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선 '나'를 보여 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알아낸 것을 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앎을 위해서, 그리고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먼저 노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치열한 흔적, 그 흔적의 길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산정(山頂)에 올라서서 두 다리를 뻗고 산 아래를 향해 두 손을 흔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산정을 향해서 먼저 출발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시행 착오를 겪은 사람이며, 그 실수의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은 사람이며, 그 경험에서 온고지신의 지혜를 닦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생은 강단 위에서 강단 아래로 정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정답이 없는 절망속을, 해결이 없는 배회 속을 얼마나 멋지게 견딜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람이다. 잘해야 그는 정답을 찾기 위한 도정에서 얻은 상흔을 보여 줄 뿐이며, 심지어 오답 투성이의 앎과 삶에서도 섣부른 권태나 냉소에 빠지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용기 있게 보여 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가르칠 '무엇'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르칠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좋은 선생이란 허우적대면서도 격(格)이 있고, 자빠지면서도 멋이 있다는 것뿐.
김영민, <문화, 문화, 문화 : 산문으로 만드는 무늬의 이력>, (동녘, 1998, 12, 20.) 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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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가장 진하게 다가온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 믿음의 길"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선생은 앎을 위해, 그리고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자라고 하는데,
너무나 쉽게 믿어버리고 마는, 한편으로 집요하게 속이고,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는 세상에서
참 선생의 이런 태도는
모든 종교인이 먼저 지녀야 할 자세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쉬운 답에 매달리고 있는가!
신앙이란 정답이 없는 절망 속에, 해결이 없는 배회 속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이다.
불확실한 삶으로의 모험과 결단이 없는 이는 결코 신앙의 밑절미에 다다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만 하였다.
그는 자신의 물리적 조건, 사회적 조건, 심리적 조건을 박차고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이름으로 대책 없이 무모한 짓을 일삼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런 이에게는 삶의 절제와 조율이란 보이지 않으며, 성숙은 기대할 수도 없다.
깊은 삶의 바다 한 가운데서 허우적대면서도 격이 있고, 자빠지면서도 멋 있는 사람이 되려면,
앎과 삶과 믿음이 삼위일체처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버티고 견디는 지난한 세월이 쌓여야 한다.
강력한 죽음의 그늘 속에서도 존재하려는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 향린 목회 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