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야만을 향하여 내지른 수학자의 비명

번호 228990 글쓴이 김정란(상지대) 조회 2088 점수 843 등록일 2007-1-18 18:07 대문 13 톡톡 0




2007년 대한민국. 수학자가 법관을 향해 석궁을 쏘았다. <석궁>. 이름만으로도 고색창연하다. 중세기 기사들이 말 달리면서 사용했던 무기. 수학자는 왜 <석궁>을 선택했을까? 그는 왜 자신의 분노를 사회에 전할 무기로 하필이면 <석궁>을 선택했을까?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진다.

석궁은 중세기 신화관련 책을 읽다 보면 무수하게 접하게 되는 단어이다. 신화 기술자들은 상당히 먼 거리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석궁을 쏘아 당도할만한 거리> 라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마법사 멀린이 세운 구리 기둥에 대해서도 <석궁을 쏘아 닿을>만큼 아득히 높다고 말하는 식이다. 아마도 석궁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장 멀리 가는 무기였던 모양이다. 즉, 다시 말하면, 나의 힘의 의지를, 나 바깥의 외계로 가장 먼 거리까지 실어다주는 도구. 내 팔을 가장 멀리까지 연장해 주는 도구. 김 교수는 왜 그 도구를 선택했을까?

무엇인가가 그를 공간 안에서 움쭉달싹하게 만들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를 붙잡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언제나 서 있던 자리에 고꾸라져 죽으라는 마법의 저주에 대항해서, 공간을 가로지르기 위해서? 그가 서 있도록 저주받은 그 위치에서는 도저히 그의 의지를 공간 저 너머로 전달할 방법이 없으므로? 학교와 학문의 자유,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사법 편의주의를 가르는 긴 공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 잔인한 공간을 가로지르기 위해서?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법관의 비명소리가 아니라 김 교수의 비명이었다. 그 비명은 내 내면 깊은 곳에서 공명했다. 2007년 1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내 영혼도 늘 비명을 삼키고 살아가므로. 석궁은 내 가슴팍에 정확하게 꽂혔다.

2007년 1월에도 한 지식인이 중세의 무기를 들 수밖에 없는 나라, 이곳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현대의 이름을 가진 중세이다. 김 교수의 석궁은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의 언어는 여전히 빽빽한 기득권의 회로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 여전히 영주님들의 언어만이 소통되는 곳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 회로에 들어가지 못한 언어는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공화국 대통령의 말조차 영주님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잔인하게 난도질당한다. 하물며 일개 수학교수의 말쯤이야.

소통되지 못한 언어는 무기로 변질될 수 있다. 바스티유를 부수었던 곡괭이는 처음부터 곡괭이는 아니었다. 김 교수가 10년 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재임용 탈락되기까지 저간의 일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문제의 본질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료 출처 : 김명호 교수 홈페이지http://geocities.com/henrythegreatgod/tocourt.htm).

결국 그는 틀린 입시 문제를 지적했고, 그리고 그것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자는 동료 교수들에게 반발했으며(1995. 1. 16), 그것을 외부에 알렸고, 그 때문에 미움을 받아 두 차례 승진에서 탈락했고(1995. 1. 27/1995. 10.), 정직 3개월의 중징계(1995, 12, 12)를 받았고, 중징계를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재임용에서 탈락(1996. 2. 29)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주장하듯이 그 일이 김 교수가 받은 징계/승진탈락/재임용 탈락과 아무 연관이 없다면, 입시문제 지적이 있은지 일주일만(1995. 1. 26)에 학과 교수들이 학교 측에 징계요구서를 제출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95년 9월 27일 김 교수에게 전달된 학교 측의 문건에는 이런저런 다른 이유와 함께 해교행위의 일환으로 “입학시험 채점 업무 시 배타적 태도로 혼란을 야기” 시켰다는 문항이 분명히 적시되어 있다.

학교 측이 “연구실적 미달”이라고 바깥으로 전한 이야기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더군다나 잘못된 문제를 제출했던 당사자인 두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김 교수의 논문에 대해 승진 부적격 판결을 내린 것을 어떻게 공정한 판결로 볼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은 선배교수들의 친일 문제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가 6년여에 걸친 투쟁 뒤에 복직했던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의 문제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 사건에서도 학교 측이 처음에 들고 나온 구실은 “연구실적 미달”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교수 자질”의 문제를 들고 나왔었다. 이번 사건도 완전히 판박이로 진행되었다.

석궁 사건이 터지자, 김 교수의 교수지위 확인 청구소송의 주심판사를 맡았던 서울고법 민사2부 이정렬 판사는 법원 내부 통신망에 글을 올려 “재판부는 김 전 교수가 제기한 대학입시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었다는 점과 오류 지적에 관한 보복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는 점을 모두 인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판사는 재임용 탈락의 또 다른 원인이 김 전 교수가 “교육자적 자질”을 갖고 있지 못했던 점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의 논리는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학생들에게 점수를 잘 주지 않았던 점, 또는 학생 지도에 살가움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 등이 거론되었던 모양인데, 그런 기준은 너무나 자의적이며, 주관적이다.

게다가 재판부의 이러한 판결은 결정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식이라면, 부당한 방식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동료 교수에게 <보복>을 저지른 교수들의 “교육자적 자질”은 어쩔 셈인가? 그들의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은 어떠한가? 그런 부당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교육자적 자질”이 충분하므로 교수직을 수행해도 괜찮고, 그들이 저지른 짓에 관해 문제를 지적한 사람은 자의적인 기준으로 재단된 “교육자적 자질”의 잣대에 따라 교단에서 쫓겨나야 한다. 이런 판결을 누가 납득하겠는가?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 사건은 꼭 이런 상황이다. 어떤 시민이 강도를 당했다. 그가 참을 수 없어서 강도에게 욕을 했다. 그러자, 재판관이 와서 강도질 한 사람은 그냥 놓아두고, 욕한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으니 그의 모든 생존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는 식이다.

김 교수의 문제 해결 방식이 옳다는 뜻이 아니다. 물리적 힘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한다. 나는 단지 김 교수의 절망의 깊이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석궁 사건은 석궁 사건대로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김 교수 재임용 탈락에 대한 상황도 명쾌하게 밝혀져야 한다.

재판관은 신이 아니다. 재판관이 판결의 장에 인격 판단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더더군다나 김 교수에게 “비인격적인” 범죄를 저지른 교수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실제로 학교 측에서 그 교수들의 행태를 문제 삼지 않는 한, 재판부가 그 “교육자적 자질”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그 교수들에게 가할 수 있는 제재는 아무것도 없다),

지극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성품의 문제를 법의 틀로 재단하려고 하는 것은 중세적 폭력처럼 느껴진다. 김 교수가 쏜 석궁은 석궁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듯 무기가 되어 버린 소통의 장애이다. 현대의 모습을 한 중세의 어두움을 향해 내지른 비명이다. 그의 행위를 단죄하기 전에 그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는 이 사회의 중세적 몽매와 그것을 온존시키는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 김정란(상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