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중, 인간만큼 탐욕스러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주변의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고, 늘 땅을 파헤치고 갈아엎어야 하며, 나무를 불태우고, 뿌리 뽑고,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며, 다른 어떠한 생명체와도 공존하며 살아가기 힘든 존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광물과 자원에 강한 집착을 보이며, 그것을 캐내기 위해 지하 수십 미터라도 마다않고 들어가지만, 그것이 다시 생성되고 원상복귀 되는데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소진시키고, 소모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좀 더 부유하게 살겠다는 욕심에 주변을 오염시키고 황폐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동족을 살해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영역싸움이나 짝짓기 때문에 큰 싸움을 벌이고, 그러다가 동족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긴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동물들은 욕심이 아닌 생존의 문제 때문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이고, 인간처럼 복수를 위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심지어 사이코패스처럼 쾌락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동물들은 없는것 같습니다.

 

인간은 욕심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의 것에 탐을 내고, 상대방을 음해하고 흠집 내기에 몰두하며, 남을 짓밟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를 갈망하고, 결국 상대방의 것을 빼앗았을 때 강한 성취감을 느끼는 잔인한 동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성문법(成文法)과 관습법(慣習法)같은 각종 법규와 규칙, 도덕적 잣대를 통해 인간들이 적정선 내에서만 욕심을 부릴 수 있도록 조절해왔고, 그것을 어기는 인간에게는 규제를 가해 마음껏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법규와 규칙 같은 것들을 이용한 단속은 커다란 틀 속에서 적용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소수의 집단과 집단의 문제,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는 큰 역할을 하기가 힘이 듭니다.

 

통상 이런 소수의 문제에서는 대부분 도덕적 잣대가 적용되는데, 이것은 개인의 양심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엄연히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이웃 간에도 갈등이 조성될 수 있으며, 때로는 심한 다툼으로 이어지고, 더욱 심할 경우 파국(破局)을 맞이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연극 [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이런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생긴 갈등이 어떻게 한 가정과 자매를 망가뜨리는지, 극적인 심리 묘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미국, 뉴올리언스에 남부의 명문가문 출신의 블랑쉬가 도착합니다.

 

화려한 복장의 블랑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다시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탄 다음, 엘리지언 필드(Elysian Fields), 낙원에 내립니다.

 

그곳에는 몇 년 전 헤어진 그녀의 여동생 스텔라가 남편 스탠리와 함께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스탠리는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경험도 있는 폴란드 출신의 노동자로, 음주와 도박을 일삼으며 거침없는 성격을 소유한, 다혈질의 거친 사내였습니다.

 

늘 공주처럼 옷을 입고, 고상한 말투를 즐기며, 샤워실을 점령하여 언제나 긴 목욕을 즐기는 블랑쉬와 스탠리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적 매력이 가득한 스탠리에게 블랑쉬는 경멸과 호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고, 세사람의 묘한 동거는 계속 이어집니다.

 

어느날 스탠리는 친구들과 포커판을 벌이게 되고, 그곳에서 함께 포커를 즐기던 미치는 블랑쉬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고향의 웅장했던 저택 [벨리브]를 잃어버리고 오갈데 없어 동생 집에 얹혀살던 블랑쉬는 미치와 진지한 만남을 갖게 되지만, 둘 사이는 애초에 크게 어울리던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스탠리는 블랑쉬가 고향에서 난잡하게 행동했던 추문을 듣게 되고, 그녀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던 미치에게 이야기를 하여 둘 사이를 끝장냅니다.

 

스탠리가 없을때 스텔라에게 폴란드 잡종 운운하며 그를 모욕했던 일에 대한 대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낸 것이지요.

 

그러나 블랑쉬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스텔라가 아이를 출산하러 병원에 간 사이, 블랑쉬는 스탠리에게 또다시 허세를 부리고, 그것을 참지 못한 스탠리는 그동안 그녀에게 쌓아온 불만을 한꺼번에 표출하다가 급기야는 그녀를 능욕하게 됩니다.

 

결국 블랑쉬는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고, 그녀가 원했던 화려하고 행복한 삶이 아닌, 정신병원에 갇히는 불행한 삶으로 그녀의 인생은 송두리째 변화되고 맙니다.

 

과연 이 비극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언제나 과격하고 폭력적이며, 술과 도박에 빠져있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며 자신의 고집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강렬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다혈질의 마초맨 스탠리의 책임일까요?

 

아니면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얕잡아보며, 귀족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과거의 영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 부적응 자이자, 허풍과 허세와 거짓말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던 블랑쉬의 책임일까요?

 

이 작품은 정말 냉정할 정도로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의 편도 들고 있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심을 갖고 있지 않고, 심지어 선악의 구별도 없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던 두 사람이 부딪혔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두 사람 모두의 책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블랑쉬가 능욕당해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 결말을 보고, 스탠리가 가해자이며 블랑쉬가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탠리도 피해자라고 단언합니다.

 

스탠리는 블랑쉬가 오기 전까지 스텔라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블랑쉬가 끼어들게 되면서 스탠리는 귀족처럼 행동하는 블랑쉬 때문에 강한 모욕감을 느끼게 되었고, 허망한 욕심을 부리게 되었으며 - [벨리브]라는 막대한 재산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욕심 - 결국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블랑쉬를 강간하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이 결국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도덕적인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러한 내용을 통해 관객들에게 삶의 방향성과 지향성, 도덕적 순수성을 되찾으라고 웅변하는 내용도 아닙니다.

 

작가 테네시 윌리암스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블랑쉬처럼 쇠락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말고,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스탠리를 통해 현대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냉소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배종옥은 다소 끈적끈적해 보이기도 하는 농염한 여인의 모습과, 고상한 귀족적인 여인의 모습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블랑쉬를 잘 표현해 내었으며, 때로는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시선과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절정의 연기력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역의 이석준은, 개인적으로 조금 더 마초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소 아쉬웠습니다.

 

연극열전 시리즈가 다소 가벼워진 듯해서 아쉬웠었는데, 이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모처럼 묵직한, 정통 공연을 보여준 듯해서 비교적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나니, 흑백영화의 걸작이었던, 비비안 리와 마론 브란도 주연, 엘리아 카잔 감독의 동명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군요. ^^

 

 

 

사족(蛇足)....

 

미국 뉴올리언스에 실제로 ‘욕망’ 이라는 전차와 ‘묘지’ 라는 이름의 전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태풍 카타리나 이후에도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전차의 이름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런 작품을 만든 작가의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가 없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