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24.
인간적 고통에 대한 한강의 독특한 미시적 글쓰기는 전 세계 많은 독자들의 감성적 반향과 공감을 불러왔다.
반면, 한국의 기성세대 중에는 한강의 작품을 불편해하고 읽어 나가기 쉽지 않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다. 왜 그럴까? 노벨위원회가 밝혔듯이,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고 실험적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을 이루어 기존의 문체 등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생소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속도, 권력, 경쟁, 집단, 국가, 민중, 그리고 역사 등의 개념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한국이 자랑하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모더니즘의 성취였다. 이를 문화적으로 해석해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가난의 한을 푸는 과정이었고, 김대중 시대의 민주화는 독재의 한을 푸는 과정이었다. 개인, 민초, 감성, 상처, 고통, 아픔, 치유 등은 감춰지고 참아내야 할 것들이었다. 모든 문학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고 어떤 문학도 역사 및 사회와 분리되기는 힘들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널리 읽힌 소설에서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민중의 바다, 그리고 권력의 태풍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토지』, 『지리산』, 『태백산맥』, 『장길산』, 『영웅시대』 등은 거대한 역사적 산맥 속에서 인간을 그려냈다. 이는 서양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닥터 지바고』, 『레미제라블』 등도 인간적 고민에 질문을 던지지만, 장엄한 역사적 파도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에서는 ‘역사’라는 단어가 단 한 번 등장하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이 단어가 두 번 나올 뿐이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계기로 저항과 진보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민중’이라는 단어는 두 작품을 통틀어 아예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은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 몇 군데 짧게 소개되는 것이 전부이다. 더구나 작가가 주인공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도 적극적이고 이성적인 주장이 아니라, 죽은 자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소극적이고 감성적인 고백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신은 죽었다”며 현실을 질타하고 역사의 방향을 안내한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의 동호나 『작별하지 않는다』의 인선의 엄마는 역사가 그들에게 가한 상처를 이겨내기 위하여 스스로와 고독하게 싸운다. “같은 나라의 군인들에 의하여 학살당한 시신을 왜 태극기로 덮는가?”라는 소년 동호의 고백이 이 소설에서 갖는 정치적 메시지로 메아리칠 뿐이다. 나는 동호의 영혼이 자신의 시신이 썩고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신이 모두 빨리 타버려 자신이 이 상처와 비극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을 가장 가슴 먹먹하게 느꼈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가장 문학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 문체의 독특함만큼이나 인간과 역사를 연결하는 방식도 특이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한국의 역사를 인간 보편의 시각에서 세계에 더 강렬하게 알렸고, 한국인들에게는 더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었는지 모른다.
『사상계』 2025 봄 창간 72주년 기념특별호, 특집 응답하라 2025, (사상계 미디어, 2025. 4. 1.), 류상영, 「한강이 던지는 질문: 계엄령으로 다시 상처받은 한국 치유하기」 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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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모어(母語, Mother tongue)로 노벨상 작품을 읽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이 도약한 것이고, 도약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한강의 글은 지독히도 내면적이고 너무나도 아프다.
단 한 줄, 단어 하나 그냥 쓴 것이 없고,
겪어 가면서 느껴가면서 바늘로 손톱 끝을 찌르듯 그렇게 쓴다.
그래서 힘들다.
거대한 역사의 강물에 휩쓸리는 돌멩이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온몸에 상처를 입고,
급기야는 모두 맨질맨질한 자갈돌이 되어버린다.
개성은 없다.
빡빡 민 머리에 검은 교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열하여 서 있는
그 옛날 중학생들처럼.
튀면 안된다. 그러면 짓밟힌다.
사상의 자유란 없다.
마음껏 끼를 발산했다가는 된통 당한다.
산업화의 물결에서도, 민주화의 바람에서도
개인의 여린 감성은 늘 숨죽여야 했고,
있으나 없는 듯, 죽이고 또 죽이면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
한강은 바로 이 부분을 너무나 농밀하게 다룬다.
거시적인 것만을 보면 미시적인 것을 놓친다.
그렇다고 미시적인 것에만 주목하면 거시적인 세계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숲과 나무를 모두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역사와 민중도 잊지 말아야 하고,
깊은 동굴에 숨어 울고 있는 여린 생명도 만나야 한다.
- 향린 목회 172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