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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고
-죽음, 그 마지막 화해의 길로 간 사람을 위한 헌사
오 낙 영
1. 무거운 연극이라고?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비극 혹은 무거운 연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인공의 죽음이 주는 비애인지 아니면 무거움인지 모르겠으나, 그것만으로 무겁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어딘가 무성의해 보인다.
현대의 산업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란 게 ‘사유’라는 명사어는 존재할지언정 ‘사유하다’라는 동사형 존재방식을 수용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감각적 가벼움에 익숙해져 있는지 알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유하다’라는 동사적 요구가 있는 것에 무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세일즈맨의 죽음’은 감각적이거나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이 연극은 무거운가. 오, 제기랄.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할 뻔했다. 나 역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정신을 수습하고, 죽음을 맞으러가는 윌리 로먼 아니 황원석을 따라가 보자. 무거움이 아니라 아픔을 먼저 볼 것이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아픔.
그렇다. 이 연극은 아프다.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고,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곳에 서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플 수밖에 없다.
‘아프다’라는 형용사와 ‘사유하다’라는 동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좀체로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무거움으로 다가오는가.
2. 이 땅, 지금의 우리 이야기
아서 밀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미국 사회의 이면을 핍진하게 그려낸 이 희곡은‘비극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느낀 사실을 진솔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라고 진술한 작가의 말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가장이 자본주의적 사회상황에 어떻게 매몰되어 가는지 잘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어쩌면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번역극이 가지는 한계를 안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배우들은 번역투의 대사에 고역을 치룰 수밖에 없었고, 관객들은 정서적으로 낯선 대사와 상황 속에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공연 중인 극단 은행나무의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은 번안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재창작(remake)이라 할 것이다. 거의 완벽한 한국어-번역투가 배제된-대사는 인물과 상황의 토착화를 확실하게 담보하고 있다. 연출자 김성노의 의도를 작가 김혁수는 성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읽게 된다.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원작의 모호함이 한층 분명한 모습을 갖고 관객에게 다가온다. 주인공 윌리 로먼이 상품외판원이라는 두루뭉실한 직업의 인물로 나온다면, 우리의 황원석은 보험외판원라는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외국보험사들의 국내진출이나 젊은 여성설계사의 등장 등으로 불거지는, 늙고 초라한 황원석의 입지가 보다 자연스럽고 직접적으로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직하도록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 온 주인공 황원석은 이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이다. IMF구제금융시대와 신자유주의경제로 이행되는 모순의 시대에 촉발된 무차별적 무한경쟁의 일차적 희생자요, 화려했던 과거를 들먹거리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일 수밖에 없는 측은한 존재이다.
그렇게 사회에서 주눅들대로 주눅 든 모습이지만 집에서는 아내에게 강압적인 남편이기도 하고, 기대를 저버린 아들들에게서 애써 희망을 엿보려 아니 그렇게 믿으려 헛손질하는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게 된다.
황원석. 헌신적인 그의 아내 이문자, 그리고 허황된 꿈을 좇는 두 아들. 그들 곁의 성공한 이웃 김삼탁 부자. 욕쟁이 할머니. 독고민.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자 이 땅의 주인공들이다.
3. 죽음, 그 마지막 화해의 길로 간 사람
주인공 황원석은 외롭다. 큰아들 도준과의 불화는 그를 조급하게 만든다. 지금 비록 원만하지 않더라도 황원석에게 아들은 아린 사랑이다.
아들 도준의 몰락은 아버지의 외도장면을 목격하는데서 시작된다. 최고의 고교농구 스타로 아버지의 희망이었던 그는 졸업시험에서 낙제한 수학 재시험을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그만 정부에게 다이아반지를 주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 반지 하나 없는 엄마와 낯선 여자에게 그걸 주는 아버지. 혼란의 시작이고 몰락의 단초가 된다.
이 한 번의 목격으로 부자간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와 행동양식이지만 원작의 극 전개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다시쓰기(rewriting)를 한 작가 김혁수의 고민은 이 부분에서 더욱 컸으리라.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그렇듯이 황원석의 희망은 아들이다. 그러나 아들이 기대를 저버리고 건달로 떠돌다 돌아오면서 갈등은 증폭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혹은 덧나게 하면서 갈등과 파멸의 발원지(發原池)가 드러나지만, 그것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그러나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오점으로 남는다.
화해와 새로운 희망의 자리가 되었어야했을 욕쟁이 할머니의 주점에서의 저녁약속은 큰아들 도준의 도벽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한 황원석은 거의 넋을 잃고 만다. 그 와중에도 텃밭에 뿌릴 씨앗을 사다 파종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씨앗이 되어 죽는 것으로 희망을 노래하려 한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싹이 돋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그는 조급해진다. 아들은 다시 떠나려하고 그렇게 떠나보내면 다시 모여살 수 없을 것 같고. 그 자신은 해고된 상황이고.
황원석에게는 화해와 희망의 싹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것 같다. 싹이 돋기 전에 다시 아들이 떠날 것 같으니 이제 실행할 때가 된 것뿐이다. 그에게 죽음은 화해의 길이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파종행위였던 것이다.
4. 시지프스로 남은 사람들
경제와 성과제일주의로 치달은 이 시대 이 땅의 사정은 이제 막장에 다다른 듯하다. 미국의 금융자본주의의 파산을 목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추종하는 얼빠진 정부와 부도덕한 미치광이 자본가들이 펼치는 반인간적 반문화적 무도회에 초대되는 불운의 세월이 도래하였다.
문화를 말하지만 자본과의 야합없이는 존립조차 할 수없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훼절된 정신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자학의 땅에 우리는 서 있다.
그러나 여전히 치열한 정신의 첨단에 서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아니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한 발 한 발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처럼 무대를 준비하고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오! 그들에게 축복 있을진저! 축복 있을진저!
이번에 무대에 올려진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은 세계적인 명작 혹은 고전일지라도 이 땅의 이야기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연출가 김성노와 극단 은행나무(대표 송바울)의 의기투합은 소중한 자산이 되어 남을 것이다.
문화 혹은 예술은 생물학적 생존의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없다면 삶은 무미건조한 여름 한낮의 땡볕 속 지리함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척박함을 무릅쓰고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한국판 세일즈맨의 죽음’
원작 : 아서 밀러
각색 : 김혁수
연출 : 김성노
출연 : 김인수 김명희 송바울 이상범 이승기 김태경 이철희 이종혁 이화선
무대디자인 : 진송희
조명디자인 : 이인연
음악 : 서상원
무대감독 : 손규홍
2009년 2월 12일(목)~ 3월 29일(일)
대학로 라이프씨어터(혜화역4번출구 전방 1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