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말씀
아모스 5:21-27, 요한복음 15:12-17 / 다함께 요한복음 15:13-14


[동녘이가 20살 때 본 2010년의 한국사회와 그에 대한 나의 생각-박동녘 교우]
 

  1970년 11월 13일 정확히 40년 하루 전에 20살인 저와 동갑인 친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20살 청년으로서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까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라고 한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정말 점점 열악해지는 노동자의 환경 속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 했던 그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이후에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게 되고, 노동조합이나 단체들을 결성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려고 하는 움직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10월 30일에는  KEC 파업 사태를 경찰이 강제로 진압하던 도중에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지부장이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경찰은 병원에 급히 부상자를 이송시키지 않고 5시간동안 방치했다고 합니다.  저는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권상황 조금도 변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면 후퇴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분노와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저는 전태일이 만약 2010년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2가지 사실에 놀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모습에 적응이 안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와 다를 바 없는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에서 또 다시 한번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전태일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증진을 위해 또 다시 운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1970년대 전태일과 함께 일했던 미싱사들과 이주노동자의 상황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정해진 노동시간이 존재하지만 하루에 13시간 혹은 그 이상을 노동하도록 강요받고 건강에 문제가 생겨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2004년 이후로 실시되는 고용허가제는 국내 인력을 구하지 못한 기업이 적정규모의 외국인근로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제도적으로는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그들은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국제엠네스티의 ‘한국이주노동자인권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임금체불과 임금차별을 받고 있고, 사업장 이동이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어적 신체적 학대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는 이유는 고용주 이주노동자들이 불법체류 상황이거나 한국을 떠나면 고향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지는 개인적 사정을 알고 위협을 하거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대우해도 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약점을 알았다고 그것을 이용하면서 자기 욕심대로 이용하는 치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또한 이주노동자 문제는 국내 노동자들 문제보다 조금 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 국내 노동자 문제에다가 인종차별적 색체가 더 해졌기 때문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방가? 방가! 는 장르가 코미디 이지만 결코 웃음만을 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 영화에는 대한민국의 인종차별적 대우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방태식은 이주노동자들과 비슷한 외모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취업을 할 때마다 떨어지고, 버스를 타서도 고등학생들에게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외모가 유사하다고 놀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부탄 국적은 외국인 노동자 방가로 위장해서 취업을 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생기는 이야기들을 다루었습니다. 강산이 4번이나 바뀔 시간에도 대한민국의 사회모습은 풍요로워 졌지만 그 속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40년 전에는 우리나라 노동자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2010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대상이 이주노동자로 옮겨 갔고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태일이 붙여놓은 인권의 불씨를 큰 모닥불로 키워나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전태일 4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깊이 반생 해야 할 것입니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저는 이기적인이고 수동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외동아들이라는 가족배경이나 타고난 성격과 같은 개인적인 부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구조의 영향을 받은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사회의 교육체계가 설정해 놓은 경쟁구조 속에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모두 경쟁에서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남 보다 앞서는 것만을 배워왔습니다. 결코 이러한 잘못된 교육제도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가끔 친구들과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정말 공부가 안 되서 선생님 몰래 밖에 나와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하면 사회에 책임을 전가 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답하시거나 그래도 변화되는 것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저는 무의식적으로 결국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해왔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졌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러한 생활은 계속되어 이어졌습니다. ‘나’를 위한 행동만이 있었고 판단의 기준 또한 ‘나’였습니다, 남을 위한 행동은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학교게시판을 볼 때도 시험기간이라고 간식을 배부한다는 포스터나 학교축제 일정을 공지해 놓은 포스터는 자세히 봤지만 G20 반대 운동 포스터나 세계노동자인권에 관한 포럼을 공지한 포스터는 지나가면서 훑어보고 말았습니다. 실업률이 상승한다, 취업 장벽이 점점 높아진다고 할 때도  ’좀 더 취직이 쉬운 상황으로 변화 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보다는 ‘점점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취직을 꼭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머릿속 에 떠오릅니다.

저희 학교 학생회관에는 전태일을 추모하는 작은 테이블에 향과 영정사진과 공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회관 매점을 가려다가 잠시 그곳에 멈춰서고 묵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태일씨,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운 당신의 용기가 부럽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그 용기를 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큰 위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차비로 여공들에게 간식을 사주고 집에 걸어갔던 당신이 가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저에게도 좀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적었습니다. 

  성경말씀 중에 아모스 5장 24절에는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말씀의 뜻과 말씀에 쓰인 단어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말하신 정의는 지금과 같이 노동자들이 부당히 탄압당하고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몇 십 년 동안 지속되는 것과 경제발전이 국가 최선의 목표가 되어버린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 십 년 동안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찾아오는 날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정의의 강은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강의 흐름은 인위적인 힘으로 잠시 되돌리고 지연 시킬 수는 있지만 결국 장기적이고 거시적 관점에서 자연적인 강의 흐름은 영구히 막을 수 없습니다.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하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현실에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부의 시선이 차갑고 비난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노동자들의 인권문제 뿐만이 아니라 4대강 반대 운동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국민의 뜻에서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회활동에 참여 하는 향린교회가 하느님 뜻에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향린교회 교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말이 없어지는 것이리라-송태영 집사]



“하루를 넘기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네(내) 정신이 이토록 타락할 줄은 정말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1967년 2월 4일 전태일의 일기에서)
 

“요즈음에는 왜 이렇게 지저분한 내가 되었는지 한탄스럽다. 나태하고 너무 관성적이다.”

방금 인용한 글은 오늘 세 번째로 소개할 또 다른 전태일의 일기에 있는 구절입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며 저는 전태일을 세 번 만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통과의례처럼 『전태일 평전』을 읽는 밤이 내게도 왔습니다. 그를 만난 후의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처럼 별이 빛나던 밤은 드물 것입니다. 가슴속에 무수히 뜨던 그 별빛을 여러분은 기억하시나요?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습니다. 사람도 변했습니다. 시간은 사람들에게서 그 별빛을 거두어간 걸까요?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태일 님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떠난 지 40년이 되는 올해 5월, 저는 『허세욱 평전』을 펴냈습니다.

몇 해 전 어느 날, 바보 같은 한 영혼이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허세욱. 내가 만난 두 번째 전태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늙은 전태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늦깎이에 전태일을 만났고, 그 별을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에게서 별빛을 거두어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엄마 어릴 적엔 하늘에 별이 눈부시게 많았다고. 별들이 갈수록 줄어든다고. 하늘도 하늘색이 아니라 쪽빛이었다고 말하셨습니다. 별들이 왜 줄어들었을까요? 누가 가져간 것일까요? 어머니께서 본 쪽빛으로 시린 하늘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엄마의 하늘’을 혼자서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지난 주 주말 저는 금강을 찾아갔습니다. 익산시 웅포면에 사는 엄남섭 님이 들려준 인상적인 얘기가 있습니다. 웅포강변에서 2km 거리에 사는 그는 옛날엔 철새 오리들이 꽥꽥거리는 소리를 집에서 듣곤 했다고 합니다. 그토록 먼 거리였는데도 말이죠. 금강하구둑이 생긴 후부터 그 소리는 사라졌습니다. 오리의 목소리는 누가 가져간 것일까요?

자연을 잃으면 사람도 없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소련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자연을 존경하지 않으면, 종국에는 우리자신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참되고 참된 말이라는 증거를 저는 굳이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바로 저의 삶에서 여러 번 깨닫곤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다니며 인간의 탐욕 아래 신음하는 생명들의 울부짖음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강과 자연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파헤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우리 자신을 만났습니다.

교우 여러분. 강이 상품인가요? 상품이 아닌 것은 만들지 않는 대기업들이 왜 지금 강으로 몰려가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태초에 강을 좋은 상품이 될 수 있게 창조하셨나요? 그래서 독실한(?) 크리스천인 이명박 장로와 그의 형제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노라’라는 말을 듣고 싶어 수억 수조의 생명들을 마구 살해하고 있는 것인가요? 이 대학살을 우리는 기억하고 또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분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을, 향린교회와 이웃해 있는 명동성당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한 대학생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만난 세 번째 전태일은 바로 이 사람입니다.

니체의 저서 중에 「이 사람을 보라!」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책이 있는데, 저도 ‘이 사람을 보라’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향린 교우님들께 간청드립니다. 이 사람은 노동자가 아닙니다. 이세우 목사님처럼 일평생을 농민과 함께하는 사제로 살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전태일 40주기를 맞이해 이 사람을 보라고 여러분께 요청하는 이유는 그가 마지막까지 추구한 예수의 삶,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 해방의 꿈이 기독인 전태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향린교회 교우들이 주일날 교회를 오가며 참된 신앙인의 삶, 참된 인간의 길을 찾아 헤매었듯이 그도 그랬습니다. 교우님들께서 민주화를 외치며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라고 노래 부를 때 그 학생도 여러분 곁에서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향린인들이 판넬골목에서 술을 마실 때 그는 옆 탁자에서 ‘농민가’를 부르고 민중가요를 불렀습니다. 교우님들께서 1987년 6월 항쟁 때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칠 때 그는 명동성당에서 시위대와 함께하며 불침번을 섰습니다.

누군지 아시죠? 요셉 조성만입니다.

요셉 조성만 님은 죽는 순간까지 사제의 길을 꿈꾼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사제의 꿈을 꾸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문정현 신부입니다. 그는 해성고등학교 시절 전주 중앙성당에서 문정현을 만났습니다. 그는 후배에게 말했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을 만났는데, 그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어.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용기 있게 하느님 나라를 얘기해주셨거든. 예수도 소외된 민중들과 함께했고 권력자들에 대해선 거침없이 비판하고 몹시 화를 내셨잖아. 문신부님이 그랬거든. 신부님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강론을 들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 것 같았어.”

당시 조성만은 오일팔 소식을 듣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광주의 학살 소식을 듣고 그는 데모에 참여하려 했지만 어머니와 형의 만류로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날부터 종일 그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광주의 폭도들을 진압했다’는 소식 외에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첫 번째 충격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는 죽는 날까지 광주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빠트리지 않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전주 중앙성당을 떠나 명동성당에서 활동합니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그는 꾸준히 존경하는 문정현 신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명동성당에서 그가 활동한 곳은 풍물과 민중극을 통해 문화운동을 하는 ‘가톨릭민속연구회’입니다. 민속연구회에 가입한 이유는 농민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꿈은 농민들과 함께하는 사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한국 교회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편지에 썼습니다.

“작년 청년대회 그림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건물 앞에서 하나의 가련한 하느님의 아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교회가 자꾸만 하늘로만 떠오르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군요.”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의 심정이 어떨까요?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그 시절의 교회들이 현재보다 땅에 더 가까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조성만은 자신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타를 편지에 남깁니다.

“하나의 허공에 뜬 존재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일 지도 모르죠.”
 

그의 삶을 취재하고 그의 일기장과 편지를 뒤적이며 저는 그가 걸어온 일관된 삶의 궤적에 놀라곤 했습니다. 그 궤적은 다름 아닌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조성만에게 예수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와 함께할 때 삶이 온전하고 행복한, 어쩔 수 없는 한 마리 어린 양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조성만 평전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삶을 고민하는 저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하늘과 땅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으로서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인용한 이 글과 거의 동일한 구절을 저는 전태일의 일기에서도 발견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용운의 시를 좋아했고 시 속에 등장하는 ‘님’을 예수로 상상했습니다.

조성만은 서울대 자연대 화학과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합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4년 2학기에 자연대 지하서클에 가입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시절 저항을 택한 이들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요셉은 지하서클에서 선배 함운경과 김세진을 만나 함께 활동합니다. 1985년 겨울 그는 카츄사가 되어 군에 입대합니다. 한미연합사령부에 배치되어 맡은 일은 학생운동권의 동향을 미군 상관들에게 보고하는 일입니다.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매일 미군 군가를 부르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하루는 주간보초를 서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뽑혀 쓰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무를 자세히 살펴본 이날 그는 편지를 씁니다.

“그 나무는 또 하나의 생명 법칙의 순리에 따라 다른 용도에 쓰여져 타 생명을 존재케 하는 똥이 될 것이외다. 인간도 역시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타인을 위한 똥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는 뿌리 뽑혀진 후 통나무가 된 이 나무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 벌어진 부활 사건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온 존재를 다해 ‘타인을 위한 똥’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1985년 5월 조성만은 놀라운 소식을 접합니다. 지하서클 선배 함운경이 미 문화원 점거를 주동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금기시되던 광주에 대한 관심이 타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그의 생애 지울 수 없는 비보를 접합니다. 그의 벗 김세진이 전방입소 거부투쟁 중 통나무처럼 불에 타 사라진 것입니다. 김세진은 전방입소철폐투쟁위원장이었습니다. 특별위원회는 전방 입소 훈련을 ‘미 제국주의의 용병교육’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미 제국주의의 용병은 다름 아닌 카츄샤로 근무하는 조성만 자신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자연대 지하서클에서 김세진과 조성만은 다소 생뚱하기조차 한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지하서클에서 종교는 아편처럼 여기는 분위기였지만 김세진과 조성만의 진지한 신앙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역사와 민중속의 교회를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김세진은 병원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부모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죽나요?”

요셉 조성만은 이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987년 5월 제대합니다. 하지만 미래와 출세가 보장된 서울대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오래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제의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고, 논의 끝에 부모님은 대학을 졸업한 후 가톨릭신학대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데 3년, 다시 가톨릭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신부가 되기까지 10년.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는 일기장에 씁니다.

“예수는 (지금보다 바쁘지 않은) 당시에 급하다 하면서 집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부지런히 쫓아오라고 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에 빨리 쫓아가지 못하는 상황(?)……”

저에겐 내년도 내후년도 있고, 아직 젊은 데다 열정도 있으니 당신을 따라갈 시간이 있지 않냐고, 왜 자꾸 서두르시냐고, 심지어 그러잖아도 콩알만한 재산을 어떻게 버리냐고 항의하곤 합니다. 게다가 저는 할 일도 많고 놓을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제대 후 명동성당에 돌아오자마자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성당 들머리를 향해 밀려옵니다. 바로 6월 항쟁입니다. 사람들은 최후의 보루인 명동성당을 찾아갑니다. 조성만은  항쟁 기간 동안 사람들의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는 6월의 명동성당에서 불타오르는 인간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성당의 시위대 공동체는  ‘능력대로 일하고, 싸우고, 필요한 만큼 배분되는’ 세상이었습니다.

6월 항쟁이 지난 후 조성만은 가톨릭민속연구회의 회장을 맡게 됩니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 기간엔 구로구 공정선거감시단원으로 활동합니다. 6월 항쟁의 결과물인 직접 선거를 공정하게 치러지게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부정선거로 얼룩졌고 구로구청에선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합니다. 부정 선거 소식이 알려지자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 찾아와 투표함을 지켰고, 뒤이어 백골단과 전경들이 진압을 시작합니다.

그는 구로구청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합니다. 용산참사에서처럼 후퇴할 곳이 없는 시민 한 명이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렸고, 조성만은 구청 건물 지하실에서 쇠파이프와 각목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집니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조성만이 보는 세상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지하실에 불을 켜고 싶었습니다.

요셉 조성만은 죽기 두 달 전의 일기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모습을 명동에서 만난 한 상인을 통해 진단합니다.

“체제가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많이 변화시키는 과정이 너무나 화가 나고 그 인간에 대하여는 너무나 불쌍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명동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인간이 쓰레기가 되었는가?”

이어서 그는 한반도를 이러한 ‘쓰레기 하치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울러 그는 “성서에서 예수가 질책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날의 일기에서 그는 또 말합니다.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일기와 편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되풀이 끊임없이 적혀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목마르게 ‘사랑’을 찾아 헤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를 쓰고 책을 쓰면서도 저는 이토록 사랑을 목마르게 찾아 헤매진 못하였습니다.

결단을 앞둔 1988년 5월 3일. 요셉은 괴로움 속에서 일기를 씁니다.

한 맺힌 반도에 태어나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부끄러운 한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괴로울 수가. 정신만 말똥말똥해지는 것이 더욱 자책을 하게 하는구나. 무엇을 생각해야만 차분해지는 것일까? 무엇을 생각해야만 불안한 마음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무엇을 생각해야만 담배를 물어가며 밤을 태우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미칠 것 같은 모습들.”

그리고 그는 편지에 씁니다. 이 글귀들엔 요셉은 없고 예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의 시간은 이미 나의 시간이 아니요, 나라는 존재는 이미 나 자신의 것이 아니올시다.”
“가시관이 눌러 씌워진 상태에서 신음하는 예수의 모습이 나를 부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수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풀인가 봅니다.”
“나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나갈 것이오. 처절할 정도로 예수와 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오. 우리의 껍질을 싸고 있는 옷가지와 거추장스러운 요소를 떠난, 몸 하나와 정신이 우리에게는 필요할 뿐이오.”

조성만은 그의 벗 김세진을 추모해 만든 노래인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조용히 부릅니다.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조성만의 유서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유서 첫 구절)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른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유서 마지막 구절)

그 순간 그의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의 유서는 그가 그토록 따르고자 했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쓴 마지막 연서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던 날입니다. 한겨레신문은 세계 언론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든 신문입니다. 후배 김경곤과 함께 지하철을 탄 조성만은 창간호를 펼쳐들고 감격어린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몰래 명동성당 교육관 5층 옥상 위에 확성기를 들고 나타납니다. 그는 옥상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때 어디선가 한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시민 여러분. 제발 나와 주세요. 여러분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다 죽습니다. 제발 나와 주십시오.”

1980년 5월 26일 밤. 광주 시내에서 들리던 소리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날 밤 이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10년 11월. 재능교육, GM대우, KEC, 두리반, 그리고 4대강에서는 지금도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조성만은 확성기의 사이렌을 길게 울렸습니다. 그 사이렌 소리가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셉 조성만이 떠난 후 그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규현 신부는 북으로 떠납니다. 문정현 신부는 그후 거리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공무원 신분의 아버지 조찬배는 은퇴한 후에야 아들의 뜻을 따라 유가협 회장을 맡아 일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너무도 선하고 아름다운 어린 양을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조성만의 어머니 김복성입니다. 그녀에게서 저는 전태일과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잃은 후 나이 쉰에 이르러 ‘가출소녀’가 됩니다. 한 달 중 반은 집을 떠나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노동자며 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만사 제치고 달려갑니다. 최루탄을 뒤집어쓰며 시나브로 아들의 사랑과 외로움, 슬픔과 분노를 고스란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녀가 서울로 향하는 길은 ‘눈물의 호남고속도로’였고 ‘눈물의 호남선’이었습니다. 그녀는 온갖 집회며 시위에 참여하며 아들을 만나고 예수를 만납니다.

‘우리 성만이가 여그 왔을 텐디.’
‘이 길을 걸어댕겼을 텐디’
‘이 의자에 앉아 집에 내려왔을 텐디.’

버스에서 울고, 기차에서 울고, 지하철에서 울고, 구호를 외치다 울고, 서서 울고, 앉아서 울고, 인도에 엎드려 울고, 길바닥에 서서 망연자실 울고, 자다 깨서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십 년 동안 ‘반은 미쳐서 돌아댕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반만 미치냐며 통째 미쳐 돌아댕겨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성만이 쓴 편지 중에 이상하게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추운, 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 양말을 신지 못한 하얀 발을 내놓은 시골의 아이가 생각이 나서 약간은 더 춥게 느껴지는 시간.”

사랑이란 이런 마음입니다. 백석 시인의 시 한 구절 같은 이 글에서 저는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이 만져집니다. 평화시장의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그 먼 퇴근길을 걸어가던 전태일도 양말을 신지 못한 아이들과 추위에 두려운 듯 몸을 움츠리는 도시 빈민들의 눈빛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자가용과 편리해진 교통은 이웃의 눈빛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운전자의 시선은 삭막한 아스팔트와 신호등과 자신보다 더 좋은 차를 몰고 지나가는 차들에 머물러 있진 않을까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마다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 속에서 양말을 신지 못한 하얀 발을 내놓은 아이”가 간직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일기 중 한 구절을 끝으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해방이란 개인적인 차원으로는 득도에밖에 이르지 않는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회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사랑이란 말이 승화되어 그 말이 없어지는 것이리라.”

“그 말이 없어지는 것이리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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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사-임보라 목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떠나간 전태일 동지의 뒷모습이 아닌,
고통 가운데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생명들을 내 몸과 같이 돌보던 그의 삶을 기억하십시오.

여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 적당히 의식있고, 양심있게 살려는 유혹을 떨쳐 버리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벗이라 부르시겠다던 주님의 음성을 쫓아 새로운 한주, 사랑하면서, 섬기면서 생명을 나누어주며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