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적 철학의 위대한 형성기에 있어, 세 계통의 사상이 나타난다. 이들은 세부적으로 많은 차이를 수반하는 가운데 각기 신을 황제의 이미지로, 도덕적인 힘(energy)을 의인화한 이미지로, 그리고 궁극적인 철학적 원리의 이미지로 만들고 있다. ~~
이 세 사상 학파는 신격화된 시저, 히브리의 예언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각기 연결 될 수 있다. ~~
유신론적 철학의 역사는 이 문제에 대응하는 세 가지 상이한 방식들이 결합하고 있는 다양한 무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갈릴리인[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기독교의 기원에는, 이 세 주요 사상 계통의 어느 것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 또 다른 암시가 들어 있다. 그것은 통치하는 시저도, 무자비한 도덕가도, 부동의 동자도 역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적 속에서 서서히 사랑에 의해 작용하는 세계 내의 부드러운 요소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 이 세계가 아닌 왕국의 현재적 직접성 속에서 목적을 찾는다. 사랑은 통치하지 않으며, 또 부동의 것도 아니다. 또 사랑은 도덕에 대해 별로 주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은 미래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 현재에서 그 보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A. N. 화이트헤드 지음 /오영환 옮김, <과정과 실재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민음사, 1994, 3. 25, 1판 4쇄), 589-590.
==============================
화이트헤드는 탁월하게 실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의 관념을 지닌 유신론 전통에서 신의 이미지가 정치적 힘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이미지로, 정형화된 율법의 인격화된 이미지로, 세계의 근원으로서 불변하는 원리인 형이상학적 부동의 동자의 이미지로 이해되어 왔고, 그 세 가지 이미지가 결합되어 신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되는 갈릴리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 가지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는 탁월하게 실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유한한 이 세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스며들어 그것만으로 충분한 삶의 만족과 기쁨을 만끽하게 하는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은 힘으로 지배하지 않으며, 언제나 때에 맞게 움직이며, 법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는 것 자체로 충분한 만족에 이른다. 사랑은 이유가 없으며 무엇을 위해 행하는 수단도 아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할 뿐이고, 사랑하는 그 순간으로 족하다.
갈릴리 예수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무엇보다 바로 이런 사랑의 삶을 사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향린 목회 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