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누가 나의 말을 기억하여 주었으면! (욥기 19장 23-27절)
2019.08.04 김용희님을 위한 향린공동체 연합예배
향린공동체에 속한 교회들은 오늘 고공농성 56일째를 맞고 있는 김용희님과 함께 하기 위해 강남역사거리에서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배당이 아닌 길거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불행한 시대를 반증합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떠맡기는 쪽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억울한 사연들이 많고,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 TV에 방영된 김용희님의 영상편지는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죽고 다치고 그럽니까. 우리 국민들이 노동자들의 생명에 대해서 좀 더 가슴 아파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원이 없겠습니다.”
저 역시 김용희 님이 투쟁해 온 지난 24년 동안의 외로운 삶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최근 신문기사와 본인이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글을 나중에 읽고 나서야 비로소, 삼성으로부터 얼마나 부당한 일을 겪어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노동자 탄압의 종합세트’라 할 만한 모든 일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탑에 올라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들어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얼마 전 55일 동안이나 진행된 단식을 멈추겠다고 밝혔지만, 이렇게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제대로 숨이나 쉴 수 있는지 염려하게 됩니다. 이런 애타는 상황에서도 삼성은 어떤 답변도 내놓지 않고 있으니, 땅으로 내려올 수도 없는 기막힌 현실이 야속합니다.
이에 우리는 김용희님의 염원을 우리의 목소리에 담아 함께 외치고자 여기 왔습니다. 우리가 외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삼성이 하루빨리 대화와 문제해결에 나서는 것입니다.
삼성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다른 기업들이 얻을 수 없는 특혜를 누렸고, 국민들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만큼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더욱 크게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삼성은 기업으로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도리조차 무시했습니다.
소위 ‘무노조경영’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고수하며, 국민의 기본권리로서 헌법 제33조에 명시된 노동3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반헌법적 활동을 해왔습니다. 또한 노동조합법 제81조에 명시된 ‘노조 설립에 대한 부당 개입 및 훼방 방지’에 관한 법을 계획적으로 어기며 노동자들을 탄압했습니다.
회사를 위해 일한 노동자들의 기본권리를 파괴하는 일에 거의 재벌기업의 사활을 걸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는 낯선 것이 아닙니다. 삼성의 핵심경영진들이 노조 탄압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한 사실이 지난 2012년 초, “S그룹 노사전략”이란 심상정 의원의 폭로문건을 통해서 드러난 바 있습니다.
삼성그룹은 전체 회사 차원에서 노조설립을 막기 위해 ‘노조 와해와 고사 시나리오’를 수립하고, 거의 노조파괴 백화점이라 할 만한 일들을 벌였습니다. 특히 회사 측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문제사원’으로 분류해서 동향파악을 하고, 결국에는 퇴출시키기 위해 작업했던 ‘핵심문제인력’이 2011년에만 369명, 누계로는 3,562명에 이른다고 하니, 김용희님도 그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우리는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 4월의 삼성전자 압수수색 과정에서는 노조활동 전반에 대한 대응지침을 담은 ‘마스터플랜’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삼성은 사과나 반성은커녕, ‘바람직한 기업문화’를 만든다고 국민들을 속이고 있으니,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성이 돈 많은 초일류기업이라 하지만, 저 철탑에 올라 두 달 가까이 열풍에 메말라가는 사람의 작은 요구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렵기 때문인가요? 그간 자신들의 폭력으로 인해 고통당한 노동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일을 해결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일 삼성이 김용희님의 요청에 대해서, 글로벌 기업으로서 지녀야 할 합당한 도덕성을 갖추지 않고 그냥 외면하고 무시하고 침묵하면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판이 될 것입니다. 김용희님의 이 억울한 사연이 언론기사로 잠시 떠돌다 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래가 되고, 춤이 되며, 소설이 되고, 연극이 되고, 영화가 되고, 설교가 되는 순간, 삼성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특권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삼성이 만일 언론을 조작하고, 정치를 매수하고, 법을 길들이면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에 미치는 큰 불행이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난 금요일에 일본이 자행한 경제보복으로 인해, 한국이 ‘수출절차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삼성과 같은 반도체 기업들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동의와 지원을 받아서 헤쳐가야 할 이 난국에 삼성은 떳떳한 기업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용희님에게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기업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먼저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는 일에 굼뜬 정부가 어떻게 촛불정부라고 자처할 수 있습니까? 어려운 시기라고만 말하면서 항상 사회적 약자들에게 먼저 희생을 요구해온 풍토를 바꾸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한국사회의 과제란 사실 많지 않습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출발점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 고립된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을 우선적으로 푸는 일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사실 그것이 인간이 쌓아온 도덕의 감각이요, 종교의 가르침이요, 정치의 목표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씻기 위해 싸운 인류의 투쟁은 가장 오래된 인간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나오는 욥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말씀에서, 외롭게 부르짖고 있는 욥만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주면서 정의로운 세계를 세우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듣게 됩니다.
거대한 현실의 장벽에 부딪치면서도 진실을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욥과 그의 투쟁에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의 저 오랜 외침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강철 펜으로 바위에 새겨 주었으면!” (욥 19:23-24)
우리는 욥의 이 탄식이 바로 저 철탑 위에 오른 김용희님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간절함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욥을 저주하면서 ‘고통스런 네 현실 자체가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조롱할 때, 욥은 아직 동터오지 않은 시대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말합니다. 고통을 저주하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지 않고,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증언합니다.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무너져 내려도, 난 내 육체를 갖고 하나님을 볼 것이다. 나는 내 눈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을 보고야 말 것이다!” (25-27절)
욥의 이 말에는 동정을 구걸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무기로 삼고 거듭난 새로운 삶의 윤리가 표방되고 있습니다. 욥기의 가르침은 바로 여기서 완성됩니다. 욥이 마지막에 가서 다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동 목적이 뚜렷해진 자리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곳이었음을 당당하게 보여줌으로써, 욥은 자기 외침을 완성합니다.
2주전부터 향린교회 교우들은 길거리 기도회에서 욥기를 읽어왔습니다. 그것은 욥과 같이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김용희님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저 철탑 위에서 말없이 새나오는 비명소리에 하나님의 찢어진 심장이 덜렁거리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이 겨우 독선과 침묵으로 밖에 대처하지 못하는 현재의 구도는 반드시 깨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철탑에 올라 인간의 존엄성을 외치는 노동자의 몸부림을 자본의 힘으로 짓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낡은 습속은 반드시 깨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김용희님에게 부탁드립니다. 자본의 제물이 되지 말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투쟁을 통해서 정의로운 그리스도의 얼굴이 이 사회에 나타나길 우리도 기도하겠습니다. 무사히 땅을 밟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