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갈등과 대립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과 대립은, 때로 폭력을 동반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이러한 예기치 않았던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문제는 작은 폭력이든 큰 폭력이든 간에 그 해결방법이 참으로 지난(至難)하고 요원(遙遠)하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쳇말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기 마련인데, 가까이서 저질러진 폭력은 이미 누군가의 육체와 정신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후일 테고, 그러한 상처는 결코 법의 힘과 공권력의 중재에 의해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폭력이 개인이 아닌 집단에 의해, 그리고 공권력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이라면, 해결은 더욱 불가능하고 상처는 더욱 크게 남겨질 것은 뻔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을 순식간에 황폐하게 만들고, 심지어 자아마저 붕괴시킬 수도 있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맞서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요?

 

성경에서 예수는,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일곱 번이면 되겠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복음 18장 21절 ~ 22절)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예수는 나에게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커다란 관대함을 보이고, 용서해 줌으로써 복수가 복수를 낳게 되며 발생하는 더욱 커다란 폭력을 미연에 방지하고 폭력이라는 야만적 행위를 근절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용서’라는 거룩한 행위를 사람들에게 권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사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피가 피를 부르게 만들어 버리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찬성하기 어려운 그러한 방법이라 생각되지만, 실제 자신이 그러한 폭력에 노출될 경우, 용서와 자비를 말하며 상대방의 폭력에 무저항으로 대응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무도(無道)한 상대방에게 무저항으로 대응했을 경우, ‘호구’로 낙인찍혀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게 될 수도 있으니, 실제 폭력에 대해 관용과 용서, 자비로 대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폭력이라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관용과 용서로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으로 받은 만큼 돌려주는 복수로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영화 [인 어 베러 월드(In A Better World)]는 폭력 앞에 노출된 사람들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꽤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스토리를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덴마크의 의사 안톤은 아프리카의 난민 수용소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엘리아스라는 아들이 있는데, 엘리아스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왕따’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를 암으로 잃은지 얼마 안된 크리스티안이 엘리아스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고, 크리스티안은 등굣길에 스웨덴 출신이라며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엘리아스를 보게 되는데 -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엘리아스와 아버지 안톤에게 스웨덴으로 돌아가라며 욕설을 내뱉는 몇몇 덴마크 사람이 등장하더군요. - 이 두 소년은 인연이 있었는지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되고, 크리스티안은 엘리아스와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언제나 엘리아스를 괴롭히던 패거리에 속해있는 소퍼스라는 소년이 엘리아스를 또다시 괴롭히던 중, 말리던 크리스티안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고, 앙심을 품은 크리스티안은 어느날 소퍼스를 기습해 그를 넘어뜨리고 파이프로 마구 내려치게 됩니다.

 

급기야는 칼까지 들이대며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위협을 하지요.

 

 

 

 

 

이로써 사건은 커지게 되고 경찰이 학교에 와서 이들을 조사하게 됩니다.

 

크리스티안과 엘리아스는 칼은 없었다고 발뺌하고, 사건은 서로 화해하는 것으로 대충 무마되고 맙니다.

 

학교로 찾아온 크리스티안의 아버지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며 말합니다.

 

 

아버지 : 네가 때리면 그 애가 또 때리고, 그럼 싸움은 끝도 없어. 모르겠니? 그러다가 전쟁이 나는거야.

 

크리스티안 : 그러니 초장부터 본때를 보여 줘야죠. 어느 학교든 마찬가지예요. 이제 누구도 나 못 건드려요.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요?

 

영화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크리스티안의 말처럼 정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말썽이 생겨버립니다.

 

아프리카의 난민 수용소에서 덴마크로 잠시 돌아온 안톤은 아들 엘리아스와, 이 사건으로 인해 부쩍 친해진 크리스티안과 함께 자주 어울렸는데, 어느날 카약을 타고 돌아오던 중, 정말 황당한 시비에 휘말리게 됩니다.

 

엘리아스의 동생이 놀이터에서 어느 아이와 싸움이 붙었는데, 아이들을 말리던 안톤에게 다른 아이의 아버지가 무작정 뺨을 때리고, 자기 아들 건드리지 말라며 폭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톤은 아이들 앞에서 끝까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피합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지요.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분노를 가슴속에 품고 있는 크리스티안은 이런 안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남자의 직장 주소를 알아와, 가서 혼내주라는 아이들의 닦달에 결국 아이들과 함께 그 남자가 일하는 정비소로 찾아간 안톤이 또다시 무지막지한 그 남자에게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 후 폭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바보 같은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던 어느날, 크리스티안은 창고 구석에서 폭죽을 발견하고, 폭죽에 있는 화약을 이용하여 수제 폭탄을 만들어 그 남자의 차를 폭파시키자고 엘리아스에게 제안을 하는데,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엘리아스는 심한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 안톤은, 더욱 커다란 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안톤은 난민 수용소에서 가끔 실려 오는 응급환자들을 수술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배가 갈라져서 실려 온 임산부들 이었습니다.

 

이 일대를 장악한 반군 대장이 임산부를 보면 태아 성별을 맞히는 내기를 하고, 직접 배를 갈라 태아를 확인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반군 대장이 심하게 다리를 다쳐 난민 수용소에 환자로 들어오게 되고, 안톤에게 치료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안톤에게 인간 같지 않은 그를 치료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안톤은 의사로서 그럴 수 없기에 묵묵히 치료를 계속 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수술대 위에서 숨을 거둔 작은 소녀의 시신을 보고 내뱉은 반군 대장의 망언에 분노한 안톤은, 결국 그를 병원에서 내쫓아 버립니다.

 

그에게 아내를, 딸을, 여동생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 비무장 상태의, 게다가 다리마저 절뚝거리는 그를 내쫓아 버린 것이지요.

 

분노한 사람들에게 묻혀버린 그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

 

반군 대장은 사람들에게 사형(私刑)을 당하게 됩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용서’와 ‘복수’중 어떤 선택이 옳다고 강조하지도 않고,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주인공들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지도 않습니다.

 

단지 복수를 선택하며 또다시 마음속에 상처를 받게 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않고 용서를 하는 것이 상처를 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보여주고 있지도 않습니다.

 

끝없이 용서를 한다고 해서 폭력이 멈춰지는 것도 아니고, 계속 상처는 커질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어떠한 선택을 하던 상처는 피해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편한 선택이지요.

 

 

 

 

 

이 영화의 덴마크 원제는 [복수(Haevnen)]입니다.

 

영어 제목으로 바뀌면서 뭔가 희망적으로 변하기는 했는데, 과연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폭력에 맞닥뜨렸을 때, 용서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복수를 해야 할까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뉘우치지 않는 폭력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착복하고, 억압해놓고서도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어 벌금마저 못 내겠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전두환 같은 나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사족(蛇足).....

 

[In A Better World]라는 영어 제목을 [인 어 베러 월드]라고 옮겨버린 한글 제목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골드문트 (트위터 @Goldmund73)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