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 생명의 빛 (성탄절 메시지)

시 98:1-4, 9절; 사 52;7-10; 히 1:1-6; 요한 1:1-5, 9-14


오늘은 성탄절로 인구수로 본다면 세계인들이 지키는 가장 큰 명절이요 축제의 날입니다. 어제도 이곳 명동 종로거리가 사람이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는데, 그 사람들의 태반은 교회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날을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가 도대체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그건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하신다면 그건 성서시험에서 정답일수는 있지만, 그 사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답변입니다. 만약 예수의 탄생이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인류의 구세주 곧 교회를 다니지 않는 그 사람의 구원까지도 포함하는 구세주로 오셨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그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 탄생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는 세상을 향해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쁨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복음서 4권 중에서 처음의 3권 마태오복음, 마르코복음, 루가복음은 공관복음서라 합니다. 이 말은 같은 시각에서 씌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공관복음이라는 말이 생겼는가? 그건 4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탄생이 아닌 창조 때부터 先在하신 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의 본문은 공관복음서가 아닌 요한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가 매우 다른데, 예수님의 탄생 얘기가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탄생 얘기가 있긴 한데, 전혀 판이합니다. 예수님을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탄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시던 분이 이 세상에 그냥 내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시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말씀’이 우리가 흔히 우리가 입으로 표현하는 ‘말’의 존칭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번역이라는 것이 애매한 부분이 많이 있어 원문의 뜻을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 또한 그러합니다. 42절에 가면 예수께서 시몬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과 1절에서 나오는 말씀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사실 이런 경우는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혼란을 막는 방법이 되기에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헬라어로는
ho logos입니다. 영어로는 the Word입니다. 대문자 W 입니다. 우리 언어에는 부정관사 정관사라는 용법도 없고 소문자 대문자 용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양언어에서는 관사 용법과 대문자 용법이 있고 관사가 정관사냐 부정관사냐에 따라 매우 다른 해석이 나옵니다.


지난 주 화요일 저희 집에서 부목사 준목 전도사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데, 그때 무슨 ‘뿌리 깊은 나무’ 어쩌고 하더군요, 제가 학생 시절에 ‘뿌리 깊은 나무’라는 문학잡지가 나온 적이 있어 저는 그게 재창간되었는가 하였는데 대화 내용이 전연 달라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연속극 제목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전도사님들의 표정이 아니 그것도 모르면 어떡하냐?는 약간은 시대의 뒤떨어진 사람을 쳐다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그러더니 고준목께서 <뿌리 깊은 나무>는 꼭 봐야한다고 하고, 한 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강조를 해서 지난 주 목요일 평택의 쌍용차 해고자들을 위한 거리 촛불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돌아와서 마지막 회, 마지막 15분정도 보았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반포에 관련한 연속극이었더군요. 저는 이 연속극에서 한글의 철학적 이해 곧 서양 언어와 비교한 어떤 얘기가 있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혹 누가 아시는 분이 계시면 제게 말씀 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씀:
ho logos]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서 신적 이해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단어였습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모르면 안 되듯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단지 기독교 복음서 안에서만 얘기되는 주제가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적 화두였습니다. 말씀이라고 주로 번역이 되지만, 이야기, 설명, 근거, 법칙, 이성 등의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당시의 헬라철학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지금 요한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언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소통을 가로막는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누구이냐? 하는 존재 이해에서 요한은 그에 앞서 있었던 마르코 마태오 루가와는 전혀 다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가 겪어야 했던 공동체의 요구가 전연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주 줄여서 말한다면 ‘그분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사실 마태오나 루가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얘기하지만, 어찌 되었던 이는 여성의 자궁을 통한 출산입니다. 엄마와 아기 예수 사이에 탯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질문이 나올 수 있는 논란을 제공합니다. 요한에게 있어서는 동정녀 탄생 주장마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 요한복음은 그 서두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 이전부터 계신 신적 존재로 규정한 다음, 이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분으로, 당시의 인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발언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가는 새로운 창조자로 얘기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12제자들뿐만이 아니라 당시 가장 학식 있고 존경받는 랍비 니고데모로부터 가장 업신여김을 받는 사마리아 여인까지 모두가 제자가 되었음을 말하고, ‘나는 빵이요, 나는 문이요, 나는 목자라고 하는 일곱 개의 에고에이미라는 구절을 통해 그의 신성을 암묵적으로 계속 이야기 하다 급기야는 예수를 잡으러 왔던 로마 군병마저 그 앞에 엎드리는 매우 묘한 장면을 보여준 다음 급기야는 맨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의 쌍둥이로 알려진 의심많았던 제자 토마스가 부활의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고백되지 않는 표현으로 그의 복음서를 마감합니다.


[요한복음의 혁명성]


역사적 예수에 천착할 때, 가장 소홀히 다루어지는 복음서는 요한복음서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면서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결코 떼어서는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듯이 공관복음서는 요한복음서와 그 짝을 이루어 복음의 완전성을 갖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교회는 천년 이상 성탄절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어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이적의 책(the Book of Sign, 기적과는 다른 표현입니다.)이라 부르고, 13장부터 21장까지는 영광의 책(the Book of Glory)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요한복음서는 예수를 신적 존재로 그린 가장 비현실적인 종교적인 책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더 혁명적인 성격이 강한데, 그것은 하느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비움의 증언 때문입니다. 그것도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어둠이요 죄악입니다. 그런 악의 세상 속에 선의 절대인 하느님이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당시 헬라인들에게 있어 로고스를 통한 신적 경험은 오로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신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같은 로고스를 말하면서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의 선택의 신비성을 과감히 부셔버린 것입니다. 그 로고스 하느님이 이 땅에 육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둠에 묻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육, 헬라어
sarx 거칠게 번역하면 ‘살덩어리.’ ‘고기덩어리’로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왜요? 그건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그는 개인의 인격성이 함축된 몸(soma)이라는 헬라어도 사용하고 인간(anthropos)을 뜻하는 헬라어도 사용하는데, 굳이 sarx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이 선언을 매우 당연하게 듣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살았던 시대에 이는 당시의 시대적 사고를 밑바닥에서 뒤집어엎는 혁명적 사고였습니다. 당시 믿음의 기본은 어찌해서든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닮아서 이 악으로 규정된 인간의 육의 모습을 벗고 휘황찬란한 신적인 영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믿음의 목표였는데, 요한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신이 이 땅에 내려왔다 영생 구원을 위해 하늘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
sarx와 발 씻음]


그리고 이런 요한의 혁명적 신 이해에 가장 클라이맥스가 되는 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입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전하는 성찬 예식 대신에 발을 씻겨주는 예식으로 그 마지막을 마감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서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돌아와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적 삶과 그 사랑의 행위를 기억하고자 성찬식을 행합니다만, 요한의 전통에 따르면 우리는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은 물론이고 매주 성찬식을 행하는 개신교 교회들도 많습니다만, 서양의 어느 교회는 성찬식 대신 매 주일 세족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매주일 세족식을 행한다면 교회가 좀 더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한다면 세족예식을 매우 강조하는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의 오심을 드러내는 매우 강렬한 상징 예식입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예수님 당시 종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아무리 주인이지만, 남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가장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썩어지는 육신, sarx의 가장 밑바닥이 바로 더러운 발입니다.


왜 성탄절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이제는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신이 자신을 비워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날이고 단지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종의 몸으로 낮춰 우리의 발을 씻겨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비움과 섬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는 이유입니다.


요즘 북조선의 김정일위원장 장례식 조문단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 앞에 가서 화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이건 같은 민족끼리 상대방의 발을 씻어주지는 못할망정 조문마저 거부하니 이 어찌 인간의 도리라고 말하겠습니까? 정치는 정치이고 종교는 종교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지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니까요.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간격을 깨뜨리신 것이고 이 담을 허무신 것입니다. 북쪽 형제들이 슬퍼하는 장례기일이 우리가 축하하는 성탄절과 맞물려 있어 과연 우리 남쪽의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올해의 성탄절에는 무엇을 기뻐해야 할지 모순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평화의 빛]


아기 예수의 가장 큰 상징은 평화입니다. 첫 성탄절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들의 합창이 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지금 제주도 강정마을의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들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강정 해군기지에 거주하는 미국의 핵항공모함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럼비 바위 속에 살아가는 붉은발말똥게와 맹꽁이와 방풍초와 층층고랭이와 연산호가 함께 공존해가는 진정한 평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 향린교회 또한 이런 평화를 지향하여 왔습니다. 그래 오늘 성탄절을 맞아 교회 건물도 없어 마을의 회관에 모여 저희들과 함께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우리의 자매교회입니다. 성탄절에 주시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알아보고 계시나요? 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왜 사람들은 만삭의 여인이 애절하게 두들기는 문고리 뒤흔드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요? 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닥까지, 거리의 바닥까지 낮아지면 주님이 보입니다. 오후에 시청 건너편 재능교육 해고자들이 4년째 농성하고 있는 거리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뜻을 합쳐 성탄절 축하예배로 드립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올해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12월 25일과 다음주 1월 1일은 표기하는 년도만 다를 뿐 내용상으로는 별반 다를 바가 없겠지만, 우리가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하나의 매듭을 맺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마음의 다짐은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해를 맞아 몸과 마음을 비우는 영성 단식훈련을 갖습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세례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 예식이나 향린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는 신고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을 진정 비우고 낮추어 이웃의 아픔을 품는 그래서 참 자기를 세워나가는 새로움 인간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입니다. 원어는
sarx 살덩어리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은 위풍당당한 세상 승리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낮춰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끝내는 십자가에 달려 살덩어리가 찢김을 당하는 그 처참한 실패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비움과 낮아짐, 화해와 용서 속에 임하시는 하늘 영광을 이해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에서 떼는 떡은 제가 지난 2주전 평양 봉수교회에서 운영하는 국수공장에서 가져온 남쪽 교회에서 보낸 밀가루 반죽 떡입니다. 오늘 세례식의 물이 평양의 신덕샘물과 제주의 삼다수 물을 섞어서 썼듯이 남과 북의 형제들이 함께 나누는 떡입니다. 국경을 넘어 이념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자매와 형제로서 나누는 떡입니다. 이 떡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이 함께 나누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덩어리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듯이 이 떡은 예수의 부활의 몸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신의주 평양 그리고 서울, 제주까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하나의 몸으로서 말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