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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말과 글

by phobbi posted Dec 31, 2024 Views 9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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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12-31

2024. 12. 31.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듯이, 우리의 경우 말은 놀이라기보다는 자기 수양[修己]과 조화로운 공동체[安人]의 길이었다. 그것은 소학(小學)으로 불리는 철저한 생활 훈련에서 출발하여 사서삼경을 암송하는 엄격한 도덕 교육과 지적 훈련을 거쳐 예리한 경세적 안목을 터득하고 호방한 예술적 기개를 익힌 유가의 지성인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도리를 실천해 나가는 구체적 행위였던 것이다. ‘말을 듣고 사람을 천거하지 않는다(不以言擧人)’고 했던 공자이지만, 그는 이와 동시에 사람을 보고 말을 버리지 않는다(不以人廢言)’고 굳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을 정도다. 말의 씀씀이가 주로 놀이의 구조와 성경으로 규정되면 당연히 규칙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말놀이의 규칙을 따지고, 그 남용이나 오용을 규명하고, 그 성격을 분류하는 따위는 물론 서양 학문에서 언어를 둘러싸고 벌이는 가장 일반적인 활동이다. 여기서 내가 주로 주목하는 점은 이 활동이 우리의 전통에서 흔히 말하는 수신(修身), 혹은 성숙과 어떤 관계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말의 성격과 기능을 논리적·의미론적 층위로 제한시키고 그 층위에 따른 논의 정합성을 추구하는 활동은 서양의 언어학과 언어철학이 주력했던 것이며, 또 나름의 성과를 일구어냈다. 그러나 여기서의 내 관심은 매체나 기호로서의 말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말, 성숙의 틈과 경지를 열어주는 단서로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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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말하자면 내 고민이란 시비곡직을 따지는 대화와 글쓰기가 실존의 깊이를 감당하는 성숙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며,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인 모색 과정과 다른 차원에서 간단 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실천적 결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며, 인식과 글로써 사람을 논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으로 인식과 글을 논할 것인가 하는 문제며, 마침내 글은 왜 쓰며 말은 왜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김영민, <진리·일리·무리>(철학과 현실사, 1999. 4. 15) 15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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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로 이뤄지는 모든 학문의 목표와 결실이

나를 바꾸고 사회를 성숙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국내외 유수한 대학 출신이라는 이들이 너무나 어이없게 하는 판단과 행동을 볼 때마다,

지난 세월 서구식 근대화를 무던히 쫓아갔던 우리의 100년을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고, 서울대를 거쳐 하버드를 나왔을 때,

누가 그를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겠느냐마는

그 똑똑함이 온전히 자기 이익에만, 자기 살길에만 이용될 때,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정부의 관료이고, 국가를 운영하는 지위에 있을 때,

우리 사회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17세기 이후 만개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가치중립적 학문성에 속아

참된 가치의 실현에 소홀했던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정보의 인식을 넘어 수신(修身)과 성숙(成熟)에 이르고,

자신을 넘어서 다른 이들과의 상생과 협력에까지 나아가야 참된 공부(工夫)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향린 목회 58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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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goodall 2024.12.31 10:28
    행위로서의 말, 성숙의 틈과 경지를 열어주는 단서로서의 말. 넘쳐 나는 말과 주장과 거짓말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이 즈음. 깊이 공감하며 제 자신을, 한국이라는 사회를, 세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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