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배우는 아기들도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쉽게 사용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 쉬운 말, "나" 대신 선우는 꼭 "하누, 하누"하면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처음엔 "아! 얘들은 일상 용어중에 아기가 예쁘다고 honey, honey! 부르나보다 했더니, 제 이름 "선우"를 발음 못해서 "하누"였다. "하누"보다 훨씬 쉬운 "나" 혹은 "내가"는 전혀 학습이 안된 채, 한동안은 대부분의 대명사가 칼라로 결정된다.

레드, 블랙, 옐로우, 그린, 블루, 핑크, 퍼플,오이젠(오렌지의 선우식 발음), 유난히 "브"에 액센트를 넣고 두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발음을 명료화하는 "브라운"까지. 선우 주변의 대부분의 사물은 선우가 아는 이 열개 미만의 칼라로 충분히 이름지어진다.
아파트 앞뜰에 핀 꽃이름도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가려낸다.장미를 짚으면 "레드"자그맣게 숨어 핀 쑥부쟁이는 "화이트" 나뭇잎들은 "그린, 그린이네" 맨드라미는 용케도 "퍼플"이라고 "레드"와 차별화 할 줄도 안다. 쓰레기통 옆을 어슬렁 거리는 도둑 고양이들도 무섭지 않은 선우는 손까불러 부른다."브라운! 브라운!" 기저귀찬 엉덩이를 실룩거리면 쫓아 다닌다."함-머니, "블랙" 업네!"가버린 검은 고양이 찾아내라고 블랙 블랙 떼를 쓴다.
모든 칼라 중에도 "그린"은 선우를 가장 기쁘게 하는 대명사다.
"함머니 그린! 하누 그린!" 여름 석달 동안 선우는 할미손에 그린 키(크레파스)를 쥐어주고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라고 혹사(?) 시켜서 3권의 화집을 남기고 떠났다.

크고 작은 것을 대비시키는 선우의 대명사는 또 간단하다.
무엇이든 큰 것은 "엄마" 작은 것은 "애기"가 된다.
"함-머니 물놀이!" 욕조에 미지근한 물 받아 놓고 간이 푸울장을 만들라는 선우 명령이다.
물줄기 졸졸 틀어 놓으면 "애기 물이야?" 손가락 사이로 달아나는 물줄기 간지러워 하더니 며칠 지나고 사뭇 대담해진다.
"아기물 끊어! 엄마물, 엄마물 줘"
좔좔 쏟아지는 물줄기 겁도없이 손바닥에 받으며 콧등을 찡긋대며 만족하단다. "엄마물 좋아!"

31개월 꽉찰 무렵, 선우에겐 새로운 대명사가 생겼다.
"하누가 해" 대신 "내가 해" "나"의 개념도 알고 제대로 적용도 한다.
한동안은 할아버지든 할미든 아빠엄마도 물론 모두 "이거" 아니면 "저거"가 되버리더니 슬그머니 "얘" "쟤"도 주워들은 모양이다.
"얘는 핑크곰이야. 핑크곰 좋아!" 대명사로 쓰이던 핑크를 형용사로 제대로 쓰기도 한다.
졸졸 나오는 수돗물 가리키며"쟤는 아기 물이네!"

며칠 후면 저 살던곳으로 돌아가야하니 선우 엄마아빠는 온종일 밖으로 바쁘다.
조금도 기죽을 줄 모르던 폭염은 질기기도 하니 하루는 더욱 길기만하다.
그림도 그리고,곰인형들과 인형극도 해보고, 좁은 욕조에 고무보트까지 불어넣고 물놀이도 두어번이나 했으련만 선우는 할미 사정은 전혀 봐줄 기미가 없으니 낮잠도 안잔다.

얼른 저녁밥이라도 지어놓고 선우 재워볼 양으로 서둘러 수도물 콰르륵 틀어 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