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잉태한 믿음

루가 1,46-55; 2 사무 7,1-11, 16; 로마 16,25-27 ; 루가 1,26-38

 

최 주 목사

 

 

 

 

우리들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시작들로 가득합니다. 학생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 일, 청소년기에서 성년기로 접어들면서 또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부부의 연을 맺는 일, 한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는 일 그리고 교회에서는 새로운 직분을 얻어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신도회의 임원이나 부서장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일 등, 우리의 삶 가운데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일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기대와 설레임을 가져다주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한해를 시작하며 새로운 결단을 내려 어떠한 직분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해보겠다는 희망찬 마음과 설레임으로 시작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듭니다. 특히 새롭게 교육부 교사를 맡은 분들이나 모임을 이끌어 가야하는 분들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과연 내가 교사로서, 모임을 이끄는 이끔이로서 잘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 앞에서는 당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겠지요.

최근 저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사가 아닌 목사로서의 직분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달 전 목사안수를 받고 임직식을 한 후 향린교회 부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전도사로 있었을 때의 삶과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제가 이 길을 가기 위해서 더 큰 용기도 필요할 것이고, 마리아의 고백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굳은 다짐과 용기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보아도 목사라는 직분을 갖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많은 두려움과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향린교우님들께서 생각나실 때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한 달 후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는 것은 행복하고 설레임을 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만큼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가 늘어나기 때문이겠지요. 저 또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출산으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가끔은 출산의 고통, 그리고 육아에 대한 고민들을 할 때면 앞으로의 삶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불안과 두려움 때문인지 요즘 저는 잠자리에 들었을 때 갑자기 하고 소리를 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깜짝 놀라 일어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잠을 깨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새롭게 주신 선물에 감사하며 용기를 내어보려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들 가운데 생명의 존귀함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하느님의 생명을 일구는 사역에 함께 동참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인 제2성서 루가복음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소위 수태고지로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셉과의 결혼을 앞두고 준비 중이던 마리아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말하기를 이 아기는 장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의 뜻이라 해도 아마 수용하기가 퍽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 상황에서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해준 소식에는 무슨 뜻이 담겨져 있었을까요? 마리아에게 일어난 이 모든 소식은 바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현대인의 상식으로 이해되거나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 사건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이야기가 그 시대에 그 공동체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고, 또한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를 통해 구원의 때까지 생명을 이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지므로 구원의 때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당시 유대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에 대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떤 아기도 하느님의 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적어도 한 아기가 태어나는 데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느님의 영 이렇게 세 당사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령에 의한 잉태는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들이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잉태될 수 없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개인이나 가족 혹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는 사건이 이 땅에 펼쳐지는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사건이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는 중요한 사건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냥 지나쳐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은 말구유가 아닌 멋진 곳에서 태어나고 나자렛이 아닌 부유한 곳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왕궁이 있는 곳,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인 예루살렘이 아니고 소외된 지방, 한 무명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중심부의 인물이 아니고 주변의 인물이었고, 기득권 출신이 아니라 철저히 빼앗긴 계층의 소외된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약속만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생명사건에 동참합니다. 마리아가 겪어야 할 어마어마한 두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그 아기가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메시지 하나만 믿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며 용기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전폭적인 자기 헌신과 하느님의 부름에 철저히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는 하느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확고히 믿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부름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통해 그렇게 열망했던 메시아가 평화의 주님으로 오심을 알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2성서에서 마리아를 통한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본 것과 같이 제1성서에서도 또 하나의 구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나단을 통한 다윗의 이야기지요. 흔히 이 본문은 왕조신학의 관점에서 다윗왕가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본문으로 해석되어지곤 합니다. 백성이나 민중의 입장이 아니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권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또는 왕권신수설과 같이 다윗의 왕위와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하는 측면에서 종종 해석되어지기 때문에 조금은 조심스러운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조금만 세밀히 들여다본다면 본문의 초점이 단지 다윗을 향한 축복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다윗에게 왕위를 주고 지켜주겠다고 하는 것은 다윗의 공적으로 인한 축복의 메시지나 자신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던 다윗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보잘 것 없는 한 목동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보호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다(16)” 하는 이 선언의 목적은 다윗 개인에 대한 축복이 아니라 주변 강국으로부터의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더 이상 이스라엘이 고통당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본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이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게 살게(10)’함이며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내어 평화롭게 살게(11)’함입니다. 다윗에게 하느님의 대리자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임무가 주어졌고 바로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다윗이 그 임무를 외면하고 자신의 왕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지배하는데 사용한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2항과 같이 권력은 국민을 구하고 보호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자신의 잇속을 채우고 자기마음대로 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정치적 수단이나 잇속을 위해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억압한다면 그가 교회의 장로라고 해도, 눈물을 뿌려 늘 기도한다고 해도 절대로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에 나와 있는 다윗의 이야기는 제2성서 누가복음의 내용과 같이 한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갖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랐던 마리아와 같이 다윗 역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순종함으로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생명과 평화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의 삶은 생명과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 민감하게 듣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들이 우리 삶에 놓여 있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생명의 소리를 들으려 애써보아도 희망조차 느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최근 한미FTA 비준이 통과됨으로 인해 자본으로 생명의 존귀함이 파괴되는 비극적인 상황, 절망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88만원 세대의 삶,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반값등록금을 외치며 거리로 나온 학생들의 울부짖음, 막개발로 인해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들... 이곳 저곳에서 살려달라 아우성치는 소리는 마치 희망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열어가기 위해 우리들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화해, 사랑, 평화,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 앞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고 발버둥치려 할 때 분명히 우리에게 두려움이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순종하는 용기를 냄으로 희망의 씨앗이 피워났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기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열었듯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그 두려움을 박차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희망의 열매들을 맺어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 시대가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과 용기가 모여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힘을 발휘해 보심이 어떨는지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작은 씨앗들이 힘찬 내일을 만들어 가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희망찬 첫걸음을 내딛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입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에게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확고한 믿음과 용기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흔히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주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자신이 손해를 가져올 것 같을 때에는 하느님의 뜻을 말하지 않지요.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설사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만 주의 뜻을 이야기하고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모른 채 한다면 믿는 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새로운 시작을 열어갈 때 그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두려움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자기를 전적으로 희생하는 헌신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주저앉지 마시고 마리아가 보여주었던 용기를 내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새로운 시작 앞에 놓인 향린 교우 여러분, 비록 여러분 앞에 위협과 두려움이 놓인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그 새로운 시작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의 계획을 믿으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전진하십시오. 그러할 때에 구원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새로운 희망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늘 깨어서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민감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새로운 시작에 두려움이 가득할지라도 이 땅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희망찬 새 시대를 열어가는 대림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2012년을 힘차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춘선 박사님의 대림절 묵상집에 있는 그리운 예수님중에서 한 부분을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슬프면 언젠가 슬픔이 없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고

지금 아프면 언젠가 아픔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가 품에 안길 사람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예수님은 나에게 돌아갈 곳을 보여주시고 안길 수 있는 품을 내어주신다

자신이 안겨있는 자리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며

우리의 그리움을 채워주신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우리에겐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공포와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외로움 속에 항상 함께 계신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시는 향린교우 여러분,

새로운 시작 앞에서 비록 위협과 두려움이 놓일지라도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굳게 믿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힘쓰십시오!

평화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새로운 희망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