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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내 상처에 새겨진 너의 고통

by phobbi posted Apr 11, 2025 Views 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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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4-11

2025. 04. 11.

 

(아리마대) 요셉이 느꼈던 심경은 연민, 동정, 슬픔, 측은지심, 분노, 수치를 포함하지만 좀 더 복잡한 무엇이다. 고통을 매개로 요셉과 예수를 하나로 엮는 무엇,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엇. 우리말 번역으로 꼭 들어맞는 단어를 찾기 힘든 라틴어 단어 콤파시오(compassio)’가 요셉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콤파시오의 의미를 단순하게 풀면 함께(com) 고통을 겪음(passio)이다. 그러나 성서와 고전의 용례를 살펴본다면 이 단어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망들을 발견하게 된다. 신학자 웬디 팔리(Wendy Farley), 콤파시오(혹은 영어의 compassion)는 내적인 감정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이 내게 상처로 새겨질 때 우러나오는 힘이라 설명한다. 이 힘은 상대를 제압하여 우위를 점하는 예사로운 힘과는 다르다. 오히려 나를 타자의 입장에 놓고 타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솟아나는, ‘관계에 기반한 힘이다.

 

이 독특한 ’, 콤파시오를 구성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지식을 통해 얻는 지식이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타자의 입장에서 현상을 이해하는 이다. 함께 고통을 겪기 위해서는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입장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현상을 보고, 듣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은 현상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이제껏 관련이 없는 줄만 알았던 나 자신과 그 현상의 관계 또한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고통받는 이들을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넘어, 고통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 나와 그들을 함께 볼 수 있게 하며, 책임과 연대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즉 콤파시오는 자신이 속해 있는 좁은 경지를 뛰어넘어 타자에게 나아가는 초월의 경험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성찰의 경험이며, 너와 내가 따로 없이 하나되는 일치의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초월과 성찰과 일치의 경험-바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요셉이 죽은 예수의 시체를 거두며 겪었던 것이 이것이었다. 그는 예수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을 경험하며 비로소 예수를 알고, 예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그가 겪은 고통에서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시체를 거두며 그와 하나되었다.

 

조민아 지음, <일상과 신비>(삼인, 2022. 12. 23.),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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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 모든 종교의 본령이다.

 

성서가 그리는 하나님은 애굽에서 신음하며 울부짖는 이들을 위해 일하신다.

고대 근동의 여타 다른 신들은 강력한 힘의 현현으로 지배자의 편을 들지만, 야훼는 다르다.

그는 이삭과 사라뿐만 아니라 이스마엘과 하갈을 기억하신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는 사랑 때문에 전능의 속성을 포기한다.

사랑은 상대에게 맞추려는 끊임없는 노력이기에,

절대로 제 맘대로 하지 않고, 또 그렇게 못한다.

제 맘대로 해 버리는 순간 사랑은 날아간다.

 

예수는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은 이다.

그래서 그의 고유성은 케노시스(kenosis) , 자기 비움이다.

그는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다.

그래서 그를 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가득한 자는 결국 십자가에 달렸다.

그는 거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가장 극심한 고통의 한복판에서 용서를 구했던 이가 달렸던

그 십자가는 사랑의 절정이며,

존재의 근원적 고통에 깊게 함께 한 사건이었다.

 

 

 

 

- 향린 목회 159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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