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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 감독이 이제는 확실히 제임스 캐머런과 같은 감독들과

경쟁할 생각은 접은 듯 싶다.

150분 동안 거의 대사만으로 이끌어가는 <링컨>은

영화의 주제에 몰입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영화속의 링컨은 꽤 매력적으로(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 덕분이지만)

그려지지만 그렇다고 링컨의 우상화로 관객을 매료시킬 의사는

별로 없어 보인다.

 

대사가 대부분인 영화에서

꼬진 번역자의 자막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정말 곤욕이다.

링컨의 노례해방령의 불완전성을 수정헌법 13조로 확고히 하려는 과정에서

링컨과 의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이 영화는

정확한 번역이 있더라도 그 내용을 따라잡기가 만만치는 않다.

게다가 퓰리처상 수상 작가 도리스 퀸스 굿윈의 원작 <권력의 조건>으로

섬세하게 구성된 링컨의 아포리즘적인, 시적인, 비유적인 대사들은

더더욱 그 묘미를 얻을 수가 없다.

미국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 없어 <링컨>의 자막을 만든 '용감한 친구들' 덕에

(북군을 뜻하는 Union과 남군을 뜻하는 Confederate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첨에는 헷갈린다.)

150분간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가 주는 놀라운 흡인력 덕분에

한 자례 눕지도 않고(보통 영화를 보다가 소파에 눕는 것이 정상~)

영화를 보았다.

 

전쟁 중에 선포된 노예해방령은

전쟁이 끝나면 법원에서 쉽게 뒤집힐 수 있는

임시적인 대통령령에 불과하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면

링컨의 노예해방령은 휴지조각이 된다.

그런데 전쟁은 이제 막바지에 다가선다.

남군은 평화대표단(결국은 항복대표단이 되지만)을 파견한다.

전쟁은 끝내야 한다.

그러나 수정헌법을 통해 노예해방을 헌법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으면

4년여 동안 흘린 피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이것이 링컨에게 놓여진 긴박한 딜레마이다.

수정헌법을 통과시키려면 하원 2/3이 필요하다.(상원은 이미 통과 되었다.)

그러려면 민주당 표(당시 민주당은 노예해방에 반대) 20표가 필요하다.

링컨에게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다.

새로운 하원의원 선거 결과 낙선하여 차기 의원직을 가지지 못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새로 선출된 의원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전 몇 달 동안

의원직을 유지하는(당시에는 이러한 '좀비의원'이 있었다) 그 틈새에

이들에게 공직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매수'하여 20표 이상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링컨은 가까운 공화당 동료들을 설득하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이를 밀어붙인다.

공화당 내 다른 계파와 타협하고

민주당 의원들을 공직으로 매수하고

그리고 남부에서 파견한 평화대표단의 존재를 의회에 '거짓말'로 숨긴다.

(물론 이 거짓말은 법률적으로는 거짓말이 아닐 수 있도록 하는

율사의 능력을 링컨은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여기서 초점은 '노예해방'이라는 대의와 '민주적 절차'의 충돌이다.

링컨은 독재자로 욕을 먹고 의회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공격을 당한다.

이러한 대의의 충돌에 대해 이 영화는 손쉽게

'노예해방'의 대의에 손을 들도록

이끌어가지만 이게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충돌을 현실 속에서 끊임 없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또 한가지 갈등이 있는데

그것은 공화당 급진파인 새디어스 스티븐스와의 대립이다.

스티븐스는 인종간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며

궁극적으로 흑인 투표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을 펼치면

수정헌법에 찬성하는 의원들조차 대부분 등을 돌린다.

흑인을 부인으로 두고(실제는 알 수 없으나 영화 속에서는

흑인 하녀를 남몰래 아내로 두고 있다.)

죽은 후 흑백혼합묘지에 묻힌(이것은 영화에 없으나 역사적 사실이다)

스티븐스를 설득해야 한다.

원칙적인 주장을 펼치는 그의 입을 틀어 막고,

'인종의 평등'이 아니라

'법 아래서의 인종의 평등'만을 주장하도록 설득을 한다.

오랫동안 인종평등을 위해 노력해온 스티븐스를 쉽게 설득할 수는 없다.

 

이때 링컨이 한 말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물론 정확한 번역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도 나침반이 있다.

이것은 분명하게 북쪽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만을 믿고 북쪽을 가지는 못한다.

나침반은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늪과 숲과 장애물을 알려주지 않는다.

나침반만 가지고 북쪽으로 가려고 하면 얼마 못 가서 늪에 빠질 지도 모른다"

대략 이러한 이야기이다.

 

링컨이 권모술수의 대가였다고 평가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이 영화를 보면 그런 평가도 일면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 150분간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민주주의와의 충돌 문제, 그리고 타협의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