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신영복 교수 〈프레시안〉창간 5주년 기념 특별 강연

2006-09-26 오전 11:24:28





"진지한 소통은 사라지고,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과 대립만 남아 있는 곳." 한국 사회에 대한 이런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은 많다. 그렇다면 해법은?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한데 모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널리 지혜를 구하여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은 언론의 대표적인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프레시안〉 역시 이런 반성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애써 온 〈프레시안〉은 창간 5주년을 맞아 지난 21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강연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신 교수는 이해관계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소통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당장의 밥벌이와 무관한 인문학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신 교수는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도록 우리를 길들여 온 근대화의 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볼 것을 주문했다. 모든 것을 화폐 가치로 단일화시킨 상품 사회가 근대화의 토대가 됐다고 지적한 신 교수는 목표의 달성만을 강조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는 `길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근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자기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존재론`의 패러다임이라며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관계론`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관계론의 철학이란 개인을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론의 철학은 우리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면면히 살아 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시각이다.

신 교수는 또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우직한 실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태도는 일견 어리석어 보이지만 세상은 이런 우직한 이들의 발걸음에 의해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이 이런 우직한 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취할 때 언론은 사회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직한 이들,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세상을 가장 깊고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신 교수는 우리 사회가 소모적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루려면 강물의 움직임에서 배움을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항상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 결국 바다에 닿는 강물처럼 낮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하방연대`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방연대`의 길에 언론이 앞장설 것을 주문했다.

이날 강연은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이 뿜어내는 열기로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지난 21일 한국일보 본관 12층 강당에서 진행된 신 교수의 강연 내용 전문이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프레시안

〈프레시안〉창간 5주년을 축하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른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시작해서 5년 동안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소개할 수 있는 매체가 됐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창간 5주년을 맞는 〈프레시안〉에 대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신뢰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프레시안〉이 앞으로도 이런 역할을 계속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나이든 사회, 그래서 고집이 세다

사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듯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은 굉장히 답답합니다. 누가 이야기를 해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다룬 쟁점들을 되짚어 볼까요. 소위 전시 작전통제권, 한미 FTA 문제부터 심지어 헌재 소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서로 합의해내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 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저도 참 답답하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속 시원한 방도가 없어요.

사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느끼게 된 것이 "나이 드신 분들은 굉장히 고집이 세다. 그리고 그 고집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결론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역사의 결론이라는 것이죠.

한국 사회를 가리켜 흔히 젊은 사회라고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예요.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 온 사회거든요. 켜켜히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 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등 우리 사회에서 아주 열띤 담론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예정돼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는 앞으로의 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내용에 국한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조금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해관계만 놓고 대립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설 곳이 없다

제가 나눠 드린 유인물을 볼까요.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인문학과 소통의 장(場)`이죠. 며칠 전 고려대 교수 70여 명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어제(9월 20일)는 민교협에서도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도 좋은가?" "인문학이 이토록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이 지속가능할까?"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지요. 앞서 이야기한 교수들의 성명은 이런 공감대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우리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사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저 비싼 음식을 내놓기만 하면 대접을 잘 한 것이라는 생각, 일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오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물질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고 있는 사회거든요. 그리고 이런 사회를 뛰어넘게 해 주는 게 인문학의 역할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인문학은 사치? 천만에!

▲ ⓒ프레시안

인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꼭 소개하고 싶은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저희 학교(성공회 대학교)에서도 시도하고 있는 것인데요. 클레멘트 인문학 강좌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얼 쇼리스라는 분이 처음 시작한 것이지요.

이 분이 뉴욕 형무소의 재소자들을 오랫동안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각종 마약, 폭력 사범을 대상으로 진행한 일종의 워크숍 같은 행사에서였지요. 행사를 진행하던 도중 이 분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20살이 채 안 된 여성 재소자와의 인터뷰에서였어요. 그 재소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왜 우리들은 연극이나 음악회, 오페라와 같은 예술적 경험을 할 기회가 없는 거죠"라고요.

흔히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의 경제적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인문학은 그들에게 불필요한 사치라고 여기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당장 돈이 되는 내용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게 오히려 협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얼 쇼리스는 빈민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강좌는 지금까지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당장 돈이 되는 내용이 전혀 아님에도 말이지요.

인문학이라는 게 물론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 소통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는 이해관계만을 놓고 다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앞서 이야기한 클레멘트 강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인문학, 사회적 소통의 전제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학교 공부는 보통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에 둔 것이었습니다. 당장의 경제적인 쓸모는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역사, 철학이 보다 완전한 인간을 기르기 위한 이상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게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대신 돈이 되는 공부, 잘 팔리는 학문이 대학을 차지하게 됐죠.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의 대립, 갈등, 소통의 단절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좀 생소한 말일지 모르지만 인문주의자를 영어로 휴머니스트라고 합니다. 휴머니스트가 없는 사회. 참 삭막한 사회지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회를 흔히 인문학의 본고장이라고 합니다. 아테네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 같은 필로소퍼 킹(Philosopher King), 즉 철인 군주를 갖지는 못 했죠. 하지만 필로소퍼 시티(Philosopher City), 즉 철인 도시를 세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런 배경에서 피어난 것이지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소통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통이 가능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하죠. 그게 바로 인문학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知), 즉 안다는 게 무엇이냐?"라고요. 그랬더니 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인(知人), 즉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요. 요컨대 앎이란 바로 사람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또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애완견에 대해, 또 어떤 친구들은 주식이나 아파트에 대해 전문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잘 알 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이 정작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데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이고요.

빌딩과 다리가 아닌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그린 서울의 얼굴

제 경험 하나를 이야기할 게요. 제가 교도소에 참 오래 있었잖아요.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강에 제2한강교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지하철도 뚫리고, 63빌딩도 세워지고, 제3한강교도 놓였지요. `제3한강교`라는 노래도 제가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나왔어요. 그 시절에는 감방에 신입이 들어오면 감옥에 와 있는 사이 변한 서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한 일과였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은 방에 있던 젊은 친구 하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 서울의 발전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꼭 핀잔을 주곤 했어요. 서울에 새로 생긴 건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얼마나 높은지 아냐"라고 말하면 "임마 그게 네 거냐. 쳐다보면 고개만 아프지"라고 대꾸하는 식이지요.

그 젊은 친구는 서울역에서 13살 먹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동생을 10년 뒤에 만났어요. 어디에서냐 하면 서울의 어느 사창가에서요. 처음에는 이 친구가 동생을 못 알아 봤대요. 그런데 동생이 먼저 오빠를 발견하고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