져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복음은 참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이 복음은 현재의 고통이 마치 당연한 일처럼 치부되고, 무조건 인내하고 참아야 하는 것처럼 억누르고 있는 모든 것들을 터뜨려 줍니다. 


오늘 오후에는 사회부와 평화나눔공동체 여성인권이 주관하여 인권강좌를 개최합니다. 이 강좌에서도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내 안에 억눌려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이고, 공동체원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배려심과 공감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폭력의 내면화를 깨트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거룩한 영을 통해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꼭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기에 하느님께서 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향린 공동체가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인 교회가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정의와 평등과 평화가 이뤄짐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남을 믿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익숙하고 당연시했던 것들,
보이지 않고 묻혀있던 것들,
멀었던 눈을 치유하고,
간과했던 것들을 새롭게 비춰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길 빕니다.


이 은혜를 통해 모든 폭력에 대한 침묵을 깨는 용기를 갖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