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넘겨받는다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한제국의 통치 국가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은 조선왕조로부터 519년간 이어져 내려온 역사를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조선의 마지막 100년은,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온갖 약을 먹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멸망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참담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간악한 사건중 하나였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건이었습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을 무단으로 침입한 일본군과 일본의 낭인들은, 경복궁을 방어하던 시위대와 명성황후를 끝까지 지키려하던 궁녀들과 대신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결국 명성황후를 찾아내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뒤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고 하니, 아무리 식민지 확장과 쟁탈에 모든 것을 건 제국주의 시대였다 하더라도 이는 기본적인 도리와 법도를 무시한 야만적인 행위라 하지 않을수 없겠습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이런 치욕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된지 100년만인 1995년에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을 대표하는 초대형 뮤지컬입니다.


사실 저는 역사에 대해 그리 박식한 편도 아니고, 엄청난 애국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었던 저는, 1995년에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작 의도에 대해 의아함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주제로 뮤지컬을 만들었을까요....?


명성황후에 대해 구한말 대원군과의 '권력다툼'으로 나라를 거의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 작품의 원작인 이문열의 희곡 [여우사냥]을 먼저 읽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명성황후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여우사냥]의 서문에 이문열 작가 본인도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상당한 오해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평소 친구였던 윤호진의 부탁을 받아 희곡을 완성하기 위해 명성황후와 그 당시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그렇게 희곡을 완성하면서 명성황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꺼져가는 불꽃과도 같았던 대한 제국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 했던 그녀를, 그리고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으리라 생각되는 연산군을, 고종을, 또한 그들과 뜻을 같이했던 수많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을 어떻게 욕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문열의 희곡 [여우사냥]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명성황후]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속의 마지막 대한 제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작은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민비 살해범 공판장면’부터입니다.


대한제국의 황실에 무단으로 침입해 한 나라의 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미우라와 그의 일당들이 무죄를 선고받는 장면들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작품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 홍계훈의 무과시험 장면, 상당히 인상적인 수태굿 장면, 양이와의 전투, 임오군란등의 장면들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긴장감을 서서히 끌어 올린 이후에, 일본이 서서히 야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1895년 10월 8일 바로 그날, 명성황후를 지키려던 홍계훈과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한 죽음과 명성황후의 최후를 보여주고, 조선이 다시 깨어나서 일어나기를 열망하는 명성황후의 감동적인 외침을 끝으로 감동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작품의 내용만 좋은것이 아니라, 무대연출 또한 독보적입니다.


1995년 초연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높낮이가 다른 원형의 회전무대는 여전히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데, 특히 평화로운 대한제국 황실의 모습과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 암살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과, 홍계훈이 일본 낭인들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실 회전하는 원형무대는 이제 그다지 신기한 무대장치는 아닙니다.


하지만 무대장치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뛰어난 연출을 만나지 못한다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산만해질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15년간 계속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조금씩 업그레이드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거의 ‘완성형’의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작품의 모든 장면들이 거의 완벽한 합을 이루고 있는것 같습니다.


명성황후로서의 삶을 14년동안 살았다는 이태원은, 사실 뮤지컬 [명성황후]하면 가장 떠오르는 배우입니다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명성황후 역을 그만둔다고 합니다.


 

 



풍부한 성량과 긴 호흡, 그리고 훌륭한 목소리와 연기력으로 그동안 뮤지컬 [명성황후]를 빛내준 그녀가 떠난다니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9월 1일 공연에서 성대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1막 공연 이후 2막 부터는 이상은으로 교체가 되었었는데, 이상은 또한 자기 색깔이 분명한 목소리와 연기를 보여주어 이태원 이후 이 작품을 잘 이끌어 나갈 것으로 보이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2002년도에 이 작품을 처음으로 감상한 이후, 대략 3번정도 더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번 성남에서의 15주년 기념 공연이 5번째 관람인듯 합니다.


하지만 잘 만든 작품이 늘 그렇듯, 볼때마다 또 다른 감동을 주는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역사에 대해, 현재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그리고 풀리지 않은 과거사의 아쉬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최근 들어 나라가 참으로 어수선해진 것 같습니다.


보수 세력들은 진보 세력을 ‘좌빨’이라며 북한과 동일시하고, 진보 세력들은 보수 세력을 ‘수꼴’이라며 무시합니다. (사실 저도 자칭 보수 세력들이 보기에는 ‘좌빨’이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고 싶긴 합니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보수 세력들은 여전히 ‘미국만세’를 외치며, 과거 ‘좌파정권’이 6.25때 한국을 구해준 은혜도 모른채 미국에게 감히 전시 작전권을 반환받겠다고 버릇없이 군것을 사과하고 전시 작전권을 나중에 반환 받겠다며 연기해달라고 미국에게 요청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마저 연출하고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정말 사실로 믿고 싶지 않은,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라는 발언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미국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은 과연 [가쓰라-태프트밀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뮤지컬 [명성황후]에 등장하는,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립을 보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상당히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라는데, 최근 인천공항마저 팔아넘기려는 움직임을 보다 보니, 구한말의 대한제국과 2010년도의 대한민국이 그다지 크게 다른것 같아 보이지 않아 참으로 서글픕니다.


 

 


 

사족(蛇足).....


뮤지컬 [명성황후]와 뮤지컬 [영웅]은 살짝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마지막을 목격한 궁녀 설희가 등장해 부르는 뮤지컬 넘버 [당신을 기억합니다]는 설희가 명성황후를 그리워하며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인데, 저는 이 노래를 듣다 보니 뮤지컬 [명성황후]의 마지막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르더군요.


아무래도 두 작품 모두 윤호진 선생님의 작품이라 그런지 저에게는 형제처럼 느껴지는 작품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