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두렁 연가

예레미야애가 3, 17- 24 ; 히브리서 10, 32- 39


이  세 우 목사




[들녘교회는 지금!]


        그동안 안녕들 하셨습니까? 자매교회 목사가 인사를 올립니다. 매 해마다 잊지 않고 자매교회 목사를 불러 주시고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허락하신 교회와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그리고 사정이 있어 참여하지 못하신 교우들까지도 주님의 사랑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아침 매우 행복한 마음으로 서울로, 향린으로 올라 왔습니다. 여러분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행복했고,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행복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행복이 전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자매교회인 들녘교회는 가을 추수를 마치고 지난주에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지난 1년 동안도 큰 어려움 없이 주안에서 잘 지내 왔습니다. 지난 일 년 간 동네 어르신 중 70대 4분, 50대 여성1분 모두 5명의 교인이 교회에 출석해 지금 모두 교회에 잘 다니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인 중 2분이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한해 3분의 교인이 증가한 해가 되네요. 어린이부와 청소년부는 큰 변동이 없습니다. 올해 농사는 예년보다 2~30%정도 감소한 것 같습니다. 쌀값 수입에선 30%정도가 손해를 본 것이죠. 저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올 해 모든 농촌에서 다 똑 같이 겪고 있는 일입니다. 올 해 여름철의 잦은 비 등 기상 이변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잠시 후면 시작될 김장농사도 현재로선 마찬가지 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배추 작황이 너무 좋지 않아 보이네요. 


        올해로 자매결연 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다른 단체와 모임의 15주년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교회와 교회간의. 농산물을 연결로 한 15주년은 좀 각별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15주년을 함께 해 주신 교우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5주년의 성과는 이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두 교회를 따라 총회와 여신도회 차원에서 모두 7개 교회가 자매결연을 맺어 지금 모두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고, 다른 교단에서도 운동차원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교회가 늘어나고 있으며, 대학 강단에서도 연구과제로 삼아 교과목에 포함되는 가하면, 언론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계속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양교회가 이제는 새로운 전망도 세워 한국교회에 제시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시골 목회자의 고민들]


        여기서 잠깐 제 개인적인 고민도 말씀들이죠. 21년째 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에 대해 저 자신에게 질문이 요새 와서 부쩍 많아 졌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언제까지 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부족한 목사를 21년씩이나 데리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을 넘어 미안한 맘이 있습니다. 다양한 목회자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빼앗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슬슬 교인들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이 교회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목사로 기록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었는데 이제 20년이 넘었으니까 당분간 이 기록은 깨지기 쉽지 않을 정도로 위업 아닌 위업을 달성했으니 이제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또 오래 있으면서 교인들의 자발성을 많이 막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스스로 하는 것인데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목회자에겐 나 아니면 안 돼 라는 의식이 배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모여서 의논하기 보다는 저는 연세 지긋하신 교인들을 배려한다고 혼자서 짐을 짊어지고 일을 처리할 때가 많이 있었죠.


        또 한편 농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교인들과 신앙적인 일체감에 있어서 거리감이 크게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하는 것을 삶의 철학, 목회방침으로 정해 살아 보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신나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년을 넘게 농촌에 살면서 어려운 일과 고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늘 즐겁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회 활동과 일이 부담감이 생기거나 재미를 못 느낄 때는, 그 때는 내가 떠날 때가 된 것임을 알아 과감히 보따리를 싸야 된다고 하는 입장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확연히 들어 난 것은 아니지만 요즘 그런 징후들이 엿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긴장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0년 동안을 같은 사람, 같은 공간에서만 지내다 보니 속이란 속은 다 알게 되고, 미운 정 고운 정도 하루 이틀이지 고리타분한 것은 겹겹이 쌓여가고, 지루하고 답답한 것이 왜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밖의 활동을 많이 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비판적 자기점검을 해 봅니다. 즉 교회와 교인은 근본이 아니라 방편으로만 여기지 않았나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로는 기쁜 일, 슬픈 일을 늘 함께 나눈다고 하면서 교인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늘 우리 교인뿐만이 아니라 동네 주민이, 그리고 지역사회가 다 내 양이고 목회지라고 생각하며 목회를 해 왔는데 하다 보니 교인들은 빠지고 지역사람들하고만 가깝게 지낸다는 교인들의 불만을 낳게 된 것 같습니다. 지역의 여러 회의와 행사에 쫓아다니다 보니 교회 일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밖에 나가는 것 자제하고 교회 안에서만 지내려고 노력은 많이 합니다만 또 여기저기서 불러대면 꼼짝 못하고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와 한계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요즘 최대 고민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저를 이해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아예 포기를 하신 것 같아 더 죄송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눈물 없이는~]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젊었을 때의 목회적 소신과 입장도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철이 든 것일까? 아니면 적당한 타협을 한 것일까? 하는 고민도 있습니다. 목회한지가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저는 좌충우돌할 때가 많습니다. 일관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시골은 아직도 기복신앙이 신앙생활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데 저는 여기에 대해서 목회 초년병일 때부터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목회를 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기복신앙을 달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기 자식들, 손자들 잘되게 해달라고, 복 받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적 도리이고 부모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적어도 농촌교회 교인이 자기 자식들, 손자들 좋은 학교 들어가고, 좋은 직장 구하고, 좋은 혼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힘들고 지친 교인이, 병약한 교인이 건강을 구하는 기도는 당연하다 못해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모습이 아닌가? 평생을 남의 집 머슴살이만 하던 분이 나도 돈벼락 한번 맞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을 뭐라 탓 할 것인가? 너무도 힘들게 살아오신 분들이 죽어서 고생안하는 천당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등에 대해 목회 초기에는 잘못된 신앙생활이니 고치라고 가르쳤지만 요즘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조금도 비난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그거 다 배부른 교인들이, 팔자 좋은 교인들이나 하는 얘기다. 이렇게 교인들에게 거침없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수적이 되거나 아니면 타락한 목사가 아닌가 하는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함께 읽으신 애가서는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불쌍함과 슬픔 그 자체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게 멸망당한 국가적 재앙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굶주림, 목마름, 살인, 방화, 약탈, 성폭력, 강제 유배 등으로 고통당하는 울부짖음입니다. 폐허로 변한 땅도 신음하고 있고, 모든 것을 잃은 백성들은 실의에 빠져있습니다. 이는 비단 예레미야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에만 있었던 역사도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나라와 지역과 역사에서 발생해 왔던 역사의 질곡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생활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일입니다. 삶에는 모진 고난이 뒤 따르나 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날의 남한의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추수걷이를 끝낸 황량한 늦가을 빈 벌판처럼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습니다. 아니 남아 있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바람에 나 뒹구는 농약병과 비닐뿐입니다. 성난 민심도 사라지고 좌절과 절망만이 폐가를 맴도는 바람처럼 농촌을 휘감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우리 사회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세련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속은 병든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안쓰럽기까지 한, 이제는 한물 간 언제 어디서건 ‘1등’과 ‘최대’, ‘최강’, ‘최초’, ‘유일’, ‘최첨단’ 따위를 외치는 증상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끝없는 추락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과 위선과 독선, 타락과 파괴의 몸부림은 전 분야에서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심지어 학계, 종교인, 교육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한국인이면 누구에게나 파다하게 퍼져있는, 이미 도를 넘은 것이 하나의 일반적 사회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농촌은 이런 파행의 사회적 흐름에 영특하지 못해 따라가지 못하고, 사회적 탐욕에 스스로 무장 해제되어 전신을 알몸으로 내어주고 갈가리 짓밟히고 만 것이죠.


        히브리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모욕과 환난 등 숱한 고난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가슴 미어지는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연출되고 있습니다. 절망과 죽임과 죽음을 향해가는 고통의 길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역시도 오늘날의 농촌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2천 년 전에 기록된 성서의 내용이 오늘날의 농촌의 모습과 어쩌면 이리도 일치할까 놀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애가는 이러한 절망의 모든 상황이 급변하여 찬양이 됩니다. “주이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하심이” 크기 때문에 새 희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리둥절하기까지 합니다. 중요한 부분을 빼먹는 편집실수가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합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도깨비 방망이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이 보도를 어떻게 해석할지 난감합니다. 그러나 서신서의 말씀인 히브리서를 묵상하다 보니 그 실마리가 풀려집니다. 눈은 떴으나 삶의 깊이를 보지 못한 소경의 삶을 살 때, 입은 열려 있으나 주님의 공의를 제대로 담지 못할 때, 귀는 열려 있으나 주변과 세계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을 진실로 듣지 못할 때는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잘못과 어리석음을 먼저 용서를 구하고 우리 모두의 가슴에 주님의 영을 담게 되면 예레미야 애가의 비통함이 순식간에 희망이 되는 신비감을 알 수 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확신을 가질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농적 삶이 대안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확신,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리고 빼앗겼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농적(農的) 삶입니다. 저는 무조건 옛것을 되살리자고 하는 복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농적 삶은 삶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농적 삶이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고 구체적으로는 가장 치열하게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명의 발달이 날로 확장되어 삶이 편해지고 윤택해지는 것과는 달리 근원적인 불안의 삶이 우리를 갈수록 지배하고 있습니다. 삶과 존재의 위기, 문명의 위기, 생태계의 위기, 지구 전 생명계의 위기는 날로 커져가고 있고, 농촌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경제적 부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불안은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이 불안의 정체가 밝혀지면 농적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아찔할 정도로 아니 무서울 정도로 속도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빛보다도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의 세계는 거침없이 세상을 바꿔놓고 있고, 서울과 부산이 한나절 생활권으로 바뀌고, 멀리 있는 다른 나라를 방문해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이제는 하루만에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영상통화, 위치정도 등을 통해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소식들을 바로바로 알 수가 있고, 심지어 지도정도를 통해 누구네 집 앞뜰 빨래줄에 걸린 속옷까지도 구경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도시화, 문명화가 이뤄지면 어둡던 세상이 밝아 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나 이런 신념은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사라지게 된 것은 내가 이 사회의 부적응아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세상 살아가는 재미와 사람 사는 맛을 빼앗아 정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웬만한 일은 기계가 다 대신 해주고 앉아서도 세상 어디든지 다 볼 수 있고, 갈 수 있는 세상인데 무엇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과연 미래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편리함과 이 신속감을 누리라고, 여기에 따르거나 익숙하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지만 이제는 내려놓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편리함보다는 오히려 적응이 되지 않아 불편함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인터넷, 아이폰, 아이패드 등이 인간세계와 사람관계를 도와주어 편하게 하기 보다는 더 멀어지게 하고 심지어는 단절까지 이르게 하고 있지 않은가? 나만의 생각일 수 있으나 갈수록 현 문명사회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현대인들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끝은 어디이고, 그 대안은 무엇일까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고 있고, 속도와 경쟁의 도시적 삶은 지나친 개인화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풍요 속의 절대 빈곤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욱 깊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옛날 연애 방법은 <촌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징그러운 윙크, 쪽지, 편지 보내기, 휘파람불기, 손수건 떨어트리기 등이 있었는데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그 때가 그립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촌스럽다고 해도요. 밭두렁 사이를 두 손 잡고 거닐 던 추억은 없었는지요? 논두렁에서 사랑을 싹 틔우던 기억은 없으신지요.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밭두렁과 논두렁,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에게 손짓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논두렁의, 밭두렁의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듯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인생관과 철학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생 뭐 있어!’ 하며 적당히 풍요롭게 문명의 이기를 즐기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 아닌 것을 문제로 삼을 생각이든지, 괜한 시비거리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게 한가롭거나 평온하지도 못하고 지속가능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낭만!, 좋은 얘기입니다. 목가적인 농촌을 꿈꾸거나, 전원생활의 계획을 세우는 일, 여유와 쉼의 안식처를 농촌에 마련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서 충분히 가능하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농촌은 그럴 대상이 안 될 뿐더러 이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농촌하면 귀농해서 여생과 노후를 한가로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한참 모자란 철부지일 뿐입니다.


        농의 삶을 낭만적으로만 여기는 것은 전 지구적으로 드리워진 그늘, 불안과 위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 날 그 날 바쁘게 살거나, 주어진 현실에 만족해 안주했거나, 사회적 문제와 아픔을 외면했거나, 해야 할 일을 게을러서 안했거나 하는 데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위와 같은 답답한 현실과 이러한 모든 위기는 농적 삶을 외면내지는 파괴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병들어가는 지구도 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위와 같은 위기 앞에 자유로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 진리이고 사실일진대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하여야 할지는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 너무 문제를 어렵고 복잡하게 끌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 해결을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무겁거나 심각하게만 접근 할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신나고 재미있게 접근해야만 문제 해결도 되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또 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심각하지만 일은 신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빨리빨리”에서 “느리게”로~]


        저는 그 신나게 하는 운동으로 느림과 게으름운동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한 때 우리는 새마을 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시행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밤에 별 볼 때까지 일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날의 경제발전이 새마을 운동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을 많이도 해야 하지만 빨리하는 것이 새마을 운동의 특징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빨리빨리’라는 말이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유럽에 간 적이 있었는데 나보고 한국 사람이냐고 묻더니 그렇다고 했더니 ‘오 예이, 빨리빨리’라고 외치면서 맞아주는 상가주인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굿모닝하면서도 유독 한국 사람에겐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 대신에 언제 배웠는지 ‘빨리빨리’가 한국 사람을 맞이하는 인사로 사용되고 있어 혀를 내둘렀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특징을 놀랍도록 잘 표현하고 있어 그 의미가 매우 부정적인데도 불구하고 반박할만한 근거를 그 자리에서 내놓칠 못했습니다. 여행 중 식당에 들리면 열에 아홉은 그 지역의 특산음식을 찾거나, 또는 그 식당에서 가장 잘하는 음식, 먹고 싶은 음식을 찾는 것보다는 외국에서조차 가장 빨리 나오는 음식을 주문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속도와 부지런함은 사회적 미덕으로 굳게 자리를 잡을 정도로 새마을 운동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깊게 우리 사회에 미치고 있습니다. 이 ‘빨리빨리’는 시효가 소멸되지 않은 채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물질적 풍요와 소비, 그리고 편리함만의 추구라는 가치로 우리사회를 병들게 했다. 빠르다고 하는 것이, 부지런하다고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는 것이, 화려하다고 하는 것이, 똑똑한 것이, 출세했다고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발과 경쟁 속에 갈등과 파괴, 생태계의 심각한 오염과 훼손만이 넘치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천천히 그리고 게으르게 살 때입니다. 이제는 조금만 먹을 일입니다. 이제는 불편하게 살 때입니다.


        요즘 걷는 것이 인기인가 봅니다. 올레길, 둘레길, 마실길, 순례길 등이 곳곳에서 생기고 이용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 자동차로 싱싱 달리는 삶보다는 늦지만 걸으면서 천천히 살아보자는 의지들이 담겨 있지요. 한 때의 유행이 아니라 건강하게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어째든 이제는 화려한 도시적 삶을 되돌아보면서 마감할 것은 끝을 내고, 소박한 그리고 천천히 하는 생태적 삶을 성찰해 볼 때임이 분명합니다.


        목사에게도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많고 많은 건물 중에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유난히 교회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회건물이 시골에선 가끔씩 보여 정답기도 한데 도시에 들어오면 눈이 가만있지 못하고 뎅글뎅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입니다. 교회의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향린공동체는 이 교회의 무리가운데 언제나 늘 저항하고 투쟁해 와서 그런지 별난 교회, 이단아처럼 존재하고 취급받아 왔습니다. 늘 소수자 운동에 머물러 왔습니다. 그러나 자매결연 운동이 교단을 넘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듯이 저는 향린의 정신이 곧 주류운동으로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아 곧 오리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하면 향린을 떠올리고 한국교회의 중심에 향린교회가 우뚝 서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괜찮다, 괜찮다’ 하거나 ‘편안하다, 편안하다’ 하는 것은 범죄행위이고 죄악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분명 저항하고 투쟁할 때입니다. 그 길에 저희도 함께 걷겠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는 확신을 가지고 이 모든 고난을 인내하면 생명의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놀라운 은총이 극적인 한 번의 일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매일 같이 계속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향린공동체에 풍성하게 들려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임보라 목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햇살이 되어

강퍅하고 가난한 가슴 속에 스며드는 위로가 되십시오.


별빛이 되어

고통의 길을 걷고 있는 절망의 눈빛 속에 스며드는 희망이 되십시오.


그렇게 매일매일 다가감으로

그리고 더 살갑고 따스한 햇살과 별빛이 되어줌으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신실하심을

오는 한 주간도 여러분의 삶으로 증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